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마을, 오늘의 매력이 되다.

경북 북부 해안지방에서 현재까지 단일 문중의 역사와 문화가 전승·유지되고 있는 대표적인 반촌마을이다.

옛 마을, 오늘의 매력이 되다.

영덕 괴시마을 ‘영덕 괴시마을’은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이 태어난 마을로, 함창 김씨(이색의 외가)가 처음 터를 잡은 이후 조선 인조대 영양 남씨가 정착하면서 남씨 집성촌이 되었으며, 경북 북부 해안지방에서 현재까지 단일 문중의 역사와 문화가 전승·유지되고 있는 대표적인 반촌마을이다. 마을 내에는 40여 호의 전통가옥과 전통적인 마을 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


국가민속문화재 영덕 괴시마을 전경



옛날 옛날 한 옛날엔 ‘호지촌’

영덕 괴시마을은 경북 영덕군 영해면에 있는 전통 마을로 2021년 국가민속문화재(민속마을)로 지정되었다. 영해면은 조선 시대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북쪽으로 태백산맥에서 발원한 송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동해로 빠지며 남쪽으로는 역시 태백산맥에서 발원한 오십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동해안으로 빠진다. 괴시마을 동쪽에는 해발 286m의 대소산이 있어서 동해안과는 차단되어 있으며 마을은 대소산을 주산으로 서향이다. 괴시마을은 현재 영양 남씨가 가장 번성하여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시작은 고려 말 함창 김씨가 처음으로 여기에 터를 잡은 것부터이다.

그 당시 마을 주변으로는 늪이 많고 북쪽에는 호지(濠池, 성 밖을 둘러싼 못)가 있어서 호지촌 으로 불렸다. 이후 수안 김씨, 영해 신씨를 거쳐 1630년경 영양 남씨가 정착하면서 영양 남씨 집성촌이 되었다. 괴시 마을의 영양 남씨 괴시파는 남홍보의 7세손인 남영번의 네 아들별 네 개 지파로 파시조가 되었다. 그중 괴시파는 4남 남수(南須)의 후손이다. 남수는 조선 세종대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부인 대흥 백씨의 세거지였던 영해군 창수면 인량리로 낙향하였다.


괴시파종택 모습


이후 남수의 후손들은 인량마을을 시작으로 영해의 여러 지역을 이동하며 거주했다. 괴시마을은 인량리와 4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자리한 마을이다. 남수의 3세손에 이르러 장남은 인량리에 남고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영해 원구마을, 청송, 예천 등으로 이주하였다. 차남인 세하의 손자 남정방이 괴시리에 거주하고 있던 수안 김씨와 혼인하게 되면서 괴시마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남정방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괴시마을 입향조는 세하의 4세손 남두원으로 보고 있다. 영양 남씨의 15세손에 해당한다. 남두원의 장남 남붕익은 낙향하여 스무나무골 입천정과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을 지었다. 차남 남붕한은 수안 김씨와 혼인으로 분가하여 대남댁을 지었다. 입향 초기에는 선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형성하다가 18세기에 영양 남씨들의 분가가 이루어져서 괴시파종택을 중심으로 한 윗말과 대남댁을 중심으로 한 아랫말의 경계가 나타났다.


03. 영덕 괴시마을은 원래 근처에 늪과 연못이 있어 호지촌으로 불렸다  ©문화재청

04. 괴시파종택의 사당 모습  ©문화재청


채의 분화가 없는 건축적 특징 보여

가옥 대부분은 ‘ㅁ’자형의 뜰집으로 ‘채의 분화(사랑채, 안채 등 공간이 채와 채로 분리된 것이 우리 전통 건축의 일반적인 모습이다)’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부속채가 하나로 연결되어 ‘ㅁ’자 형을 이루는 주택을 안동에서는 뜰집이라고 하는데 안동을 시작으로 안동과 지리적으로 소통이 있었던 청송과 영주, 봉화, 울진, 영덕 그리고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주로 나타난다.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뜰집이 나타나는 것은 고려 개국 공신들의 후손이라는 측면에서 조정과 정치적으로 밀접한 상류계층이 개경의 가옥을 모방하여 지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동 지방의 뜰집은 태백산맥 양사면에 혼인을 통한 교류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폐쇄형 주택을 지은 것은 부녀유폐와 동남축에 많이 거주하였던 남인계와 연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로 이어지는 가문 및 이들과 교류했던 가문에서 뜰집이 많이 나타난다. 따라서 그 지역적 특색을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에는 전란 시 공적을 세운 가문의 뜰집이 규모도 크고 외관이 화려한 것을 알 수 있다. 뜰집의 확산은 학문적 교류와 더불어 혼인을 통하여 태백산맥을 넘나들면서 확산되었다. 영덕 지방의 무안 박씨, 재령 이씨, 영양 남씨는 태백 산맥을 넘어 안동지역과 혼사가 이루어졌다. 이들 역시 뜰 집을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혼인에 의해서는 본가 만이 아니라 외가의 건축 유형을 모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통해 당시 학맥과 혼인이 건축에 미친 영향도 파악할 수 있다.


05. 영덕 괴시마을 동제 모습. 정월 14일 자정에 지낸다. 괴시마을에는 혼례와 제사 및 묘사 등

생활문화가 전승되고 있다.  ©문화재청
06. 해촌고택 모습. 해촌고택은 ㅁ자형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재청


조선 후기의 변화를 반영한 마을

괴시마을 최초 입향가옥인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은 동쪽에 산을 등지고 있는 마을의 특성상 서향으로 지었는데 이후의 집들은 안채는 서향으로, 사랑채는 남향으로 지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경제적 여건에 따라 사랑채의 평면이 커지고, 정형의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화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괴시마을의 뜰집은 대부분 18~19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안동 지역보다 늦다.

따라서 안동 지역은 초기 뜰집의 정형을 보여주지만 괴시마을은 조선 후기 생활과 유교 제례 등의 변화를 반영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 뜰집은 채의 분리 없이 안채와 사랑채, 행랑 등이 하나로 연결된 것이 특징이지만 사당까지도 별동으로 두지 않는 것은 매우 특징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신위는 안채 상방 부근에 감실을 두어 봉안했으며 후에는 사랑채로 옮겨가는 현상도 나타난다. 20세기에는 괴시파종택, 대남댁, 혜촌고택의 경우 일반 반가와 같이 사당을 별동으로 증축하기도 하였다.

감실이 사랑채로 옮겨지고 제례와 접객의 중심 공간이 되면서 사랑채 부분은 퇴를 달아내고 칸을 늘리는 등 규모가 확장되고 팔작지붕의 도입으로 장식과 정면성을 강조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뜰집은 안채의 규모를 일자형으로 크게 만들지 않는 이상 중정 마당이 종축으로 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깊이감 있는 마당은 남인계열 가옥의 형식적 엄격성에서 나타난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근대기를 거치면서 개축되거나 새로 지어진 가옥들은 뜰집 보다는 6칸 양통이나 8칸 양통으로 지어졌다. 제례나 유교적 규범보다는 실용적인 이유로 개편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괴시마을은 위치상 해안에 가까워 해안적 특징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안동 내륙의 건축 특징이 엿보이는데 학맥, 혼인, 분가 등을 통해 그러한 특징이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또 괴시마을의 가옥들은 뜰집에서는 형식의 엄격성을 보이지만 일제강점기와 근대기를 거치면서 실용적인 방향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연 요인보다 인문 요인에 따라 건축이 변화한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출처/김왕직(명지대학교 문화재실측설계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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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