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의성빙계 계곡의 빙혈(氷穴), 풍혈(風穴)

빙계리에는 얼음구멍을 의미하는 빙혈(氷穴)이 있기 때문에 마을 명칭이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삼복더위에는 시원한 바람과 차디찬 물이 솟아나고, 엄동설한에는 더운 기운이 솟아 나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경상북도 의성 빙계 계곡의 빙혈(氷穴), 풍혈(風穴)

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계곡에 빙혈과 풍혈이 있고, 빙계 8경도 있다.

빙계리에는 얼음구멍을 의미하는 빙혈(氷穴)이 있기 때문에 마을 명칭이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삼복더위에는 시원한 바람과 차디찬 물이 솟아나고, 엄동설한에는 더운 기운이 솟아 나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크고 작은 빙혈과 풍혈이 군데군데 있다. 이곳은 얼음구멍과 바람구멍이 있어 빙산(氷山, 367m)이라 하며, 그 산을 감돌아 흐르는 물줄기는 빙계라 하고, 마을은 빙계리라 불리고 있다. 마을 한쪽에 비석이 있는데, 이것은 빙계가 경상북도 지역 8승의 하나로 선정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때 한자로 새겼으며 1934년 9월 24일에 세웠다. 기념비로 미루어 빙계는 경상북도에서는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진 곳임을 알 수 있다.

1987년에 군립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마을의 산 경사면에 쌓인 암석 덩어리가 만드는 자연현상으로, 암석 덩어리 틈에 저장된 찬 공기가 여름철에 외부의 더운 공기와 만나 물방울과 얼음을 만들고, 겨울에는 따뜻한 공기가 흘러나와 오히려 얼음이 얼지 않는 희귀한 자연현상으로 생긴 것으로 2011년에 빙계리 일대가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27호로 지정되었다.


                    바위에 빙계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는데 , 비석만 보인다.

       빙혈로 들어가는 곳곳의 바위틈 사이로 냉풍이 나온다.

        빙혈의 각 가지 세종실록지리지 기록들이 석판 위에 새겨져 있다. 

                바깥 온도가 34도, 빙혈안의 온도계는  6도,

                                        풍혈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나온다.
                                        임진왜란때, 왜적들이 빙계사5층 석탑 감실에 있던 불상은
                                        가져가면서 대좌를 방치 한것을 이곳에 자리잡았다.

                                        경북팔승지일각
                                                       빙계사지  5층석탑


빙계 계곡을 따라 빙계 8경이 있으며,
제1경은 빙혈(氷穴), 제2경은 풍혈(風穴), 제3경은 인암(仁岩), 제4경은 의각(義閣), 제5경은 수대(水碓), 제6경은 석탑(石塔), 제7경은 불정(佛頂), 제8경은 용추(龍湫)로 불린다.

