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최고 교육기관, 남과 북의 성균관 이야기

남과 북에 자리한 각각의 성균관은 형태적으로 닮았지만 서로 다른 기능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반도 최고 교육기관, 남과 북의 성균관 이야기

문묘와 성균관 사적 서울 & 개성 성균관 북한 고려와 조선을 대표하는 한반도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 남과 북에 자리한 각각의 성균관은 형태적으로 닮았지만 서로 다른 기능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닮은 듯 다른 두 성균관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01. 사적 서울 문묘와 성균관 대성전 모습 ©문화재청

02. 고려박물관의 고려 성균관 대성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려 말에 시작해 조선시대까지 한반도 최고 교육기관으로 역사적 가치가 깊은 사적 서울 문묘와 성균관 그리고 북한 개성에 흔적이 남아 있는 개성 성균관(북한 국보문화유물). 성균관 이전, 도읍에 학교를 세워 국가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는 고구려 태학, 통일신라 국학, 고려 국자감이 있었다. 이후 국학, 성균감, 성균관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조선도 이를 계승해 조선시대 교육의 표상으로 삼았다. 각각 옛 교육기관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만활용의 측면에선 다른 방식을 취한다.

서울 성균관은 그 상징성을 사립대학 성균관대학교와 재단법인 성균관이라는 민간단체가 유지하고 있다면, 개성 성균관은 간부를 길러내는 국립종합 대학 고려성균관과 국가가 직접 관리, 운영하는 고려박물관 (성균관의 18채 건물 중 대성전, 동무, 서무, 계성사 4개 건물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교육기관’이라는 비슷한 지향점을 지니면서도 고려시대 국자감을 계승한 개성 성균관과 조선 유교의 정통성을 계승한 서울 성균관은닮은듯 다르다.

03. 『조선고적도보』 속 경성 문묘 명륜당 ©국립중앙박물관

04. 문묘 일원의 모습 ©문화재청



서울 성균관의 어제와 오늘

서울 성균관은 11월 중순이 되면 5세기를 살아낸 명륜당 앞 은행나무를 즐기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린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가을의 흔적을 가장 늦게까지 즐길 수 있는 단풍명소이기 때문이다. 성균관은 명실 공히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속칭 ‘반궁(泮宮)’으로 불리는데 ‘반(泮)’이란 나라의 학교란 뜻으로, 반궁을 감싸고 흐르는 물길을 ‘반수(泮水)’, 주변 마을을 ‘반촌(泮村)’이라 불렀다. 문묘를 맡아 지키던 유생과 이들을 보살폈던 성균관공노비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성균관대학교가 그 뜻을 이어받아 교육기관으로의 의미를 이어가고 있다. 이웃한 재단법인 성균관은 유교조직을 대표하는 중앙기구로서 아직도 한국 유교의 교단과 의례(문묘향사, 성균관과 지방향교의 통합관리, 사회사업 등)를 수호한다.

성균관은 고려 충선왕 때 당시 최고 교육기관이던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공민왕 때 잠시 국자감으로 불리다가 다시 그 이름을 회복하여 조선으로 이어진다. 조선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한 뒤 종묘와 사직, 경복궁을 차례로 창건한 다음 1397년 2월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성균관의 터를 선정케 하고, 이듬해인 1398년 7월에 준공했는데, 현존하는 성균관의 출발이 되었다. 완공된 성균관의 총 규모는 96칸이지만, 정종 2년(1400)에문묘가 불타버려 태종 7년(1407)에 재건되었다. 이후 큰 시련은 임진왜란 때 찾아왔다. 화마로 잿더미가 되어 선조 34년(1601)부터 복구작업이 시작됐고 이듬해 문묘의 대성전이 중건되었으며 선조 39년(1606) 지금의 명륜당이 재건되었다. 현재 유명한 것은 영조 18년(1742)에 쓴 친필을 새긴 탕평비이다.

성균관은 단순히 교육만을 담당하는 기관이 아니라, 공자와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享祀) 역할을 하는 ‘문묘’의 기능을 한다.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앞쪽에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 공간을 마련하고 그 뒤로 교육 공간을 배치한 방식으로, 이는 개성 성균관도 동일하다. 성균관대학교 대로 쪽으로 난 외삼문(外三門)은 대성전의 정문으로 항상 굳게 닫혀 있지만, 석전대제 때만 열린다. 문묘의 향사는 멀리 신라 성덕왕 13년(714)에문선왕(文宣王:공자)과 그 문하의 뛰어난 열 명의 제자[孔門十哲]를 비롯한 72제자의 화상(畵像)을 국학에 안치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들을 위한 제사인 ‘석전대제’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석전대 제는 옛 악기와 제기, 고전음악인 문묘제례악과 팔일무, 제 관이 입는 전통적인 의상과 고전적 의식 절차 등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05. 『조선고적도보』 속 개성 성균관(開城 成均館)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06. 『조선고적도보』 속 서울 성균관의 대성전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개성 성균관의 어제와 오늘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는, 고려시대 국자감을 계승한 개성 성균관은 외국 사신들의 숙소인 순천관, 교육기관인 숭문 관으로 변천되다가 1089년 국자감을 지금 자리로 옮겨왔고, 1310년 성균관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조선 초에 한양에 성균관을 지으면서 개성 성균관은 향교가 되었고, 현재 건물들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소된 것을 1602년에 복원한 것이다. 앞부분에 대성전 구획이 있고 뒤에 명륜당 구획이 있는 서울 성균관과 달리, 개성 성균관은앞부분에 명륜당 구획이 있고 뒷부분에 대성전 구획이 있다.

명륜당 앞마당의 은행나무 두 그루는 서울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좌우로 학생 들의 숙소였던 동재(東齋), 서재(西齋)와 함께 자리한다. 명륜 당 뒤편 내삼문을 지나면 공자를 제사 지내던 대성전과 앞뜰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자리한 형태도 서울 성균관과 같은 형식이다. 다만 유교의 상징인 석전대제와 전통행사는 일절 계승하지 않고 현존하는 교육기관과 박물관의 기능을 국가가 직접 운영한다.

교육기관인 고려성균관은 경공업 부문의 전문 간부를 양성 하는 북한의 종합대학으로, 1992년 5월 5일 개성경공업단과 대학을 성균관으로 개칭하였다. 북한에서는 고려성균관의 개교일을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이 설립된 9월 1일(992년)로 지정했는데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원산농 업종합대학과 함께 북한에서 4개뿐인 종합대학 중 하나이다. 현재 북한 국보 유적인 개성 성균관은 1988년부터 고려 박물관 전시실로 운영하고 있다.

1931년 일제강점기때 세워진 개성부립박물관이 그 전신으로, 광복 이후 개성부립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개성분관으로 개편되었다. 4개의 전시관으로 운영 중인 고려박물관은 동무의 제1전시관에 고려의 성립과 발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을, 대성전의 제2전 시관에 과학기술과 문화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유물을, 계성사(공자 부모의 사당터)의 제3전시관에 개성시 박연리 적조 사터의 발굴 유물 등을, 서무의 제4전시관에 불일사오층석 탑에서 발견된 금동탑 3기를 비롯한 공민왕릉의조각상과 벽화 등을 전시하고 있다.  안현정(성균관대학교 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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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