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장손, 임해군의 아들이 일본 일련종의 큰스님이 된 이야기

몇 년 전(2002년 10월 25일) 김제 금산사에서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1403년 개산대제가 열렸다. 이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행사가 있었다.

선조의 장손, 임해군의 아들이 일본 일련종의 큰스님이 된 이야기

후꾸오까 묘안사 본당에 모셔진 일연스님 목상이다.

임해군의 누나가 직접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몇 년 전(2002년 10월 25일) 김제 금산사에서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1403년 개산대제가 열렸다. 이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행사가 있었다.

일본 후꾸오까의 묘안사를 창건한 일연스님의 두상을 금산사에서 몸체를 조성하여 다시 합체시켜 점안식을 올린 것이다. 머리뿐인 두상을 한국으로 모셔 와서 몸체를 조성하고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한달간 봉안했다가 후꾸오까 묘안사에 봉안하였다.

일련종 묘안사 주지 가도다 쇼에이 스님은 일본으로 가는 길에 전주 경기전 이성계 어진에 참배하고 종묘를 찿아 예배하였다. 그는 다시 구리시에 있는 선조왕릉과 임해군의 묘를 찿아 예를 갗추어 참배하였다.

일본 후쿠오까의 묘안사를 창건한 일연스님이 어떤분 이길래 비록 목상이지만 조선왕들에게 지극한 예배를 올리고 돌아갔을까?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한양이 왜군의 손에 넘어 가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길에 오른다.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은 순화군과 함께 근왕병을 모집해서 왜군과 싸우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함경도로 떠난다. 그러나 회령에서 국경인등의 모반자에게 체포되어 적장 가등청정의 포로가 된다.
1594년 4월에 부산에 도착한다. 그사이 명나라와 일본간에 강화가 이루어져 임해군과 순화군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임해군의 4살된 아들과 6살된 딸은 인질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일본군 선봉장 소서행장이 독실한 천주교인인 반면 적장 가등청정은 열열한 일련종 신자였다.한국에 남묘호렌게쿄로 알려진 법화경을 신앙하는 불교종단이다. 선조의 장손인 임해군의 아들은 기구한 운명으로 적국의 인질로 어린 나이에 끌려갔다가 13살에 일련종 승려로 출가하게 된다.

후꾸오카에 있는 묘안사 전경이다.

그는 출가한 이후로 불법을 깊이 탐구하여 큰 지혜와 덕망을 갖춘 큰스님이 된다. 일련종의 개산조인 일련대사의 탄생지에 세워진 탄생사의 제 18대 주지를 역임하면서 일련종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종단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는 만년에 조국땅이 멀리 보이는 후꾸오까 언덕에 묘안사를 창건하고 1665년 1월 26일 77세로 열반에 들었다. 묘안사 법당에 모셔진 일연스님의 목상은 그의 생전에 누나가 직접 나무로 조각했다고 전해진다.

임해군의 아들은 일본의 큰스님이 되고 딸은 불상을 조성하는 불모가 되었단 말인가?

너무나 기구한 운명이 아닐수 없다. 불교를 박해하고 승려를 천시하며 성리학을 받들 조선의 왕이 적국에서 평생을 승려의 신분으로 살아간 것이다.
특히 임해군이 진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조국행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더욱 불도에 정진했을 것이다.

후꾸오까 묘안사가 큰 화재에 휩싸이면서 불길에 목상을 꺼내올수 없어서 두상만 분리해서 구할수 있었다. 원광대 양은용교수가 다리를 놓아 금산사에서 몸체를 만들고 전주이씨 종친회원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조국의 나무로 몸체가 만들어졌다.

“일연스님은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으면서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삶을 보여준 인물 이다.ᆢ 원광대 양은용교수”

일연스님은 온갖 절망과 좌절을 딛고 당당히 자신의 삶을 개척했던 위대한 고승으로 일본과 한국의 묵은 원한을 풀고 참다운 화해의 길을 열어 보인분이다.


일연스님의 친필 파랑새 만다라로 불린다. 일련종의 본존 나무묘법연화경(남묘호렌게쿄)만다라이다.


일연(日延) 스님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양은용 교수가 일본에서 찾아낸 자료에 의하면 일연(日延)스님은 선조의장남인 임해군(1574~1609)의 아들 태웅(太雄,1589~1665). 임진왜란(1592~1598)중인 1593년 함경도로 피난하던 도중 회령에서 일본군에 잡혀 인질로 끌려갔으며 그 후 명과 왜군 사이에 강화가 이루어지면서 임해군은 풀려나지만 임해군의 장녀(6세)와 장남(4세)은 일본에 볼모로 잡혀 풀려나지 못했다.
13세(1601년)에 법성사(法性寺)에서출가했으며 법명은 대응(大應).
16세부터 3년간 교토(京都) 본국사(本國寺)에서 공부했고, 다시 지바(千葉)현 반고사(飯高寺)에서석 · 박사 과정에 해당하는 공부를 했으며 마침내 지바현 탄생사(誕生寺)에서 법화종의 종정에 해당하는 제 18세 법주(法主)가 되었으며, 일본 법화종(法華宗)의 대표적 고승으로 손꼽히는 일연(日延)스님이 태웅이란 기록과 함께 '큰 스님'이란 의미의 '상인'을 붙여 일본의 기록에는 일연상인(日延上人)이라고부르고 있다. 72세 때 고국 조선이 보이는 장소를 물색하다 후쿠오카(福岡)의 물가 언덕에 묘안사(妙安寺)를 창건하고 5년간 거처하다 1665년 1월 26일 세수 77세로 입적하였다. 일연스님은 스님의 친누나가 제작한 존안상으로 409년만에 일본서 귀환하게 되었으며, 존안상의 훼손된 부분을 고국의 나무로 만들어 전신을 갖추는 봉합식이 금산사 1403주년 개산 대재일에 대적광전에서 성대히 이루어졌다.

일연 스님 행장 _[자료 출처: 법보신문]
1589-1세: 조선왕실에서 임해군 아들로 출생
1592-4세: 4월. 임진왜란 발발, 함경도로 떠남.
1592-4세: 9월. 회령에서 붙잡혀 가또에게 넘겨져 일본으로 이송.
1593-5세: 7월. 부친 임해군 귀환.
1601-13세: 후쿠오카 법성사에서출가.
1604-16세: 교토 본국사 구법단림 수학.
1607-19세: 치바 반고단림에서 수학[가관원, 일연상인 호를 받음]
1608-20세: 광해군 지지세력 주청으로 부친 임해군 진도로 유배.
1609-21세: 임해군 살해당함.
1614-26세: 치바 탄생사 18세 계승, 조사당 건립. 후쿠오카 용잠사 건립.
1630-42세: 신지대론에불참.
1631-43세: 동경 각림사·원진사 건립. 신지대론 문제로 추방된 후 후쿠오카로 귀환.
1632-44세: 번주 쿠로다 귀의로 법성사 창건.
1660-72세: 쿠로다의후원으로 묘안사 창건.
1665-77세: 1월 26일. 묘안사(妙安寺)에서입적.

일련스님 존안상 봉합식과 묘안사(妙安寺) 주지(가도다 쇼에이)스님과 함께 ↑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