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9

단종과 금성대군이 함께 넘는 한 많은 고개 고치령 옛길

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9

단종과 금성대군이 함께 넘는 한 많은 고개 고치령 옛길


고치령..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서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를 연결하던 마구령 옛길과 고치령 옛길은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 강원도 태백 근처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룬다.

소백산 자락에 연결되는 영주시에서 북쪽의 충청북도 단양군으로 넘어가는 길은 크게 3개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고개는 죽령이다. 죽령의 북쪽은 충청북도이고 반대편은 경상북도이다. 죽령은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소백산 자락을 넘는 대표적인 고갯길이다. 죽령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두 번째 고치령(770m)이 나온다. 세 번째가 가장 동쪽에 위치한 마구령(820m)이다. 이곳 주민들은 마구령을 메기재라 부르고, 고치령을 고치재라 부른다. 『대동여지도』에는 소백산의 동쪽 능선에 각각 마아령(馬兒岺)과 곶적령(串赤岺)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고개는 보부상이나 장을 보러 다니던 백성들만 이용하던 길이 아니었다. 고치령은 단종과 금성대군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영주에서 가장 알리고 싶은 관광지가 죽령 옛길이라면, 가장 숨기고 싶은 관광지가 바로 고치령(古峙嶺)이다.


                                                                                       고치령 정상석


                                        대동여지도 : 곶적령(串赤岺) : 고치령 / 마아령(馬兒岺) : 마구령


                                               산신각과 장승 사이에 마구령, 백두대간과 연결되는 산길이 보인다


고치령 마루에 있는 산신각
단종과 금성대군을 동시에 숭배하는 제각으로 옛날 이곳을 지나던 백성들이 무사히 산을 넘을 수 있도록 신령에게 기도하던 장소이다.

정면과 측면이 각 한칸으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며, 좌우 기둥을 보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쓴 두 개의 주련이 눈에 들어온다.
此山局內至靈至聖(차산국내지령시성),
萬德高勝性皆閒寂(만덕고승성개한적),
이산의 영역 안이 모두 지극하게 신령스럽고 성스러웠으면 한다. 수만 가지 덕이 높고 번성해서 모든 사람의 본성이 여유로우면서 고요하기를 바란다.

해마다 음력 정월 열나흘과 10월에 마을 주민들이 찾아와 제사를 올린다. 옛날 영월에 유배된 단종 복위운동을 지휘한 금성대군이 이 고치령을 통하여 단종과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신령각 내부 현판에는 “영월의 단종은 태백산 신이요, 홍주의 금성대군은 소백산 신인데 이곳에 두 산신이 봉안되어 있다”고 적혀 있다. 홍주란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이다.

산신각에는 좌측에는 태백 산신이 우측으로는 소백산신이 나란히 붙어있다. 이곳의 산신각에 두 분을 함께 모시게 된 연유는 조선 초 세조까지 올라간다. 세조의 왕위 찬탈 후 영월에는 폐위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소백산 너머 영월군 청령포 적소에 안치되어 있었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수양대군, 즉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순흥도호부로 각각 귀향 오게 되었다. 영월과 금성대군이 있던 순흥은 고치령을 사이에 두고 있다. 금성대군이 밀사를 파견하여 영월의 청령포까지 소식을 전했고 조카인 단종이 보고 싶으면 야밤에 청령포에 다녀왔다고 한다. 즉 고치령은 금성대군과 밀사들이 오갔던 비밀의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에 내려와서도 단종의 복위를 꾀한다는 명목으로 세조는 단종과 금성대군을 모두 죽이게 되는데 영월에 있던 단종은 태백 산신이 순흥에 있던 금성대군은 소백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단종과 금성대군의 화상이 나란히 걸려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이때부터 백성들은 이분들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소백과 태백 사이의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산신각을 짓고 금성대군과 단종이 영혼이 되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아담한 산신각에는 태백산 신령인 단종과 소백산 신령인 금성대군이 함께 모셔져 있다. 요즘도 영주사람들은 정월 열 나흗날이면 어김없이 정성드려 산신제를 지내니 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함이다. 특히 고치령은 소백산과 태백산의 줄기가 만나는 지형적 위치로 인해 산신각에 두 분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순흥에서 집성촌을 이루었던 순흥 안씨 가문에도 살육의 바람이 불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어 피로 계곡을 적셨다고 하니 이 근처 마을 이름에 “피”라는 단어가 들어가게 된 연유 라고 한다. 이후로 순흥 안씨들은 황해도나 함경도 등으로 흩어져 살게 된다.

고치령을 논하면서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바로 복위 운동의 중심에 순흥이 있었고, 그 순흥의 군관민이 금성대군의 밀사가 되어 단종이 있던 영월 청령포까지 오가던 길이 바로 고치령이기 때문이다. 고치령이 단순히 보부상들이 물류를 위해 넘던 고개를 넘어 '단종애사'의 슬픔을 간직한 한(恨)많은 길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태백산과 소백산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곳이 바로 고치령이기 때문이다. 영주사람들은 북쪽 영월에서 죽은 단종은 태백산 신령이 되었다라고 믿고 남쪽 순흥으로 유배되었다가 안동에서 죽은 금성대군은 소백산 신령이 되었다라고 믿는다. 그들 조카와 삼촌 사이에는 육신은 넘을 수 없었고, 죽어서야 만날 수 있었던 고개가 바로 고치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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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