건강하게 여름나기 9

복날과 동지, 죽집에서 먹던 팥죽

건강하게 여름나기 9

복날과 동지, 죽집에서 먹던 팥죽

오늘날 팥죽은 동지에 먹는 음식으로 알고 있지만, 일제강점기까지 복날에 팥죽을 먹었다. 동지에도, 복날에도 먹던 음식이었다. 조선후기부터 죽집이 있어서 주로 팥죽을 팔았다. 팥죽을 끓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5~7시간 불을 때면서 끓여야 했기에, 죽집은 새벽 장사를 위해 밤새 팥죽을 끓인다. 이런 이유로 죽집에 화재가 잘 발생했다. 일제강점기 죽집은 주로 시장근처에 있고 한그릇에 5전, 반그릇에 3전의 가격으로 팥죽을 팔았다.

팥죽은 팥을 삶아 거른 물에 쌀과 새알, 삶아 으깬 팥을 넣고 쑨 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먹은 기록이 있는데 더운 복날과 추운 동지에 먹는 음식이었다. 이런 날 외에도 평상시에 먹기도 했는데, 팥은 몸에 좋은 곡식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부터는 새벽에 죽을 파는 죽집의 단골 메뉴이기도 했다.

동짓날 팥죽을 먹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6세기의 중엽 중국 남조 양나라의 『형초세시기』에 처음 등장한다. 이 책에 의하면 동지에 팥죽을 쑤고 귀신을 쫓았다고 한다. 이 풍습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조선시대 문헌에 의하면 동짓날 팥죽을 먹고 또 문에 바르기도 했다. 이런 내용은 1921년 최영년이 편찬한 『해동죽지』와 당시 신문에도 많이 나온다. (최덕경, 「조선의 동지팥죽과 그 사회성」, 『역사민속학』20, 2005.)

복날 팥죽을 먹는 것은 고려시대 이후의 풍습인데,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되었다. 『동아일보』 1934년 7월 7일 「금일이 중복」이라는 기사에는 ‘사나운 폭우와 거치른 동풍으로 침울과 음랭으로 복중 폭렬을 모르고 지냇다. ... 도회의 사녀들은 그래도 중복이라고 아침에 팟죽, 점심에 연계찜, 사이사이 참외를 사서 제법 중복맞이를 하는 모양이다.’라고 하여 복날 아침에 팥죽을 먹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56년 12월 17일 동지 이야기(사진출처:동아일보)

새벽에 죽을 파는 죽집이 조선 후기부터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도 도시의 시장에 존재했다. 팥죽집에서 화재가 났다는 신문기사가 많이 보인다. 팥죽을 만들기까지 6-7시간을 계속 아궁이에 불을 피워야 했기 때문이다.

『규합총서』,『부인필지』등의 문헌에는 팥죽의 구체적인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팥에 약 8~10배의 물을 붓고 팥알이 충분히 퍼지도록 삶은 다음 체에 걸러서 껍질을 제거하고 가라앉힌다. 가라앉힌 윗물은 떠서 솥에 붓고 쌀을 넣은 다음 중간 불에서 끓이다가 쌀이 거의 퍼졌을 때 가라앉은 팥 앙금을 넣고 고루 섞어서 다시 끓인다. 이때 찹쌀가루를 익반죽하여 둥글게 빚은 새알심을 함께 끓인다. 팥죽을 끓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5~7시간 불을 때면서 끓여야 한다.

그래서 팥죽집에는 아궁이에 불을 오래 때고 장작도 많이 쌓아두었는데 이런 곳에 불이 붙으면 집이 전소되었다. 『동아일보』 1921년 5월 17일 「소아 이명이 소사(燒死)」라는 기사를 보면 홍파동의 팟죽집에 불이 나서 그 집 아이 2명이 불에 타죽었다고 하였다. 불난 원인은 건넌방에 세든 사람이 촛불을 잘 못 두어 불씨가 옮겨 붙은 것인데 순식간에 집이 탄 것이었다. 팥죽집에서 팥죽을 쑬 때 열기가 엄청나서 폭풍우 속에서도 팥죽을 쑤다가 화재가 나기도 하였다.

팥죽을 간단하게 쑤는 방법이 『세설신어』에 나온다. 미리 팥을 삶아 말려 가루를 만들어 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쌀죽에 그 가루를 섞어 넣어 끓인다고 하였다. 『동아일보』1931년 12월 12일자에도 팥죽을 빨리 끓이는 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세설신어』의 내용과 같다.

팥죽은 일제시대 서울의 시장에서 1그릇에 5전, 반그릇에 3전 정도의 가격으로 새벽부터 팔았다. 새벽 영업을 위해선 밤을 새서 팥죽을 끓여야 한다. 서울의 팥죽 집 중 하나는 우미관 극장 골목 안으로 들어가 청계천 채 못가서 오른쪽에 있었다. 죽 한 그릇에 짠지 한 그릇을 주었는데 설탕은 한봉지에 1전씩 따로 사서 팥죽에 넣어 먹었다. 이 골목은 6.25 사변때 없어져 지금은 삼일로 넓은 길이 되었다고 한다. (어효선, 『내가 자란 서울』,대원사, 2003)

새벽의 죽집은 부산에도 있었다. ‘경남 동래군 기장 연안에 해산물이 풍부하다는 소문을 듣고 멀리 밀양에서 백발이 성성한 60세 가까운 늙은이(주소, 성명 미상)가 추석이 박두한데 고기행상이라도 하여 보겠다는 생각으로 몇 푼의 돈을 가지고 기장시장에 와서 지난 14일 오전 7시 반에 팟죽 한그릇에 3전을 주고 사먹은 뒤 자리를 옮겨 양지쪽에 앉은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음으로 급히 동부의원 권하준씨의 응급수단이 있었으나 아무 효과없이 그냥 세상을 떠났다는데 기장면에서는 행려시로 취급하게 되었으며 소지품으로는 현금 15원을 가졌다더라.’(『동아일보』1929.09.28. 「팟죽 먹고 죽어」)

요즘은 복날에 팥죽을 먹지 않는다. 다만 동지날 먹는 음식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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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