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1929년 11월 3일 운명의 그날, 학생독립운동기념일에 기억해야할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영광의 주역들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1929년 11월 3일 운명의 그날, 학생독립운동기념일에 기억해야할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영광의 주역들 


11월 3일, 올해로 91주년을 맞이한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은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억하고 학생들의 항일 정신 계승을 이어가고자 1984년에 제정된 법정기념일이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맞이하여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역N문화(https://nculture.org) 콘텐츠를 통해 소개한다. 앳된 모습이 남아있는 어린 학생들의 주도로 시작된 독립운동을 보며 그날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본다.



일제식민지정책에 항거한 학생운동은 1920년부터 지속적으로 일어났지만 대대적인 발발은 광주와 나주 사이를 통학하던 한일 학생간의 충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 지역은, 일제가 호남 지역의 농산물을 쉽게 약탈해 가기 위해 철도노선이 발달해 있었다. 식민지 수탈의 심화, 항일 민족운동의 고조, 교육 차별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 상황에서 일제의 수탈과 멸시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면서 자라났던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는 항상 갈등과 마찰의 요인이 있었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는 통학열차 안에서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인 박기옥과 이광춘, 이금자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해당 사건을 지켜본 박준채가 분노하며 일본인 학생들과의 난투극이 벌어지고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들 간의 패싸움으로 발전했다.


광주 학생 독립운동의  주역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나주역 충돌 사건 이후 며칠 뒤인 11월 3일은 일제의 4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명치절로 명치 천황의 탄생 기념일인 동시에 식민지 경제 수탈의 성공을 자축하기 위한 행사가 예정되어있었다.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학교에서 기념식을 치르도록 한 일제에 항거하여 학생들은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고 침묵으로 항거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일부 한국 학생들은 나주역의 충돌 사건을 한국 학생들의 잘못으로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등 편파 보도한 광주 일보를 응징하기 위해 달려갔다.
이와 비슷한 시각 신사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은 광주고보 최쌍현 학생에게 시비를 걸어 단도로 얼굴을 찌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가며 더 큰 시비가 벌어지고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야구방망이, 죽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하여 시위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날 오후 7시부터는 일제가 전라도의 전 경찰력을 동원하여 주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고, 광주고보와 광주중학교는 3일간 휴교령이 내려졌다. 당시 신문은 시위에 참여한 사람이 3만 명에 이르렀으며 전시 상태를 방불케 했다고 보도했다.


성진회 결성 기념사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였던 광주는 여느 지역 못지않게 학생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비밀결사 조직인 성진회와 독서회중앙부는 광주 지역 학생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역N문화에 수록된 자료집 광주 향토문화자료 총서11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총 6개의 장과 부록으로 학생항일운동의 배경과 연표, 재판기록 및 주역들의 일대기 등을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문화원연합회(회장 김태웅) 담당자는 “지역N문화 포털(https://www.nculture.org)은 전국 지방문화원 230여 곳의 발간자료를 비롯해 지역문화 관련 자료를 확보하여 특색 있는 고유문화 및 당시 시대상을 전하고 있다. 지역N문화에 수록된 광주학생독립운동 자료를 통해 우리 국토와 역사, 문화를 지키기 위해 싸운 학생들을 기억하며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출처 : 이미지출처 : 한국문화원연합회 지역N문화 원천콘텐츠 자료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