折伏(절복)에 있어서의 마음가짐

折伏(절복)에 있어서의 마음가짐

순 서
1. 御本尊(어본존)에 대한 確信(확신)
2. 겁쟁이로서는 할 수 없다.
3. 折伏(절복)은 罰論(벌론)이 表面(표면)이 된다.
4. 相對(상대)에게 慈悲心(자비심)을 갖자.
5. 標的(표적)을 맞힌 效果的(효과적)인 折伏(절복)을
6. 모두를 救(구)하는 氣槪(기개)를 가지라.


1. 御本尊(어본존)에 대한 確信(확신)


첫째로 折伏(절복)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大御本尊(어본존)에 대한 確信(확신)입니다. 自己自身(자기자신)이 [이것은 이상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남에게 勸(권)할 수 없습니다. 自己自身(자기자신)이 確信(확신)을 가짐으로써 남에게도 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御本尊(어본존)에 대한 확신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阿佛房尼夫人答書(아부쓰보니부인답서)]에 [法華經(법화경)의 意(의)는 一切衆生(일체중생) 皆成佛道(개성불도)의 經(경) 이니라. 그렇기는 해도 믿는 자는 成佛(성불)을 이루고 誹謗(비방)하는 자는 無間大城(무간대성)에 떨어지도다]<新,905/ 全,1307>라는 一節(일절)이 있습니다.
法華經(법화경)이란 末法(말법)을 위한 文底下種(문저하종)의 法華經(법화경) 즉 日蓮大聖人(니치렌대성인)님이 나타내신 御本尊(어본존)을 말합니다. 이 글의 의미는 이 御本尊(어본존)은 모든 사람이 成佛(성불)의 境涯(경애)를 얻어가기 위한 法(법)이므로 그러나 御本尊(어본존)을 믿는 자는 幸福(행복)해지지만 御本尊(어본존)을 背反(배반)하는 자는 無間地獄(무간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御本尊(어본존)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은, 믿는 자는 成佛(성불)을 이루고 幸福(행복)하게 되고 背反(배반)하는 자는 모두가 다 不幸(불행)하게 되어 無間地獄(무간지옥)에 떨어진다라는 것을 마음 속으로부터 믿는 것이 가장 基本(기본)인 確信(확신)입니다.
御金言(어금언) 중에 [곳간의 財(재). 몸의 財(재). 마음의 財(재)]라는 것이 있습니다. [곳간의 財(재)]라는 것은 경제적인 만족, [몸의 財(재)]라는 것은 몸의 건강, [마음의 財(재)]라는 것은 정신적인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御本尊(어본존)을 信仰(신앙)하여 가면 그 모든 것에 幸福(행복)을 얻을 수 있으나 御本尊(어본존)을 信仰(신앙)하지 않는 世間(세간)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세가지가 갖추어진 좋은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든다면 큰 집에서 살며, 큰 사업을 하고 있어도 한 발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무거운 業病(업병)을 안고 있거나 家庭不和(가정불화) 이거나 여러 가지의 苦惱(고뇌)나 苦痛(고통)이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幸福(행복)하게 보여도 잘 살펴 보면 이 佛法(불법)에 배반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 한 사람 진짜로 幸福(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御本尊(어본존)을 信仰(신앙)하지 않기 때문의 佛罰(불벌)인 것입니다. 더욱이 그대로 信仰(신앙)하지 않고 있으면 혹은 알면서 배반한다면 더욱더 罪(죄)가 깊어지므로 반드시 人生(인생)에 있어서 不幸(불행)이 다해지며 마지막에는 반드시 無間地獄(무간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와 같이 믿는 자는 幸福(행복)하게 되어도 배반하는 자는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不幸(불행)하게 된다라는 것을 정말로 마음으로부터 통감하고 있는 것, 이것이 御本尊(어본존)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신은 어느 때는 생각하지만 어느 때는 생각치 못하고, 어느 때는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면 느끼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 凡夫(범부)의 일상입니다.
그러면 항상 御本尊(어본존)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항상 御本尊(어본존)을 中心(중심)으로, 根本(근본)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체적으로는 御本尊(어본존)을 향하여 착실히 唱題(창제)하는 속에서 自己(자기)나 同志(동지)의 사람들이 이제까지 御本尊(어본존)으로부터 얻은 功德(공덕)의 체험을 想起(상기)한다. 또 御本尊(어본존)을 배반했을 때의 佛罰(불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自己(자기)나 自己(자기)가 折伏(절복)한 주위의 사람들이 이 佛法(불법)에 배반하여 佛罰(불벌)을 입은 사례를 확실히 상기한다.
그와 같이 매일의 勤行(근행) 때에 御本尊(어본존)의 功德(공덕)과 罰(벌)의 실증을 확실하게 自己(자기) 속에 상기하면서 열심히 唱題(창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御本尊(어본존)의 功德(공덕)의 고마움을 생각하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올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御本尊(어본존)에 배반한 佛罰(벌)의 엄함을 생각했을 때는 그 무서움에 등줄기가 차가워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실감이 있음으로써 정말로 御本尊(어본존)의 功德(공덕)과 罰(벌)을 확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折伏(절복)에 임할 때에는 御本尊(어본존)의 功德(공덕)과 罰(벌)에 대한 실감이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올 때까지 唱題(창제)를 하여 그 확신을 가지고 折伏(절복)에 부딪쳐 주십시오. 그렇게 하여 御本尊(어본존)의 힘을 확신하여 상대에게 대화하는 속에 이야기가 상대의 마음속까지 울려 가는 것입니다.