제1경인 빙혈(氷穴)은 마을 뒷산 산기슭의 바위 아래 차가운 동굴이다. 이곳은 4∼5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넓이로 입춘 때면 찬 기운이 나오기 시작하여 한여름에는 얼음이 언다. 그리고 입추(入秋)가 되면 여름내 얼어있던 것이 차츰 녹아서 동지(冬至)에는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고 오히려 따뜻한 기운이 나오는데, 마을에서는 빙혈(얼음구멍)이라고 부른다.  제2경인 풍혈(風穴)은 마을의 도로 가장자리에 있는 바위 사이의 좁은 틈에서 바람이 나오는 것을 이른다. 이곳은 빙혈처럼 얼음은 얼지 않으나 좁은 틈에서 여름에는 찬바람,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 등 계절에 반대되는 바람이 나온다. 이렇듯 신비롭게 계절에 반대되는 바람이 주변의 다른 곳에서도 나오고 있는데, 마을에서는 이를 풍혈(바람구멍)이라 부른다.  제3경인 인암(仁岩)은 빙계서원 앞에 위치한 바위에 한낮이 되면 햇빛에 의해 새겨지는 글씨를 이른다. 빙계서원 앞에 커다란 바위에 아침이나 저녁때는 볼 수 없는 글자가 신기하게도 한낮 정오가 되면 어질인자 (仁) 모양의 그늘이 바위에 나타나 마치 글을 새겨놓은 듯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라지는 신기한 현상이 반복되는데, 마을에서는 어진바위라고도 한다.  제4경인 의각(義閣)은 윤은보의 의리를 기려 세운 의사각을 이른다. 영의정까지 벼슬에 오른 윤은보가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윤은보는 모재 김안국과 회재 이언적 두 분의 위패를 혹시나 모를 훼손에 대비하여 청송 주왕산에 모시어 피난을 시켰다. 이후 두 분을 서원에 다시 모시자 그 공이 크다고 하여 비와 전각을 세워 의사각(義士閣) 이라 했다.  제5경인 수대(水碓)를 마을에서는 물레방아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는 오래전에 시냇물을 이용하여 방아를 찧던 물레방아가 있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제6경 석탑(石塔)은 빙산사지에 있는 돌탑을 이른다. 빙산사지에는 신라말 또는 고려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5층 돌탑인데 이는 현재 보물 3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7경 불정(佛頂)은 불정봉(佛頂峰) 꼭대기에 쇠스랑 모양의 움푹 파인 곳을 이른다. 이는 옛날 부처가 용과 싸울 적에 찍은 쇠스랑 자국이란 얘기가 전하는데, 마을에서는 이곳을 부처막이라고도 한다.  제8경 용추(龍湫)는 용소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절벽 아래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그리 깊지 않은 웅덩이가 있는데, 예전에는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풀어도 부족할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이 웅덩이가 생긴 것은 부처가 용과 힘겨루기를 할 때 용머리가 부딪쳐 파였다고 한다. 한편 부처가 아닌 장수가 용과 힘 겨루기하다가 생긴 흔적이라고도 설명한다. 현재 보물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빙계계곡 풍혈과 빙혈에 얽힌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

신라 무열왕의 둘째 요석공주가 젖먹이 아들 설총(薛聰)을 데리고 지아비 원효대사를 찾아 이곳 빙산원(氷山院 빙계계곡의 옛 이름)에 이르렀을 때는 유월염친 유두(流頭)가 막 지난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공주 일행이 서라벌을 떠나 보현산을 거쳐 조문국(召文國 지금의 의성군 금성면) 경내에 다다르자, 궁궐터와 임금이 쓰시던 우물인 어정(御井)이 있었다. 동네 어귀에서 원효대사의 거처를 물었더니 빙산사 빙혈속에 기도하는 이상한 스님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빙혈을 지나면 찬바람이 씽씽 불어나오는 풍혈이 있는데 얼마나 깊은지는 아는 사람이 없소. 그 끝이 저승까지 닿았다고도 하지요.” 공주는 좁은 굴속을 더듬더듬 기어 들어갔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몇 구비를 지나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른다. 점점 추워졌다. 공주는 전신이 꽁꽁 어는듯 하였다. 발이 미끄러지는 곳은 얼음판이었다. 얼마를 들어갔을까? 굴이 넓어졌다. 허리를 펴고 팔을 둘러도 거칠 것이 없다. 공주는 크게 소리쳐 불러 보았다. “아바아(여보)!” 굴속이 웅하고 울렸다. 울리는 소리가 마치 큰 쇠북 마지막 소리 모양으로 길게 꼬리를 끌다가 스러졌다. 중략..
-춘원 이광수 작, 원효대사(하) 중에서
춘원 이광수 선생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먼 옛날 이 계곡은 거대한 동굴이었다고 한다. 대지진으로 동굴이 무너지면시 풍혈, 빙혈 구멍이 지금같이 좁아졌으나 지하는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련지 신비하기만 하다. 2006. 12. 빙계계곡 역사 문학 연구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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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