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가 깨달음을 얻고 발걸음을 돌린 '당성'

원효가 깨달음을 얻고 발걸음을 돌린 '당성'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661년, 원효와 의상은 서라벌에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중 어느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그 날 잠결에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원효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진리를 깨닫고 발걸음을 돌렸다.

원효의 해골물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중국 3대 고승전의 하나인 '송고승전'에는 "원효가 바다의 관문 당주(唐州)지역에 도착해 큰 배를 구해 창파(滄波)를 건너려고 했다"고 기록됐다. 여기에서 말한 당주(唐州)는 당성(唐成)을 얘기한다. 원효가 배를 얻어 중국으로 유학을 가려던 이곳당성은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당성(唐成)이라 하면 성 자체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당성은 성은 물론이고 주변일대를 아우르는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현재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송산면, 마도면 일대를 말한다.

 

이 곳 당성은 처음 백제(百濟)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高句麗)의 영토로 당성군(唐城郡)이라 하였으나, 6세기 이 후 신라(新羅)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唐項城)이라 하고, 신라해군의 중요 기지였으며, 서해 바다를 건너 중국과 교통하는 출입구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기록에는 이 산성을 고당성(古唐城)이라 하여 당항성과 관련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신라 하대(下代)에는 당성진(唐城鎭)이 설치되고, 신라의 왕도(王都)에서 상주와 삼년산성(충북보은)을 거쳐 이곳에 이르는 길을 당은포로(唐恩浦路)라 하였다. 이 성에는 남문터와 북문터가 정상부 아래의 기슭에 있고, 동문터와 수구터는 계곡 쪽에 있다. 수구터의 안쪽에는 지금도 샘이 있어 물이 사철 나오고, 주변에 건물터가 있다.

 

이곳 당성의 정상부(망해루(望海樓)로 추정)에서 해안선을 유추해 보면 크고 작은 섬들이 잘 조망되는 위치며, 바다에서 접근하는 적들과 각종 교역선 들을 잘 볼 수 있지만 바다에서는 아마 이 곳을 보기도, 찾기도 어려운 위치인 것이다. 과거 물길이 있던 곳에는 시화방조제와 각종 매립사업으로 육지가 됐다. 당성은 과거 국제외교와 정치, 군사, 문화 창구였다. 서해안에 위치한 이 곳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 중국과의 근접성에도 유리해 해양 잠재력을 크게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항로는 세 경로가 있었다.

첫째는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요동반도 끝의 대련, 여순까지 간 후에 산동반도의 등주로 남하하는 항로다.

두 번째 항로는 서해안 항구에서 사선으로 남하해서 중국 강남지방으로 들어가는 항로,

세 번째 항로는 경기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출발해 서해를 직단 하는 항로다. 즉, 세 번째 항로인 이 곳 당성은 문화유입 및 교류의 창구로 큰 역할을 했다.

 

6세기 후반부터 신라는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흐름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에 원효와 의상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중국 유학길에 오르게 됐고, 중국으로 가기 위해 당성을 찾은 것이다.

 

현재 당성은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 구봉산에 위치해 있으며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벽은 둘레 363m, 외벽높이 4~5m, 성벽위는 2~3.5m의 회곽도가 조성됐다. 두 번째 성벽은 둘레 1.148m, 외벽높이 3~4.5m로 조성됐다. 당성이 축조된 곳의 해발 고도는165.7m로 그다지 높지 않다. 이 외에 시기를 알 수 없는 작은 외성들도 존재한다.

 

 

 

 

 

서벽에 연한 정상부에는 노목이 우거진 숲이 있고, 여기에 성황당(城隍堂)이 있다. 이밖에 망해루(望海樓)로 추정되고 있는 건물지에 초석들이 남아 있다. 한편 본성의 서남쪽에 이어진 외성은 성의 서남쪽의 제일 높은 곳에서 한층 낮아진 평탄 대지를 주머니 모양으로 둘러서 본성의 남문을 보호하는 옹성처럼 축조한 흔적을 찾을 수 있고, 둘레는 230m이다. 이 외성에서 다시 능선을 따라 낮아지는 곳에도 보다 작은 제2의 외성을 만들어 남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는 최소한 2개의 벽을 통과하여야 되도록 특수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제 2의 외성에서 계속 산줄기를 따라 이어진 성벽은 희미하긴 하지만 보다 남쪽의 안부(鞍部)를 지나 계속된다. 성벽은 석축된 벽체가 무너져 마치 토석 혼축처럼 보이지만 당초 토축의 석축으로 개축되면서 쌓아 올린 석축의 일부가 남벽쪽에서 약간 남아 있고, 문터의 좌우와 성벽의 회절처(回折處)마다 곡성(曲城)을 만들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아직도 유물은 발굴중에 있으며, 당성 인근은 현재에도 세계로 나가는 물길임을 보여주고 있다. 천혜의 입지 조건인 당성(전곡항)에서는 올해 6월 5일부터~9일까지 5일간 '2019년 화성뱃놀이 축제'가 열리고 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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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