2. 겁쟁이로서는 할 수 없다.


둘째로 大聖人(대성인)님은 [敎行證御書(교행증어서)]에 [日蓮(니치렌)의 弟子(제자)들은 겁쟁이로서는 할 수 없느니라] <新,1109/全,1282>라고 하셨습니다. 大聖人(대성인)의 弟子檀那(제자단나)인 자는 겁쟁이인 信心(신심)의 자세로는 결코 大聖人(대성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엄하게 꾸짖으시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折伏(절복)할때 반대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싫어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뒤에 구박 당하게 되면 어찌할 것인가 등을 생각하고 있으면 상대를 折伏(절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잘 생각해야 할 것은 折伏(절복)을 하여 상대로부터 반대 당하면, 싫어하면, 구박 당하면 오히려 轉重輕受(전중경수) 로 되어 幸福(행복)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轉重輕受(전중경수)라는 것은 過去(과거)로부터 自己(자기)의 生命(생명)에 새겨 왔던 무거운 不幸(불행)의 原因(원인)을 折伏(절복)함에 있어서 가볍게 받아 消滅(소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볍게 받느냐 하면 折伏(절복)을 하여 상대로부터 미움 받고, 욕을 먹고, 구박 받는 이러한 것이 실은 自身(자신)의 生命(생명) 속에 새겨진 무거운 不幸(불행)의 宿業(숙업)이 한 때 가볍게 나와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에 의해서 自身(자신)의 不幸(불행)의 原因(원인)이 하나씩 하나씩 消滅(소멸)되어, 不幸(불행)의 原因(원인)이 消滅(소멸)되면 반드시 幸福(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찌할 수 없이 무거운 苦惱(고뇌)나 苦痛(고통)을 껴안고 있던 사람이 折伏(절복)을 하여 구박을 당함으로써 그 뒤까지 보면 重病(중병)이 낫는다거나, 經濟苦(경제고)가 해결되었다거나, 모두 잘되었다. 그것은 大聖人(대성인)님의 御金言(어금언)이 事實(사실)이라고 하는 證明(증명)입니다. 그러므로 折伏(절복)을 하여 상대가 순수하게 入信(입신)했다는 것은 상대를 위해서는 기쁜 일이지만, 어느 의미에서는 自己自身(자기자신)의 큰 轉重輕受(전중경수)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折伏(절복)을 하여 상대가 순수하게 入信(입신)하였으므로 [잘 됐다. 만세] 상대가 화를 내고 돌아갔으므로 [기가 꺽인다] 이것으로는 逆(역)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알았다면 구태여 折伏(절복)을 하여 싫어하면 어찌할까, 반대 당하면 어찌할까 등의 걱정은 전혀 필요 없는 것입니다.


3. 折伏(절복)은 罰論(벌론)이 表面(표면)이 된다.


