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국·베트남의 종묘,같은 제도로 다른 길을 걷다

한국·중국·베트남의 종묘,같은 제도로 다른 길을 걷다

 

돌아가신 어버이를 추모하는 풍습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 있다. 그러나 조상의 신주를 모셔 의례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나라는 한국, 중국, 베트남뿐이다. 중국은 고대 국가로부터 도성을 건설할 때 종묘를 조정의 왼쪽(동쪽)에, 사직을 오른쪽(서쪽)에 두는 것을 제도화했다. 이후 한국과 베트남 땅에 개국한 여러 왕조도 중국의 제도를 모범으로 삼도성을 건설하고 제사시설의 으뜸인 종묘를 건립했다. 그러나 각 나라의 사정이 달랐기에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의 종묘를 만들어 냈다.

 

01.종묘 정전 내부 02.자금성 태묘 내부

 

군주 어버이의 영혼을 모시는 공간, 종묘

효도는 어버이를 공경하고 잘 섬기는 것이다. 유교문화권에서는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뿐만 아니라 돌아가시고 나서도 추모하며 정성스럽게 모시는 것을 효도라 생각했기에 제사 지내는 것도 중요하게 여겼다. 제사는 기일이나 명절에 어버이를 대신하는 신주(神主)를 대청에 모셔 놓고 지내는 것으로 평상시 신주는 별도의 장소에 두었다.

 

신주는 나무판에 불과하지만, 어버이의 영혼이 깃든 것이기에 신성한 장소에 모셨는데 이를 사당(祠堂)이라고 한다. 사당은 서민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갖추어야 하는 곳으로, 서민의 사당은 가묘(家廟)라 불렀으며 군주의 사당은 종묘(宗廟)라 불렀다.

 

유교 문화의 발상지인 중국의 옛 기록에 따르면, 가묘는 살림집의 동쪽에 세우고 규모는 3칸으로 하게 되어 있으며, 종묘는 궁궐의 동쪽에 건립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종묘의 규모와 형식에 관해서는 시대마다 달리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종묘가 가묘와 달리 한 나라를 대표하는 곳으로 국가가 지향하는 이념에 따라 변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03.종묘 정전 전경 04. 종묘 정전 열주 ©정정남

 

중국 베이징 명·청대의 태묘(太廟)

베이징은 원, 명, 청 3왕조에 걸쳐 도성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 베이징의 도시 구조와 자금성의 틀은 명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종묘인 태묘는 고대 도성 건설의 제도에 따라 자금성의 전면 동쪽에 위치해 있다. 창건은 1420년(영락 18) 이며 현재와 같은 공간 구성으로 정착된 것은 1541년(가정 20)이다.

 

베이징의 태묘는 남북 장방형의 대지에 2중으로 담장을 두르고 대지의 중심부에 일직선 축에 맞추어 정전(正殿)-침전(寢殿)-조묘(廟)를 배치했다. 정전, 침전, 조묘 좌우에는 모두 배전(配殿)을 두었다. 태묘의 정전은 제사 의례만을 위한 건물로 신주를 모시지는 않았다.

 

정전 후면에 위치한 침전은 9칸으로 칸마다 감실을 두어 태조 이하 선대 황제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중앙 칸에는 태조의 신위를 모시고 좌·우실에는 소목(昭穆)의 순서대로 신주를 배치했다. 한 건물 안에 실을 달리하여 신주를 모셨다는 뜻으로 ‘동당이실(同堂異室)’ 구조라 한다. 조묘는 오래된 조상의 신주를 옮겨 모시는 곳으로, 내부 공간은 침전과 마찬가지로 동당이실이며 신주는 소목제도를 따라 배치했다.

 

베이징의 태묘는 전면에 의례를 행하는 건물인 정전을 두고 후면에 신주를 모시는 침전을 별도로 두는 전묘후침의 배치, 한 건물에 여러 실을 나누어 사용하는 동당이실의 개념, 가운데 태조를 모시고 그 좌우에 대를 달리해 신위를 배치하는 소목의 제도가 반영된 제례 공간이다.

