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장으로 보는 현대사

​경성제대 조문상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포로감시원으로 징용 일본인과 함께 사형 후 야스쿠니에 묻히다.

사진한장으로 보는 현대사

조문상(일본명 히라하라 모리쓰네)  태국 반환형무소 촬영 추정


경성제국대학 재학중 일본군 군속으로 징병됨. 태국 포로수용소에 배속돼 `콰이강의 다리` 건설 공사 때 일본인 상관의 명령을 연합군 포로에게 전하는 통역병 역할 수행. 포로 학대 혐의로 기소돼 1947년 2월 25일 싱가포르 창이형무소에서 사형당함. 향년 26세.

개성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식민지 조선의 앨리트 청년
​경성제대 조문상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포로감시원으로 징용 일본인과 함께 사형 후 야스쿠니에 묻히다.  전쟁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한국인은 148명, 그 중 129명이 포로감시원이었다. 14명이 사형되고, 115명이 징역형을 선고받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형 직전 휴지에 연필로 써내려간 그의 마지막 외침은 끝까지 읽기 힘들 정도로 가슴 아프다.
​"절망의 심연에는 고통이 없다. 속세의 모든 것에 절망할 때 비로소 처음으로 인간은 안심한다"

"...'자, 국가를 봉창합시다'고 하자 모두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격렬한 감동을 되씹으며 노래를 부른다. 가슴에 스며드는 것은 결코 슬픔이 아니다. 회한도 아니다. 저 대풍에 생명을 던지며 살아온 사람만이 아는 그런 감격이다. '저승에는 정말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라는 구별은 없겠죠?'라고 김장록이 안타깝게 말했다. 이 바쁜 세상에서 왜 서로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일본인도 조선인도 없다. 모두 동양인이 아닌가. 아니 서양인도 같은 동포다"

처형 전날, 사형자들을 위한 만찬회가 열렸다. 간단한 일본식 채소, 조선식 매운 고추, 우유를 앞에 두고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자 나라의 국가와 군가를 불렀다. 조문상과 함께 100킬로 수용소(타이멘 철도 100km 지점)에 있었던 김장록은 <아리랑>을 불렀다.

어두운 감방 안에 반딧불이 떠다녔다. (일본에서 반딧불은 죽은 자의 영혼으로 풀이된다) 먼저 간 동료들이 뒤따라올 이들을 마중 나온 것이다. 이날 일본에서 온 교화사 승려 다나카 이치군이 사형자들을 위해 불경을 외우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다나카는 후에 가족을 찾지 못한 조선인 사형자의 유골을 자신이 주지로 있는 유텐지에 모셨다. 조문상의 유골은 아직 유텐지에서 가족을 기다리고 있다.

다나카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문상에 대해 "사람을 돌보는 리더였다"며 "일본인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기억했다.

"감방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러면서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 부르는 <올드 랭 사인>이 들려온다. '이런 세상엔 미련이 없다'는 말도 했지만 본심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역시 이 세상이 그립다. 물론 이로써 끝장이 나겠지. 그래도 내 영혼만은 이 세상 어딘가를 떠돌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누군가의 추억 속에라도 남고 싶다. 나는 아직 인간이다. 죽기까지는 인간이다. 인간다운 욕심이 남아 있으니. 경성 교외 북한산 백운대 암벽에 새겨둔 내 이름은 아직 남아 있을까"

"친구들아, 아우들아, 자신만의 지혜와 사상을 지녀라. 나는 죽음을 앞둔 지금 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소스라치는 구나. (⋯ ⋯) 인생 최대의 고통이다. 이 방을 나서기까지가. 8분이나 지났다. 나야! 힘내라. 아홉시의 조종(弔鐘)이 천천히 울린다.

아버지, 어머니 고맙습니다. 누이, 아우야 잘 있거라. 아직 2분 남았다. 1번 열차 출발! 드디어 이것으로 기록을 끝낸다. 이 세상이여, 행복하여라"

그의 유서 속엔 끝까지 버릴 수 없었던 생에의 미련, 납득할 수 없는 강요된 죽음, 조국과 사랑하는 이들에게 흔적도 없이 잊혀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해방된 조국으로 가서 조국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수 없는 안타까움, 고향과 어린 시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일본인 상관에 대한 동정심 등이 잘 드러나 있다.

만약 그가 몇몇 동료들처럼 감형을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면, 빅터 프랭클린이나 프리모 레비처럼 뛰어난 '생존자 문학'의 창시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얼마나 못되게 굴었으면 사형을 받았을까? 글이란 온전한 정신위에 인간성을 바탕으로 쓰여지고 학문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애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일본의 완장을 차고 마치 자신의 벼슬인냥... 앞장서서 포로를 괴롭힌 철없는 유학생이 만약 살아왔다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승만 앞잡이가 되어 다시 독립운동을 한 민족주의 인사들을 탄압하고 비하하는 글을 썼을 것이라 왜 상상을 못하는지... 백성들... 시민들이 아니라 백성들이다. 출처/김영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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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