셋째로 末法(말법)에 있어서의 折伏(절복)은 罰論(벌론)이 表面(표면)이 된다는 것입니다. 折伏(절복)이라는 것은 文字(문자) 대로 눌러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末法(말법)은 邪宗(사종) 謗法(방법)이 충만한 時代(시대)이므로 이 時代(시대)에는 佛法(불법)을 弘通(홍통)하려면 반드시 주위의 謗法(방법)의 사람들을 눌러 복종하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오늘날에 있어서의 布敎方式(포교방식)인 것입니다.
折伏(절복)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邪宗(사종) 謗法(방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의 이야기는 즉 罰論(벌론)이며 利益論 (이익론)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末法(말법)에 있어서 折伏(절복)은 罰論(벌론)이 表面(표면)이고, 利益(이익)의 이야기 利益論 (이익론)은 오히려 裏面(이면)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大聖人(대성인)님의 [立正安國論(입정안국론)]은 大聖人(대성인)님이 그 時代(시대)의 國主(국주)를 折伏(절복)하신 折伏書 (절복서)입니다. 그 內容(내용)을 공부하여 보면 열중 아홉은 罰論(벌론)입니다. 立正安國論(입정안국론)에 있어서는 왜 邪宗(사종)이 틀려 있는지, 그것이 얼마만큼 무서운 것인지, 邪宗(사종)의 信仰(신앙)에 의해 개인은 無間地獄(무간지옥)에 떨어지고 國土(국토)에는 여러 가지의 災難(재난)이 일어나 滅(멸)해 간다는 것을 철저하게 說(설)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佛法(불법)을 信仰(신앙)했을 때의 功德(공덕), 利益(이익)이 얼마만큼 큰 것인가를 마지막에 약간 說(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折伏(절복)이라 하는 것도 自己(자기)가 생각하여 行(행)하는 것이 아니고, 大聖人(대성인)님이 하신 折伏(절복)에 준하여 역시 罰論(벌론)은 表面(표면)에, 利益論(이익론)은 裏面(이면)으로라는 折伏(절복)이 아니면 안됩니다. 물론 최초는 罰論(벌론)으로, 최후에는 利益論(이익론) 등이라고 하는 순서의 문제도 아니고 단순히 罰論(벌론)이 아홉에 利益論(이익론)이 하나라고 하는 量的(양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요컨대 折伏(절복)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눌러 복종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相對(상대)에게 邪宗(사종) 謗法(방법)의 무서움을 說(설)하여 듣게 하는 것이 折伏(절복)입니다. 이러한 折伏(절복)을 하면 [曾谷殿答書(소야전답서)]에 [忠言(충언)은 귀에 거슬림]<新,1040/全,1056> 이라는 道理(도리)로 이쪽은 상대를 생각해서 사실을 말하지만 반드시 상대는 화를 내고 반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에 의해 우리들은 轉重輕受(전중경수)되어 罪障消滅(죄장소멸)하게 됨으로 기죽지 말고 끝까지 末法(말법)의 折伏(절복)은 罰論(벌론)이 表面(표면)이라고 銘心(명심)하고 折伏(절복)해야 합니다. 만약 罰論(벌론)을 말하지 않으면<상대의 謗法(방법)을 破折 (파절)하지 않으면> 상대는 화를 내지 않겠지요. 화는 내지 않지만 邪宗(사종)의 무서움을 정말로 알리지 않은 채 入信(입신) 시킨다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邪宗(사종) 謗法(방법)을 버리지 못한 채 御本尊(어본존)을 信仰(신앙)한다. 결국 그것은 大聖人(대성인)님이 [上野殿答書(우에노전답서)]에 [南無妙法蓮華經(남묘호렌게쿄)라고 함은 法華經(법화경) 中(중)의 肝心(간심), 사람속의 魂(혼)과 같으니라. 이에 다른 것을 나란히 한다면 (중략) 禍(화)의 根源(근원)이로다]<新,1219 /全,1546>라는 말씀과 같이 藥(약)과 毒(독)을 동시에 복용하는 것으로 되어 災禍(재화)의 根源(근원) 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상대의 邪宗(사종) 謗法(방법)을 破折(파절)하고 그 다음에 이 御本尊(어본존)의 信仰(신앙)을 갖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분별하여 折伏(절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4. 相對(상대)에게 慈悲心(자비심)을 갖자.


