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모든 것이 열악했던 전통시대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위기에 


코로나 19 사태를 보면, 문명은 발달했지만 여전히 자연재해와 전염병으로부터 인류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열악했던 전통시대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판타지 요소가 강하지만, 드라마 <킹덤>에서는 국가적 재난 사태를 맞아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들이 나온다. 드라마처럼은 아니지만 우리 선조들도 다양한 위기에 맞서 나름의 지혜를 발휘했다.

조선을 휩쓴 대기근
농업을 주요 산업으로 하는 전통시대에는 자연 의존도가 특히 높았다. 이런 과정에서 홍수와 가뭄이 겹치게 되면 국가 전체가 대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가 도래하여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었던 17세기에 특히 어려움을 겪었다. 현종 때인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있었던 대기근은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으로 불릴 정도로 참혹했다.

가뭄이 계속되자 현종은 “내가 즉위한 이래로 천재와 사변이 달마다 생기고, 한재와 수해가 서로 잇따라 해마다 없는 적이 없으니, 밤낮으로 걱정하여 편안할 겨를이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한재가 더욱 참혹하여 들판이 모두 타버려서 밀, 보리를 수확할 수 없게 된 데다가 파종도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하고 이어서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라고 하며, 승지가 교서를 기초하여 널리 직언을 구하도록 했다. 기근의 원인이 왕의 부덕의 소치임을 밝히고 대책 수립을 지시한 점이 주목된다.

01.보물 제1087-1호 신찬벽온방. 1613년(광해군 5)에 허준(許浚, 1546∼1615) 이 온역(瘟疫)의 치료를 위해 편찬한 의서이다. ⓒ문화재청



1671년 2월의 기록에는 “팔도에 기아와 여역( 疫)과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 정도였는데, 삼남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중략) 늙은이들의 말로는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라고 하여 당시의 자연재해와 전염병 피해가 임진왜란보다 심했다고 노인들은 증언하고 있다.

“이때 굶주린 백성 2만 인에게 먹이는 죽을 서른 또는 마흔 가마 쑤어서 썼는데 닭이 울 때 시작하여 한낮에 이르러 끝나고 한낮부터 다시 쑤어서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너무나도 붐벼서 혹 먹지 못하는 자도 있는가 하면 거듭 먹는 자도 있었다”라는 기록에서는 피해 백성들에게 죽을 공급한 상황과 함께, 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재난이 발생하면 피해 지역에 세금 탕감, 진휼미의 공급 등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현재의 재난지원금 지급과도 유사한 모습이다. 그 외에도 왕부터 반찬 가짓수를 줄였으며, 금주령을 내려 곡식 확보에 신경을 썼다. 죄가 가벼운 죄수의 석방 등을 통해 사회 전체가 재난을 함께 극복해 가자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02.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수표교.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 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해 수량을 재는 역할을 했던 중요한 다리로,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왔다. ⓒ서울역사편찬원

03. 진신화상첩 조선시대 고위관료들의 초상을 모은 화첩. 화첩에 실린 22명 중 5명의 얼굴에서 천연두 후유증인 곰보 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 고위 관료들도 이랬다면, 일반 백성들은 더 치료가 힘들었을 것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지진의 발생과 인식

『삼국사기』나 『고려사』와 같은 역사서에도 지진 관련 기록은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지진’이라는 용어가 1,800건 이상 검색되어, 빈도가 높았음을 보여 준다. 전통시대에는 지진이 일어나면 정치 현상으로 연결시키는 경향이 강했다.

『태종실록』 1410년(태종 10) 3월 15일 서운관에서 지진이 있었다고 아뢰자, 태종은 “이것은 원통한 옥사(獄事) 때문이니 혹독한 형벌을 가하지 말라”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에 지진이 크게 일어난 시기는 16세기 초반 중종 때였다. 1518년(중종 13) 5월 18일 한양을 비롯한 전국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유시(酉時 오후 6시경)에 세 차례 크게 지진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레처럼 커서 사람과 말이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城堞)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노인들이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하였다. 팔도가 다 마찬가지였다”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영의정 정광필은 “지진은 전에도 있었지마는 오늘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당시의 심각성을 말하고 있다.

선조 때인 1594년 한양에 지진이 일어나자 선조는 지진의 원인을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고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지진을 과학적 기준보다 정치나 도덕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실록에 지진 기록이 구체적으로 정리된 것은 천문 관측 기관인 서운관(후의 관상감)에서 체계적으로 천문 현상을 관측했기 때문이었다.

실록에는 지진이 발생한 지역과 함께 ‘집이 흔들렸다’, ‘담장과 성첩이 모두 무너졌다’, ‘산 위의 바위가 무너졌다’ 등 지진의 강도를 추론할 수 있는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은 지진의 예측이라든가 지역별 내진(耐震) 건물의 설치에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04. 서울 광혜원 정측면. 광혜원은 1885년(고종 22)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이다. ⓒ동아일보사

05. 보물 제488호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고려 광종 때 태어난 혜소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냈다 하며, 많은 이의 존경을 받았다 한다. 특히 당시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해 칠장사 아랫마을 백성들은 굶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문화재청



전염병의 공포와 극복
『조선왕조실록』에서 역병이나 역질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총 1,400건 이상에 달한다. 실록에는 역병을 나타내는 용어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여역( 疫)이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나온다. 두역(痘疫), 학질( 疾), 홍역(紅疫), 악병(惡病), 염병(染病), 온역(溫疫), 콜레라 등 시기별로 다른 전염병이 유행했던 것도 기록을 통해 확인을 할 수 있다. 실록에는 전염병의 참상이 시기적으로 계속되고 있음이 보인다.

『숙종실록』에는 “이 해에 도성에서 쓰러져 죽은 시체가 1천 5백 82인이고, 8도에서 사망한 사람이 2만 1천 5백 46인이었다. 서울 밖의 지역에서 보고한 수는 열에 두셋도 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이렇게 많은 수에 이르렀으니, 기근과 전염병의 참혹함이 실로 전고(前古)에 없던 바였다”라고 하여, 전염병이 심각했던 시대상을 보여 준다.

전염병이 유행하면 기본적으로 환자들을 격리하였다. 한양에 역병이 발생하면 환자나 시체를 도성 밖으로 추방하는 방식이었다. 성 밖에서 역병에 걸린 환자를 전담하던 곳은 활인서(活人署)로, 이들에게는 의원과 함께 의무(醫巫)를 배치하였다. 평소 무의탁 병자를 돌보는 일을 맡다가, 역병이 유행하면 따로 여막(廬幕)을 설치하여 환자들을 보살폈다. 굿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방법도 동원되었다.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의학서들의 편찬도 이어졌다. 허준은 『동의보감』 이외에도 전염병에 관한 저술인『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을 남겼다. 숙종 때는 왕비가 두창(천연두)에 걸리자, 숙종이 경희궁에서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긴 기록이 보이며, 과거시험 장소를 변경한 기록도 있다. 숙종 때의 어의 유상(柳)은 왕의 두창을 치료한 공으로 종2품직까지 올랐다. 정약용은 홍역과 천연두 퇴치를 위한 이론을 정리한 책인 『마과회통』을 저술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지석영이 우두법을 시행하여 천연두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85년에는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이 설립되면서, 전염병 극복의 역사가 이어졌다. 출처 / 문화재청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