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군산 동국사, 일제강점기 군산 수탈史를 한눈에

다시 찾은 동국사, 일제강점기 군산 수탈史를 한눈에

 

군산역사관 개관, 동국사 후문에 있어

 

 

 

일제강점기 전북 군산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을 개관을 앞두고 지난 31일 다녀왔다. 역사관은 군산시 금광동 동국사(東國寺) 후문에 지상 3층, 전체 건물 면적 1868㎡ 규모로 예산 25억원을 들여 1·2층은 주차장, 3층은 전시실·세미나실 등 유물 전시관으로 꾸몄다. 올해 5월부터 공개 모집을 통해 선정된 대한역사연구소가 위탁·운영한다.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군산개항사, 군산미계요람(群山米界要覽) 등의 자료를 비롯해 지도·엽서·사진 등 각종 유물 6000여 점이 있다. 이 중 300여 점의 유물이 오는 10월 31일까지 '수탈의 기억 군산'이라는 주제로 전시된다. 개관 시간은 매주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관람료는 성인 1000원, 어린이는 500원이다. 6월 한 달간은 개관을 기념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고 한다.군산시는 도시재생 선도 사업의 하나로 역사관을 지었다. 국내에서 몇 곳 남지 않은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에 소장된 유물을 전시해 관광객을 모으고, 주차장을 확보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계획이다. 군산시 관계자는 "동국사 일대는 주말이면 5000여 명이 방문하는 주요 관광지면서도 인근에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적어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며 "역사관이 개관하면서 관광객 주차 문제가 해결되고 근대문화도시 관광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찾은 동국사는 우리나라에 남겨진 유일한 일본식 사찰로, 2015년 11월27일 탐방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있다면 후문쪽으로 소녀상이 서있고 소녀상 뒤로 일본조동종에서 익산 황등석으로 가로 3m, 높이 2.3m 크기로 세워진 참회비 비문에 “외국 포교를 핑계로 일제가 자행한 야욕에 수많은 아시아인이 인권 침해, 문화 멸시를 당했다”며 “이는 불교적 교의에 어긋나는 행위다. 석가세존과 역대 조사(祖師)의 이름으로 행했던 일은 참으로 부끄러운 행위다. 진심으로 사죄하며 참회한다”는 내용으로 일본어 원문과 한글 번역문이 함께 새겨져 있다.

 

 

 

화려한 단청이 있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아무런 장식이 없는 처마와 대웅전 외벽에 많은 창문이 일본색을 보여주고 있으며, 대웅전(大雄殿)은 지붕의 경사가 급하고 용마루가 일직선이어서 한국사찰의 곡선과 같은 아름다움을 볼 수 없으며, 화려한 단청도 없다. 추위에 견디기 위해 두꺼운 벽이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사찰에 반해, 동국사(東國寺)의 건물은 습기제거를 위해 넓은 창으로 만들어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일본 목조건축 양식의 건축물로서, 일본식 불교사찰이 처음 세워지던 당시와 같이 조동종, 일련종 사찰에서 현재는 조계종 사찰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전북 군산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흔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지역으로, 특히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수탈의 첨병 역활을 하던 곳여서, 일제 강점기와 관련한 유적들이 많은데 이곳 "동국사(東國寺)" 역시 그 일환으로 세워진 사찰이다. 동국사 입구에는 대리석 대문기둥이 서 있는데, 기둥 양편에는 소화 9년(1934)이라는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누군가 일본 천황의 소화 글씨를 파내어 글씨를 지우려고 한 흔적이 남아 있는걸 보니 아마도 해방 후의 일이 아닐까하는 추측이다. 소녀상 옆에는 1919년에 세운 종각이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일본식 종각으로, 종 역시 전형적인 일본식 종인데 일본교토에서 만들어 가져 왔다고 한다. 종의 명문에 따르면 다이쇼 8년(1919)에 제작 했으며 "금강선사"라고 명문 되어 있고, 크기를 떠나서 종이 높이 달려 있어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종의 울림통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종은 높게 매달려 있지만 종 밑에는 항아리가 묻혀있어 아마도 종소리를 내는데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종각 아래에는 많은 석상들이 세워져 있다. 종각으로 들어가는 맨 앞에는, 아이를 안은 자안관세음수본존불상(子安 觀世音 守本尊 佛像)이 있으며, 뒤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중생교화를 위해 근기에 따라 나타난다는, 서른두 가지 모습을 형상화한 삼십이 응신상(應身像)들이 있어, 석불들 역시 일본에서 가져온 것으로 밀교(密敎 )에 기반한 일본불교의 양식이며, 종각 주변의 41기의 불보살(佛菩薩)은, 작은 화강암에 연꽃 위에 서있는 모습을 부조로 조각 하였는데, 관세음보살 삼십이 응신상(觀世音菩薩 三十二應身像) 33기와 띠별 십이지 수본존상(十二支 守本尊像) 8기로, 모두 창건 당시 일본에서 조성되어 건너왔다. 국가등록문화재 제64호인 군산 동국사 대웅전(群山東國寺大雄殿)은 근대기에 건립된 일본불교 사찰 건축물로, 정면 5칸 측면 5칸의 정방형 홑처마 단층팔작지붕 형식의 에도시대(江戶時代) 양식으로서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보이고있다. 