넷째로 折伏(절복)에 있어서는 상대에 대한 慈悲心(자비심)이 중요합니다. 大聖人(대성인)님이 [種種擧動御書(종종거동어서)] 에 [日本國(일본국)의 一切衆生(일체중생)이 法華經(법화경)을 誹謗(비방)하여 無間大城(무간대성)에 떨어져야 할 것을 救濟 (구제)하기 위하여 말하는 法門(법문)이니라]<新,1059/全,913>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상대가 法華經(법화경)에 배반하여 無間地獄(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救濟(구제)하려고 하는 것이 折伏(절복)입니다.
그러므로 그 行爲(행위)의 奧底(오저)에는 상대를 참으로 생각하는 慈悲心(자비심)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慈悲心 (자비심)이란 어떠한 것인가. [上野님消息(우에노님소식)]에 [나보다 못한 사람을 나의 자식과 같이 생각하여 一切(일체) 불쌍히 여겨 慈悲(자비)로와라]<新,922/全,1527>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慈悲(자비)라는 것은 뛰어난 자가 自己(자기)보다 못한 자에 대하여 처음으로 일어날 수 있는 心地(심지)입니다. 그것은 蔑視(멸시)하거나 얕보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 御本尊(어본존)의 信仰(신앙)으로 절대로 幸福(행복)하게 된다] 또 [이제까지 幸福(행복)하게 살아왔다] 반대로 [이 信心(신심)을 하지 않는 자는 모두 不幸(불행)하다. 결국은 地獄(지옥)에 떨어질것이다]라는 것을 마음 속에 확신하고 있으면 스스로 謗法(방법)의 상대에 대하여 慈悲(자비)를 갖게 될 것입니다.
상대에 대하여 무언가 돕고 싶다, 무언가 알게 하고 싶다라는 기분이 일어난다. 그것이 慈悲心(자비심)인 것입니다. 그러한 慈悲(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折伏(절복)에 임할 때에는 가령 강한 말일지라도, 부드러운 말일지라도 상대의 마음에 통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그때까지 좀처럼 信心(신심)하지 않던 사람이 信心(신심)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고 오로지 강한 말로 상대를 破折(파절)하면 쓸데없이 상대의 반발을 초래하고, 信仰(신앙)할 수 있는 사람도 하지 않을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도 많이 入信(입신)시킨다는 점에서 생각한다면 折伏(절복)에 있어서는 慈悲心(자비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慈悲心(자비심)은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애써도 허세를 부려도 慈悲(자비)는 나오지 않습니다.
慈悲(자비)의 마음은 먼저 自己自身(자기자신)이 御本尊(어본존)의 절대의 힘에 대한 확신을 培養(배양)하는 곳에 스스로 갖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쨌든 折伏(절복)을 行(행)하여 가는 것, 그 속에서 慈悲心(자비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人生(인생)을 걸어왔고, 갖고 있는 業(업)도 다릅니다. 만약 지금까지 호랑이 같은 성격으로 살아 온 사람이 갑자기 상대를 생각하여 慈悲(자비)로 折伏(절복)하려 하여도 좀처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折伏(절복)을 行(행)하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開目抄(개목초).下(하)]에 [慈(자) 없이 거짓으로 親(친)함은 이는 그의 怨敵(원적)이니라. (중략) 그를 위해 惡(악)을 除(제)함은 즉 이는 그의 어버이니라] <新,577/全,236> 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를 위해 不幸(불행)의 原因(원인)을 除去(제거)하여 주는 것이야말로 상대에 있어서 어버이에 해당하는 行爲(행위)이며, 慈悲(자비)의 行爲(행위)인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상대에 대하여 折伏(절복)을 한다. 그 行爲(행위) 자체가 상대의 惡(악)을 없애는 慈悲(자비)의 行爲(행위)입니다. 그러므로 自己(자기)가 마음으로부터 상대에 대한 慈悲(자비)의 마음을 갖지 않아도 自己(자기)의 몸이, 입이 慈悲(자비)의 行爲(행위)를 行(행)하면은 그 功德(공덕)에 의해 마지막에는 自己(자기)의 마음도 慈悲(자비)에 물들어 慈悲心(자비심)을 갖게 되어 갑니다. 우리들이 折伏(절복)하고, 折伏(절복)하여도 상대가 결정하지 않는 것은 慈悲心(자비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그 중에서 스스로 御本尊(어본존)에의 확신을 培養(배양)하면서 아직 慈悲(자비)를 갖지 못하여도 상관없으니 수많은 折伏(절복)을 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히 갖게 되므로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5. 標的(표적)을 맞힌 效果的(효과적)인 折伏(절복)을


