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역사 - 일본군‘위안부’ 2

함께쓰는역사 - 일본군‘위안부’

 

“모든 것은 김학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학순, 그 역사적 만남

 

【일본군'위안부'의 역사는 1990년대 초부터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언어,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며 세계 평화와 인권 회복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있었다. 동시에 이들과 함께하며 자료를 찾고 언어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 활동가, 연구자, 시민들이 있었다. 그 순간들을 기록하며, 우리의 역사를 미래 세대에도 이어가고자 한다.】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그리고 김학순

매년 8월 14일은 「일본군‘위안부’ 기림의 날」이다. 한국 정부는 2018년부터 이 날을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 ‘위안부’ 관련 운동단체나 활동가들은 2018년 이전부터 8월 14일을 기려오고 있다. 2012년 타이완 타이베이에서 열린 제11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 회의에서 매년 8월 14일을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로 제정했다. 1992년 8월 서울에서 시작된 아시아연대 회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세계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단체, 활동가, 개인이 함께 여는 연대 회의다. 8월 14일은 1991년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이 최초로 공개 증언을 한 날이다. 이날을 기림일로 정하며 아시아연대 회의는 ‘위안부’ 문제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여성폭력 문제, 한국군 ‘위안부’ 문제, 미투(#MeToo) 운동까지 토론한다. 김학순은 국가주의 차원에서 제도화되어 있던 ‘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입장에서 ‘폭력’이라고 규정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한 용기와 연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바꿔놓은 이름 ‘김학순’

‘위안부’ 문제 해결 활동가·연구자들 사이에는 “모든 것이 김학순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공감이 있다. 내가 만나왔던 일본의 활동가들도 활동 계기를 묻는 말에 예외 없이 김학순의 이름을 들었다. 대단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니다. 1991년 12월 일본 도쿄지방법원에 보상청구 소송을 했던 김학순이 일본 각지의 집회장에서 증언했고 대부분 전업주부였던 여성들이 이곳에서 김학순을 만나고 인생이 달라졌다.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쓴 윤명숙도 김학순을 만나 연구 인생이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일본 유학 시절 여성사 관점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자 했지만,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글쓰기 속에서 방향을 잡기 힘들었다. 그러다 1991년 가을 김학순을 만났고 윤명숙은 식민지 지배체제와 전쟁, 그리고 여성 피해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만주에서 태어난 김학순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평양으로 갔다. 가난한 친정에 기댈 수 없었던 어머니는 재혼했고 의붓아버지 밑에서 김학순은 행복하지 않았다. 일종의 도피처로 기생학교를 갔고 어머니는 김학순을 수양아버지 밑으로 입적시켰다. 1941년 김학순은 먹고 살길을 찾아 양부와 함께 중국에 갔고, 중국 식당에서 맞닥뜨린 일본군에게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김학순의 삶은 민족과 계급, 성차별이라는 삼중 차별이 얽혀 있었고, 일본의 전쟁 및 식민지 지배 책임, 범죄의 반복 금지를 강조하는 김학순의 목소리에는 여성사 연구자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듯한 자극이 있었다.

 

 

변화와 시작을 이끈 김학순과의 만남

‘위안부’ 연구자로서 나의 시작도 김학순부터였다. 청소년기를 보내던 1980년대, 그룹 ‘다섯 손가락’의 ‘이층에서 본 거리’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결국 심의에 걸려 바뀌었지만 “길거리 약국에서 담배를 팔듯 세상은 모순 속에 깊어만 가고”라는 가사가 있었는데, 이 가사는 그즈음 나를 둘러싼 세상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사이 10대 여학생을 납치해간다는 ‘봉고차 괴담’에 우리는 가슴을 졸여야 했고, 여학교마다 있다는 ‘변태 선생님’ 소문과 시도 때도 없는 ‘바바리 맨’의 공격에 이를 갈아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견뎠나 싶은 일상들이 내 사춘기를 채우고 있었다.

 

1990년대 하면 X-세대나 캠퍼스의 낭만 등이 회자되지만, 내가 겪은 90년대는 좀 달랐다. 1991년에는 성폭력 가해자를 21년 만에 찾아가 살해했던 ‘김부남 사건’이 있었고, 1992년에는 10년 넘게 자신을 성폭행 해왔던 의붓아버지를 죽인 ‘김영오 사건’이 있었다. 또한 1993년에는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이 일어나 위계를 이용한 성적 괴롭힘을 ‘성희롱’이라 명명할 수 있게 되었다. 두렵고 불편한 일상을 견뎌내면서도 우리를 괴롭히는 실체를 지목할 언어가 없어 억울하고 답답한 시기였다.

 

여성들의 경험을 설명할 언어를 찾고, 불안감과 죄책감이 분노의 형태를 띠게 될 무렵, 나는 김학순을 만났다. 우연히 김학순 방문을 알리는 벽보를 봤고, 홀리듯 행사장에 들어섰다. 세월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그날 각인된 김학순의 메시지다. “그동안 힘들었지? 나는 너희들보다 어렸을 때 ‘위안부’가 되어 고통을 겪었어. 우리 잘못 때문이 아니야. 정치하는 사람, 전쟁하는 사람,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 잘못이야. 그 죄를 반드시 물어야 해. 우리 이야기를 분명히 기록해야 이런 일을 멈출 수 있어.”

 

 

김학순 할머니 동상

 

만남과 기록은 계속되어야 한다

김학순의 표정은 담담했고 눈빛은 맑았으며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성폭력 트라우마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자신의 과거를 똑바로 볼 수 있을까?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여성으로서의 나의 삶은 위로받고 화해하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뒤 수요시위에서 생존자들을 만났을 때도 같은 기분이었다. 면담을 위해 생존자를 만났을 때나, 생존자들의 인권 캠프를 따라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이제는 찾을 수 없게 된 동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생존자들을 보노라면, 살아져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로써 강하게 살아냈구나, 하는 감탄이 일었다. 김학순과 이후의 김학순들로부터 배운 것은 산다는 것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함이었다. 더불어 그 존엄함을 훼손하는 모든 시도와 명분에 반대함으로써 우리가 배운 것을 실천해야한다는 믿음이었다.

 

김학순이 등장하고 30여 년이 지났다. 이제는 김학순도, 수요시위에 참석하는 생존자도 만날 수 없다. 각종 궤변으로 강제동원과 성노예를 부정하면서 김학순들이 기록해온 역사를 지우려는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그러나 김학순들을 만났던 이들의 마음은 불안하거나 위태롭지 않다. 피해자들의 바람을 이루는 일이 얼마나 절실하고 필요한 것인지 더욱 분명히 되새길 뿐이다. 전쟁과 가난, 인종 또는 민족, 그리고 성차별이 얽히고설킨 폭력이 지속되는 한, 김학순은 더욱더 세계 곳곳의 사람과 만나야 한다.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이 제정된 의미도 여기에 있다. 김학순과 만났던 순간들을 기록하는 이유도, 그 순간에 생긴 긍정의 에너지를 증폭시키기 위함이다. 우리의 기록은 인간 누구나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뉴스레타 박정애  동북아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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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