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들어온 음식 이야기 4

그때의 카페는 차나 식사를 파는 곳이 아니라 술을 파는 곳이었다. 이는 일본에 있던 카페 문화가 조선에 이식 된 것이다.

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들어온 음식 이야기 4


여급이 있었던 일제강점기 까페

까페(cafe)는 프랑스어로 커피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커피를 파는 집이라는 의미로 쓰이다가 소규모 음식점으로 가벼운 식사도 할 수 있는 음식점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도 이 카페가 들어오는데 그때의 카페는 차나 식사를 파는 곳이 아니라 술을 파는 곳이었다. 이는 일본에 있던 카페 문화가 조선에 이식 된 것이다.

처음 카페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경성부 명치정 등 지금의 명동 등지에 생겼다. 경성부 황금정의 아다리아라는 카페의 일본 여급에게 반해 시계점의 수만 원 어치 귀금속을 훔쳐 이 여급에게 써버린 조선인 남자 점원이 잡히기도 했다.(동아일보 1925.11.16. 일녀에게 반해 점원이 노라나) 일본에서 모르핀을 밀매하던 일본사람이 조선으로 와서 본정 삼정목에서 타란데라라는 카페를 운영하며 모르핀을 밀매하다 검거된 일도 있었다. (동아일보1927.07.22 출옥하야 또 범죄 1년 8000병 밀매)

주로 일본인 거주 구역에 있던 카페는 1930년대 초반부터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종로 등 북촌 지역으로 진출한다. 아리랑, 미나도, 파라다이스 같은 카페가 1930년대 초에 북촌에 생겼다. 이런 현상을 경박한 조선 청년은 월급 푼을 밧어서 그에 다 바치겟고 철업는 시골만석꾼의 자손도 땅마지기나 그에 바칠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삼천리 제3권 제9호 1931.09.01 서울 떼, 까메, 롱) 여자 종업원이 많고 규모가 큰 카페는 대부분 일본인 자본으로 조선인 거주지역에 개업하였는데 한국인 자본으로 카페를 연 곳도 있었다. 종로 2정목 현재의 인사동 16번지에 문을 연 엔젤 카페는 동일 은행의 우두머리이자 전통 있는 양반가의 후손 민대식의 일본인 며느리가 개업한 것이었다. (별건곤 제57호 1932.11.01 만화경)

1920년대부터 조선 사람들도 까페에 많이 가고, 까페에서 일하는 여자종업원이 늘면서 경성부 내에서 가장 많은 카페를 관할하는 경성부 본정 경찰서에서는 1927년 6월 14일 오전10시부터 관내 카페 영업자 53명을 모아 가지고 경찰서장으로부터 결점개선에 관한 엄중한 주의를 시켰다. 그 내용은 전부 9가지로 작부나 여뽀이들을 카페 문간에 내보내어 객을 끄는 일은 절대 하지 못한다는 등 고용여자에 대한 취체였다. (동아일보1927.06.015 카페 엄중단속 본정서의 철퇴)

                               1927년 6월 15일 카페 엄중단속 본정서의 철퇴(사진출처:동아일보)


이런 주의에도 불구하고 카페 여종업원에 대한 문제가 계속되자 1927년 12월에는 경성부 본정경찰서에서 관내에 흩어져 있는 카페 여급과 그 외 각 주점 작부들의 신체 검사를 행하였다. 경성부내 여급과 작부의 수효는 380여명으로 전염병의 보균자가 있어서 전염할 염려가 있음으로 엄밀히 검사하여 그러한 염려가 있는 사람은 단연코 그 업에 종사치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동아일보 1927.12.15. 지분싸인 본정서 여급작부 검사)

                              1928년 3월 4일 돈벌이하는 여자직업 탐방기 (9) 새로 살길을 발견한 듯 덤비는

                              카페의 웨이트리스 설움 (사진출처:동아일보)

카페 여급이 매춘의 가능성이 컸던 것은 월급을 따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먹고 자기만 하고 월정수입은 정한 바 없이 오직 손님에게서 받는 팁을 모아 생활비로 썼다. 1928년 경성 안에는 이 직업에 종사하는 조선 여자의 수가 상당히 늘어서 대략 2-30명이나 되며 그네들의 팁으로 말미암은 총액수는 평균 매월 3-40원 가량이라 한다. (동아일보 1928.03.04. 돈벌이하는 여자직업 탐방기 (9) 새로 살길을 발견한 듯 덤비는 카페의 웨이트리스 설움) 카페 여종업원의 수는 계속 늘어나서 1934년에는 일본인과 조선인 카페 여종업원 수를 모두 합하면 2489명이었다.

카페는 주로 술을 팔았고, 어두운 조명 속에서 음악을 틀고 춤을 출 수 있는 무대가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재즈음악을 틀고 카페의 여급이 춤을 추거나 남자 손님들과 함께 춤을 추면서 팁을 받았다. 이것이 매춘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선총독부에서는 1934년 9월 15일 카페 영업취체내용 표준을 제정하여 각 도지사에게 통첩했다. 그 주요 내용은 조명을 백색으로 신문을 읽을 수 있는 밝기로 하고, 무대장치나 춤을 금지하며 라디오나 축음기의 사용도 밤 10시까지만 하라는 것이었다. 영업시간은 새벽 1시까지로 하고 팁은 전부 여급의 수입으로 하라고 했다. (동아일보 1934년 9월 15일 2면 카페에 철추(鐵鎚))

                                1934년 9월 15일 카페에 철추(사진출처:동아일보)

원고출처 : 한국문화원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