다섯째로 표적을 맞힌 효과적인 折伏(절복)을 한다 라는 것입니다. 大聖人님은 [太田左衛門尉答書(오타사에몬노죠답서)] 에 [나의 法門(법문)은 四悉檀(사실단)을 마음에 두고 말한다면 굳이 成佛(성불)의 道理(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잠시 世間(세간)의 보통의 義(의)를 쓸 것이니라]<新,1222/全,1015>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많이 구하기 위해서는 四悉檀(사실단)이라는 네 가지 方法(방법)을 成佛(성불)의 가르침에 反(반)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구사해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 네 가지의 方法(방법)이란 [世界悉檀(세계실단). 爲人悉檀 (위인실단). 對治悉檀(대치실단). 第一義悉檀(제일의실단)]이라는 네 가지입니다.
世界悉檀(세계실단)이란 世上(세상)이 어떤 風潮(풍조)인가, 어떤 世上(세상)인지, 世上(세상)에서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잘 보고 잘 分別(분별)하여 折伏(절복)하는 것입니다.
爲人悉檀(위인실단)이란 相對(상대)가 무엇을 원하고 있고, 어떤 思考方式(사고방식)의 사람인지 잘 살피어 그에 맞는 折伏(절복)을 하는 것입니다.
對治悉檀(대치실단)이란 相對(상대)의 생각의 잘못을 對治(대치)하여 확실하게 破折(파절)해가는 것입니다.
第一義悉檀(제일의실단)이란 眞實(진실)의 가르침을 그대로 說(설)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具體例(구체예) 중에 適用(적용)시키면 世界悉檀(세계실단)이라는 것은 가령 世間(세간)에서 大不況(대불황)이 계속되고 있고 이 일에 불안을 가진 사람이 世上(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왜 이러한 大不況(대불황)이 일어났는지 가르쳐 주면서 차차로 佛法(불법)을 說(설)해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爲人悉檀(위인실단)이라는 것은 가령 相對(상대)가 病者(병자)라고 합시다. 病(병)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病(병)은 왜 일어났는가, 그 病(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하는 것을 體驗(체험) 등을 포함하여 이야기해주면 상대는 이야기를 잘 듣습니다. 혹은 人間(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든가, 過去世(과거세)나 死後(사후)의 일에 흥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에 佛法(불법)의 이야기를 해주면 상대는 自己(자기)의 興味(흥미)있는 이야기, 듣고 싶던 이야기부터 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알기 쉽고, 이것이 爲人悉檀(위인실단)이라는 것입니다.
對治悉檀(대치실단)이라는 것은 상대가 邪宗(사종)을 열심히 信仰(신앙)하고 있는 사람이면 그 邪義(사의)를 확실하게 破折(파절)해가는 것, 이것이 對治悉檀(대치실단)입니다.
第一義悉檀(제일의실단)이라는 것은 상대가 무엇을 願(원)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무언가 邪宗(사종)에 執着(집착)하고있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折伏(절복) 대상자가 입을 다물고 말 한마디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벽을 보고 佛法(불법)의 일을 가르치는 셈치고 大聖人(대성인)의 佛法(불법)이 眞實(진실)하다는 것 등을 이야기해줄 수밖에 없겠지요. 이것이 第一義悉檀(제일의실단)입니다.
大聖人(대성인)님은 이러한 네 가지의 方法(방법)을 臨機應變(임기응변)으로 쓰며 折伏(절복)하라고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成佛(성불)의 道理(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하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邪宗(사종)을 信仰(신앙)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邪宗(사종)을 破折(파절)하지 않고 宇宙(우주)의 이야기부터 들어가 入信(입신)을 결의시켜 그대로 御授戒(어수계)를 받게 하는 것은 成佛(성불)의 道理(도리)에 어긋납니다. 또 基督敎(기독교)를 믿는 사람에게 그것은<基督敎(기독교)의 信仰(신앙)> 그대로 좋지만, 이쪽<日蓮正宗(일련정종)>은 더욱 좋다는 등 이라고 이야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요컨대 成佛(성불)의 道理(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네 가지의 方法(방법)을 臨機應變(임기응변)으로 驅使(구사)하여 折伏(절복)하시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할 수 있게 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을 佛法(불법)에 入信(입신)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自己(자기) 혼자서 하려 해도 無理(무리)이므로 옛부터 折伏(절복)을 해왔던 선배와 함께 折伏(절복)하는 가운데 배워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6. 모두를 救(구)하는 氣槪(기개)를 가지라.


