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쓰는 역사 - 일본군‘위안부’ 황선순은 어디로 끌려갔을까

 

함께 쓰는 역사 - 일본군‘위안부’ 황선순은 어디로 끌려갔을까

 

【일본군‘위안부’의 역사는 1990년대 초부터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언어,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며 세계 평화와 인권 회복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있었다. 동시에 이들과 함께하며 자료를 찾고 언어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 활동가, 연구자, 시민들이 있었다. 그 순간들을 기록하며 우리의 역사를 미래 세대에도 이어가고자 한다】

 

 

<복숭아와 황선순>

황선순을 떠올리면 복숭아향이 난다. 2005년 6월 말에서 7월, 복숭아가 한창 여물었을 때 전남 화순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조사관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황선순은 ‘위안부’ 피해 신고를 했고, 나는 피해 내용을 조사하여 정부에 피해 생존자로 등록할 것인지를 판단해야 했다. 나는 30대 초반이었고 열정적이었으며 사람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대개는 피해자에게 살갑게 다가갔지만 황선순 앞에서는 왠지 머뭇거려졌다.

 

그는 복숭아 같았다. 잘못 접근하면 푹 파이고 멍이 들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일 자신의 피해를 알까 두렵다고 했다. 또 집안 문제로 속이 시끄럽다고도 했다. 많이 늦었지만 신고는 꼭 하고 싶어서 남몰래 대서인代書人을 찾아가 신고서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2005년 7월 전남 화순 자택에서

 

<누나가 돈 벌어 소 사줄게>

황선순은 음력 1924년 12월(1925년 1월)에 태어났지만, 출생신고는 1926년 12월에 했다. 전남 장성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언니가 시집간 후 어린 남동생과 살았다. 열여덟 살 동짓날(1943년 1월)에 동생과 함께 고모 댁에 밥을 먹으러 가던 중 여자를 모집하고 있는 남자들을 만났다. 오십 살가량 된 부산 남자와 사십이 넘은 일본 남자였다. 부산에 있는 고무공장에 가서 1년만 일하면 소 두 마리 값을 벌 수 있다고 했다. 그 길로 황선순은 남자들을 따라갔다. 울고 있는 남동생에게는 “고모 집에 가 있어. 누나가 돈 벌어 소 사줄게.”라는 말을 남겼다.

 

송정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갔다. 기차가 멈출 때마다 탄 여자들이 모두 20명이었다. 부산역에서 내린 뒤에는 일본인의 인솔하에 일본 요코스카로 가서 다시 ‘남방’으로 가는 배 ‘해우마루’를 탔다. 황선순이 말한 해우마루는 헤이요마루(平洋丸)를 가리킨다. 일본 해운업체 일본우선(日本郵船)이 태평양 연안 항로에서 운항하던 이 배는 1941년 10월 일본해군에 징용된 뒤 사이판(Saipan), 축(Chuuk), 라바울(Rabaul) 등에 화물과 여객을 수송했다. 그리고 1943년 1월 17일 미국 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침몰했다.

 

황선순은 부산에서 배를 탔을 때부터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아찔했다. 그렇게 밤낮으로 열흘 정도 배를 타고 간 곳은 ‘나보르’. 피부가 검은 원주민이 살고, 하얀 옷을 입은 일본 해군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 일본인 안내쟁이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작은 방이 열 개씩 있는 단층집으로 끌고 갔다. 그의 방 앞에는 ‘아키코(秋子)’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 집에서의 생활은 괴로웠다. ‘못생겨서’ 일본 군인들의 구박을 받았고, ‘키치가이(気違い, 미치광이)라는 욕설에 시달리며 고초를 겪었다고 말하는 모습은 마음 아프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침몰하고 있는 헤이요마루의 모습

 

<황선순은 어디로 끌려갔던 것일까>

황선순은 해방 후 싱가포르와 일본을 거쳐 부산에 입항했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하룻밤을 묵은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2005년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활지원대상자로 등록되었다. 나는 피해 사실을 기입하며 동원지를 적는 부분에서 한참을 고심했다. 그가 말한 나보르가 대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발음에 맞는 태평양 지역의 섬들을 샅샅이 살피다 ‘나우루공화국’이라는 곳을 찾았다. ‘위안부’ 피해 지역으로서는 생소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군에 점령당했다는 기록을 믿어보기로 했다. 황선순의 피해 지역은 그렇게 공식적으로 ‘나우루’가 되었다.

 

2008년 3월 일본인 연구자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가 통역과 함께 황선순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요시미는 황선순이 1944년에 끌려갔다고 기록했지만, 헤이요마루는 1943년 1월에 침몰했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와의 인터뷰에서 황선순은 “나를 잘 대해준 군인도 있었고, 그들도 전쟁으로 많이 죽었기 때문에 불쌍하다”고 말했다. 나와 만났을 때와는 일본군에 대한 언급 내용이 전반적으로 달랐다. 아마도 자신 앞에 있는 일본인 남성 교수를 의식한 말이었을 것이다.

 

요시미는 이때의 인터뷰를 토대로 황선순이 싱가포르에 끌려갔다고 했다. 실제 그 인터뷰에서는 황선순도 거의 싱가포르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했고, 나보르라는 지명은 살짝만 언급했다. 그 말을 들은 면담자가 ‘그럼 그곳이 라바울이냐’고 물었더니 황선순은 “라바울이 아니라 나보르. 조사하는 사람(필자)이 처음 왔을 때 내가 다 기억하고 있어서 전부 가르쳐줬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라바울에 동원됐던 박옥련이 ‘나바루에 끌려갔다’라고 말한 구술을 읽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박옥련이 끌려간 곳이 ‘나바루’라면, 황선순이 끌려간 곳은 ‘나보르’이다. 황선순은 라바울이라는 곳을 들어본 적이 없다. 라바울의 영어 발음은 ‘라보르’, 일본어 발음은 ‘라바우루’이다. 따라서 우리는 황선순이 라바울에 끌려갔었다고 이해해도 좋다.

 

<기억의 퍼즐 찾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황선순을 만난 지 15년이 지났다. 그는 2018년 1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에야 나는 황선순이 끌려간 곳이 나우루가 아니라 라바울이라고 확신했다. 이제라도 공식 기록을 바로잡고 싶어 열정적이었지만 얄팍했던 나의 과거를 털어놓는다.

 

그 사이 나는 피해자의 기억을 좇아 역사를 만들어가는 일이 무겁고도 고통스러운 작업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연구자가 됐다. 피해자들의 기억의 문가에서 여전히 서성이고 있는 기분이 들어 몹시 괴롭지만, 그래도 기억의 퍼즐 찾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역사로서 전달하는 일이야말로 여성에 대한 폭력을 멈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해자들이 생전에 한결같이 말해온 바람이었다.

 

출처:동북아역사재단 뉴스레타 “박정애, 동북아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 연구위원”
 

※ 황선순의 구술은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3, 「J○○ 누나가 고무공장 가서 소 사줄게」, 『일본군위안부 피해 구술 기록집: 들리나요? 열 두 소녀의 이야기』와 吉見義明, 2013, 「ある元日本軍「慰安婦」の回想(3): 黃善順さんからの聞き取り」, 『中央大學論集』 34.를 통해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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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