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대길

입춘을 알린다. 창덕궁 보춘정

입춘을 알린다. 창덕궁 보춘정

보춘정(報春亭)은 창덕궁 내 성정각(誠正閣)에 딸려있는 조선 숙종 대에 지어진 누각이다. 창덕궁 성정각 건물 동쪽에는 누각 건물이 붙어 있는데,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 남쪽에는 보춘정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희우(喜雨)’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한다는 의미이고, ‘보춘(報春)’은 봄이 오는 것을 알린다는 의미이다. 「동궐도(東闕圖)」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편액이 걸려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래층이 누의 형태로 빈공간 인데 반하여 「동궐도」에는 막혀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창덕궁 보춘정


                                                                                              창덕궁 회우루


                                                                                 창덕궁 보춘정, 창덕궁 희우루 편액


희우루 이름은 정조가 지었다. 이와 유사한 정자 이름으로 한강의 희우정, 주합루 뒤쪽의 희우정이 있다. 모두가 단비가 내린 연후에 그 기쁨을 정자의 이름에 반영한 것이다. 성정각의 희우루도 같은 맥락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당시 희우루라는 이름을 지은 정조는 그 까닭을 글로도 남겼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54권 잡저(雜著)에 기록된 「희우루지(喜雨樓志)」가 그것이다. 가뭄이 계속되다가 건물 신축공사 착공 날 비가 내리자 정자 이름을 희우루로 하자는 신하들의 말에 정조는 비가 흡족하게 내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일차 거절하였다. 그 후 계속 가물다가 건물이 완성되어 준공식을 거행하는 날 많은 비가 내리자 신하들이 다시 정자 이름을 희우로 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에 정조는 흔쾌히 누 이름을 희우루라고 이와 관련된 글을 지어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현재의 보춘정과 희우루 건물은 팔작지붕에 겹처마 양식이다. 누마루 형식으로 1층은 긴 사다리꼴 돌기둥을 받쳐 개방하였으며, 옆의 성정각 건물보다 지붕이 높게 올라갔다. 2층은 띠살 창소를 달고 좁은 퇴를 덧달아 계작각(鷄子脚) 난간을 둘렀다.

지금 보춘정 앞 행랑채에는 임금의 옥체를 보호한다는 의미의 ‘보호성궁(保護聖躬)’, 임금이 드시는 약을 짓되 조화롭게 조제 한다는 의미의 ‘조화어약(調和御 藥 )’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이 글을 원해진(元海振)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편액의 내용으로 보아 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관서인 내의원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왕실의 의약을 담당하는 내의원은 본래 인정전 서쪽에 있었으나 1917년 창덕궁에 큰불이 났을 때 인정전의 동행각으로 옮겼고, 1920년대 전각을 중건할 때 성정각 일부 건물이 내의원으로 변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편액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온 돌절구와 같은 약재 도구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집희(絹熙, 관물헌(觀物軒)

희우루 옆에는 ‘집희(緝熙)’라는 편액을 단 건물이 있다. 본래 관물헌(觀物軒) 건물이며,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성정각 뒤쪽에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동궐도에는 유여청헌(有餘淸軒)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 걸린 집희(絹熙,)라는 편액은 세자 시절의 순종이 쓴 것이다. 왕의 편전 중 하나로 흥선대원군이 집권 당시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다.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생모 복녕당 귀인 양씨와 거주하기도 했다. ‘집희’란 계속하여 밝게 빛난다는 의미로 『시경(詩經)』에서 따온 말이고, ‘유여청헌’은 넉넉하고 맑은 마루라는 뜻이다. 고종의 친필로 추정된다. 관물헌은 정조가 초계문신을 대상으로 시험을 쳤던 장소이자, 순조 때는 효명세자가 이곳에서 공부를 했으며, 헌종이 약원의 진찰을 받고 대신들을 접견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고종 때는 흥선대원군이 창덕궁에 입궐하면 이곳에서 머물렀고, 1874년에는 순종이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순종의 백일잔치가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갑신정변 때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등 개화 세력들이 고종을 창덕궁 관물헌에 모시고 청나라 군대와 맞서 싸웠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참조 장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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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