여섯째로 順逆(순역) 함께 모두를 救(구)한다는 氣槪(기개)를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大聖人(대성인)님은 [法華初心成佛抄 (법화초심성불초)]에 [當世(당세)의 사람은 이렇다 할 일이 없어도 法華經(법화경)에 배반하는 罪過(죄과)에 의해서 地獄(지옥)에 떨어짐은 의심할 바 없는 고로 어떻게 하든 法華經(법화경)을 굳이 說(설)해 듣게 할지어다. 믿는 사람은 부처가 될 것이며, 誹謗(비방)하는 자는 毒鼓(독고)의 緣(연)으로 되어 부처가 되는 것이니라]<新,1316/全,552>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지금 末法(말법)의 사람들은 특히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있어도 이 御本尊(어본존)을 信仰(신앙)하지 않는 것이 人生(인생)의 根本法(근본법)에 背反(배반)하고 있는 것이므로 반드시 無間地獄(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世間的(세간적)을 훌륭한 사람이라든가 근사한 사람으로 보여도 이 御本尊(어본존)의 信仰(신앙)을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地獄(지옥)에 떨어져 不幸(불행)을 免(면)치 못합니다. 따라서 어쨌든 너나없이 억지로 이 佛法(불법)의 이야기를 說(설)하여 듣게 하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說(설)하여 듣게 하면 순수하게 믿고 入信(입신)하는 사람과 反對(반대)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도 毒鼓(독고)의 緣(연)이라 하여 折伏(절복)을 받음으로써 귀에 佛法(불법)의 이야기가 들어가고 生命(생명)속에 부처가 되기 위한 種子(종자)가 심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種子(종자)가 싹이 터서 반드시 信心(신심)하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佛法(불법)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면 즉 부처로 되는 種子(종자)를 심어 주지 않으면 種子(종자)가 없으므로 싹이 트지 않아 信心(신심)을 하게 되는 날도 永遠(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佛法(불법)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折伏(절복)을 하여 相對(상대)가 入信(입신)할지, 안 할지는 다음의 문제로 어쨌든 折伏(절복)하여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도 듣고 싶지 않다고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 [억지로라도 說(설)하여 듣게 하라]고 大聖人(대성인)님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억지라는 것은 무리해서라도 라는 것입니다. 듣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억지로 說(설)하여 듣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순수하게 入信(입신)할 것 같으니 이야기 해준다. 저 사람은 아직 入信(입신)할 것 같지 않으니 이야기해주지 않는다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相對(상대)를 고르지 말고 상대가 入信(입신)할 것 같거나 안 할 것 같거나, 순수하게 보이거나 안보이거나 여하튼 억지로 모든 사람들을 折伏(절복)한다. 自己(자기)에게 緣(연)이 있는 주위의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折伏(절복)하겠다라는 決意(결의)를 갖고 折伏(절복)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상 大聖人(대성인)님의 가르침 속에서 折伏(절복)의 實踐(실천)에 필요한 여섯 개 항목에 걸쳐서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을 가슴에 담아 實踐(실천)하는 곳에 大聖人(대성인)님의 말씀대로 折伏(절복) 또 많은 사람들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는 折伏(절복)이 몸에 배리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折伏(절복)할 때는 [忍辱(인욕)의 갑옷을 입고]
[忍辱(인욕)]이란 일체의 侮辱(모욕)이나 迫害(박해)에도 지지않고, 참으며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 忍辱(인욕)이란 六波羅蜜(육파라밀)의 하나로 佛道修行(불도수행)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如說修行抄(여설수행초)]에 [누구든간에 諸經(제경)은 無得道(무득도) 墮地獄(타지옥)의 根源(근원)이고, 法華經(법화경) 만이 成佛(성불)의 法(법)이라고 소리도 아끼지 않고 외치며 諸宗(제종)의 人法(인법)을 함께 折伏(절복)해 보시라. 三類(삼류)의 强敵(강적)이 닥쳐 온다는 것은 틀림없느니라]

<新,673>


忍(인)의 3종류
(1). 耐怨害忍(내원해인) : 원망을 당하고 미움을 받더라도 참고 견디는 것.
(2). 安受苦忍(안수고인) : 病(병)을 앓거나, 박해를 받아, 괴로운 일이 있다 해도 참고 견디는 것.
(3). 觀察法忍(관찰법인) : 이 世上 모든 것이 不生不滅(불생불멸)이라는 眞理(진리)를 잘 알고, 일체의 일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

자료출처 : 정선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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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