 

동국사의 본래 이름은 조동종의 금강선사(금강사(錦江寺)로 1909년 일본인 승려인 우찌다가 군산에 포교소를 개설하면서 창건한 사찰이었다. 일주문 오른쪽에 보면 錦江寺라고 음각이 되어있다. 조동종은 1945년 일제 패망 당시 한국에 160여 개의 사원과 포교소를 운영한 거대 종단이었다.

 

금강사는(현,東國寺) 1909년 일본 승려 우치다(內田佛觀)에 의해 창건되어 일제 강점기 36년동안 일본인 승려들에 의해 운영 되다가, 해방을 맞아 한국의 품으로 돌아온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해방 이후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동국사가 되었다. 동국사(東國寺)란 이름은 해동(海東)과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음을 따 온 것이라 한다.

 

일본불교는 1877년 부산의 개항과 함께 일본정부의 요청에 의해 들어오기 시작하여,

가장 먼저 정토진종 대곡파가 포교를 개시하였고 1904년 군산에도 포교소를 개설하였고 그 뒤를 이어 일연종이 뒤를 이었다. 일본 불교가 우리나라에 진출한 까닭은,

순수한 불교포교가 목적이 아니라 한국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일본정부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 불교를 포교하고자 1911년 6월 3일자로 사찰령을 발령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불교는 전국에 별원, 출장소, 포교소 등을 건립 하였으며, 이 곳 금강선사가 창건되기 전 군산에는 본원사, 군산사, 안국사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금강사를 창건한 일본 승려 우치다(內田佛觀)는 1909년 당시 77세의 고령으로 군산 지역을 순석하다가, 군산 일조통에 있던 집을 빌려 포교소를 개설 하였다가 1913년 7월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금의 동국사를 신축 하였다. 금강사(현,東國寺)의 건축은 일본에서 나무를 비롯한 모든 건축자재를 들여와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해방된 이후, 조계종에서 동국사(東國寺)를 인수할 당시, 군산에 살던 일본인들의 조상의 뼈를 모신 납골당이 경내에 있었다고 하며, 그런데 이를 철거하면서 그곳에 있던 수많은 일본인들의 유골을 인근 강에다가 산골(散骨)해 버렸는데, 이후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과거에 군산에 살던 일본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울면서 찾아와 절 마당의 흙을 유골가루 대신 퍼간 실화가 있다.

 

기자가 몇년전 처음 동국사를 찾았을 때는 대웅전안을 입구서부터 ㄷ자로 뺑 둘러가며 일목요연하게 일련종의 종교행사, 당시의 군산의 사회상, 등의 각종 자료들이 신문, 사진, 책, 각종 도구 등으로 유리 진열장안에 전시가 되어 있었고 불상 뒤로는 가득한 일본군인들의 위패와 나무로 만들어진 만다라(판본전)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이 곳 동국사 주지 종결스님의 말로는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편집부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