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들의 음주문화 김홍도의 로 들여다보기

김홍도는 로 정조 연간에 관리들의 음주문화를 조심스럽게 꼬집고 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인들의 음주문화 김홍도의 <하지장도>로 들여다보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처럼 자연스럽게 통하는 이야기가 있을까? 우리 조상들 역시 ‘술’ 때문에 울고 웃고,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왔을 것이다. <하지장도(賀知章圖)>는 그런 이야기 중 하나를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01.김홍도, <하지장도(賀知章圖)>,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2×26cm ©국립중앙박물관



술을 사랑한 문인, 그림이 되다

요즘 젊은이들이 직업 선택에서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꿈을 위해 도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동양의 문인들에게 출사(出仕)와 은둔(隱遁)은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키워드였다. 과거 급제로 벼슬을 하든 은거를 선택하든 술은 문인들에게 즐거움과 예술적 영감을 선사하고 현실의 고통이나 어려움 따위를 잊게 하는 친구였다. 그 때문에 특정 문인의 술과 관련한 일화나 문학작품이 시공을 초월해 회자되며 회화작품으로도 그려졌다.


그중 에서 김홍도가 몇 번의 붓질로 간결하게 그려낸 <하지장도(賀知章圖)>는 애주가(愛酒家) 하지장(賀知章)의 일화를 그린 것으로 문인의 아취를 물씬 풍기며 보는 이의 눈길을 머물게 한다. 1)

말 위에 앉은 관복 차림의 하지장은 만취 상태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귀가하고 있다. 그 곁에는 일산(日傘)을 든 하인이 있고, 술동이를 등에 맨 채 뒤에서 걸음을 재촉하는 나이 지긋한 남성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 이때 일산을 든 하인의 표정은 난감한 반면, 술동이를 맨 남성은 마치 하인이나 술 취한 하지장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눈가에 웃음이 가득하다. 화면의 좌우 여백에는 시문(詩文)과 관지(款識)가 있을 뿐 공간이나 시간에 관한 정보는 전혀 없다.

하지만 관모도 벗어버린 남성의 만취한 모습이나 피곤해 보이는 말, 일산 등에서 낮부터 시작된 술자리가 야심한 시각이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화면 속 인물들의 동작이나 시선 처리, 특정 지물로 공간이나 시간적 배경, 관련 메시지까지 은유적으로 전하는 것은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보이는 독특한 표현기법이다. 이러한 면모는 그가 조선시대 최고의 화원화가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탁월한 문재이자 예술가, 하지장

만취한 하지장(당나라의 시인으로 시인 이백의 발견자로 알려졌으며 풍류인으로 유명하다)을 관복 차림으로 그린 것은, 695년 급제 이후 744년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 중종, 예종, 현종을 섬기며 관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관직 생활이 녹록치 않았는지 거의 매일 밤 문사들과 술을 마시며 탁월한 문재(文才)를 발휘한 예술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회향우서(回鄕偶書)」는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천고의 명편(名篇)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신룡연간(神龍年 間 705-707)에 포융(包融), 장욱(張旭), 장약허(張若虛)와 함께 오중사사(吳中四士)로 칭송된 것은 그러한 사실을 입증 해준다. 2)


또한 하지장은 자신보다 나이가 42세나 어린 이백 (李白)의 「촉도난(蜀道難)」, 「오서곡(烏栖曲)」 등을 읽고,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謫仙人]’이라 칭찬하며 그의 재능을 미리 알아본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는 “하지장이 말을 타면 배에 오른 듯 흔들리고, 눈앞이 어지러워 우물에 떨어지면 물 아래 잠드네[知章騎馬似乘船 眼花落井水底眼]”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는 두보(杜甫)가 지은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의 첫 구절로, 하지장이 평상시 퇴청하면 매일 밤 몸을 가누지 못 할 정도로 술을 마셨기 때문에 온전히 귀가하지 못했던 일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3)


이러한 문구와 딱 들어맞는 하지장의 모습을 보면 무릎을 치며 ‘아!’라는 탄복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김홍도의 <하지장도>는 고사인 물도일 뿐만 아니라 시의도(詩意圖)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문인세계를 지향한 노년기의 김홍도가 백묘법(白描法)으로 대상의 특징만을 묘사하여 높은 화격을 보여준다. 4)


두보의 「음중팔선가」에 등장하는 문인들은 관직 생활보다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이들과 술을 마시고 시문을 지으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탐닉하였다. 동 시기 백성들은 음중 팔선의 행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보는 어떤 마음으로 시를 지었을까? 백성의 입장에서 그들을 지탄하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동경했던 것 인가?  오늘날 그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음중팔선가」는 오랫동안 회자되고 그림 소재가 되면서 어느 순간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현대에도 샐러리맨들은 일과를 마치고 하루 회포를 풀거나 비즈니스의 연장이라는 미명 아래 술자리 문화를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김홍도는 <하지장도>로 정조 연간에 관리들의 음주문화를 조심스럽게 꼬집고 던 것은 아니었을까?

1) 이 작품을 둘러싼 진위 논란이 있지만, 필자는 그 원형을 유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2) ‘오중사사’는 『신당서(新唐書)』 「유안전(劉晏傳)」에서 처음 보이며, 절강성 소주의 옛 지명인 오중(吳中)에서 활동했던 뛰어난 문사 4명을 가리킨다. 이들은 당나라 초기의 시가에서 뛰어난 장점을 수용함과 동시에, 경물과 작가의 감정이 하나되는 정경융합(情景融合)의 시가로 성당기 시가의 전범을 제시하였다.
3) 「음중팔선가」는 두보가 장안에 처음 도착한 745~746년경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팔선은 하지장을 필두로 여양왕(汝陽王) 이진(李璡), 좌승상 이적지(李適之), 최종지(崔宗之), 소진(蘇晉), 이백(李白), 장욱(張旭), 초수(焦遂)이다. 연장자 하지장을 맨 앞에 뒤고 그 다음부터는 관직 순서로 시를 읊었으며, 맨 마지막의 초수는 관직이 없었기 때문에 『당서(唐書)』 「전기(傳記)」에 수록되지 않았다.
4) 화면 왼쪽에 “갑자랍념단구사우서묵재(甲子臘念丹邱寫于瑞墨齋)”라 적은 다음 주문방인 “신홍도(臣弘道)”와 백문방인 “취화사(醉畵士)”가 찍혀 있다. 이는 김홍도의 <하지장도>가 1804년 12월 20일 동갑내기 화원화가 박유성(朴維城)의 서묵재에서 그려졌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최경현(김포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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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