 

05.자금성 태묘 전경 ©이강민

 

베트남 후에 응우옌 왕조의 세묘(世廟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의 수도는 후에(Hue)라는 도시다. 후에의 황성에는 종묘가 2곳 있었다. 궁궐의 정전인 태화전 전면 동쪽에 건립한 태묘(太廟, 타이미우)와 서쪽에 세운 세묘(世廟, 또미우)이며, 동쪽 태묘는 광남국(1558~1777년)이라 불리던 응우옌 왕조의 신위를 모셨던 곳이고, 세묘는 마지막 왕조의 선대 황제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원형을 갖춰 남아 있는 곳은 세묘로 1820년(明命, 민망 2)에 창건되었다.

베트남의 세묘는 중국과는 달리 의례를 행하는 정전과 신주를 모시는 침전을 한 공간으로 들이되 지붕은 달리하여 올린 것이 특징적이다. 침전 공간은 9칸 동당이실 구조로 중앙에 세조(자롱, 嘉隆)의 신위를 두고 후대 황제를 소목의 위차대로 배치했다. 정전 공간은 침전보다 좌우로 각 1칸이 많게 지어 제례가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했다.

 

06.베트남 후에 세묘 전경 ©이강민

 

후에의 세묘는 중국의 제도를 따르되 덥고 습한 기후에도 의례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침전과 정전 공간을 병렬로 결합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이는 17세기부터 베트남 건축에서 시도된 숭배 대상을 모시는 건물과 의례용 건물을 결합하는 건축적 변화가 반영된 결과다.

 

 

한국 서울 조선의 종묘

조선의 종묘는 궁궐의 동쪽에 위치하지만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궁궐에서 먼 곳에 건립되었으며 건물도 서남향이다. 중국의 고제를 모범으로 하여 도성 내 위치가 결정되었지만, 그 구체적 입지와 좌향은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종묘는 1395년(태조 4)에 창건되었다. 태조 때 건립된 정전은 중국 태묘에서 신주를 모시는 침전과 의례를 행하는 정전을 겸하는 건물로 동당이실 구성의 건물이었다. 정전 내부 공간이 협소했기 때문에 정면 툇간과 넓은 월대가 의례용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오래된 신주를 옮겨 모시는 조묘에 해당하는 건물인 영녕전 4실을 건립한 것은 1421년 세종 때로 위치는 정전의 서북쪽이다.

 

07.「종묘전도」(출처: 『宗廟儀軌』, 1706년, 규장각학국학연구원 소장)

 

정전은 중국이나 베트남과는 달리 지속적으로 증축되었다. 정전에 봉안된 신주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후대 왕의 효심으로 인하여 대다수 선대왕의 신위는 세실을 늘려가며 정전에 있게 되었다. 이에 정전이 19실까지 증가했다.

 

이처럼 정전이 무한히 늘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태조의 신위를 정전 가운데가 아닌 서쪽 1실에 모시고 후대 왕의 신위를 동쪽으로 위차대로 모셨기 때문이다. 영녕전으로 옮겨진 신위도 많기 때문에 영녕전도 증축되었다. 정전과 달리 세종 때 건립한 4실을 중심으로 좌우의 낮은 협실을 증축하고 그 내부는 동당이실로 구성했다.

 

조선의 종묘는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공간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중국의 고제를 고집하지 않고, 조선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던 효(孝)를 건축공간에 풀어냈기 때문이다. 같은 동당이실의 개념으로 내부 공간을 구획했지만, 서쪽을 상위(上位)로 삼아 동쪽으로 길게 늘여 만든 정전의 전면에는 기둥이 일렬로 계속되고 그 앞에 행례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만들어져 매우 인상적인 공간으로 인식된다.

 

*소목제(昭穆制): 시조(始祖)의 신위를 중앙에 두고, 2대 이하의 신위 중에서 짝수의 신위를 시조의 좌측에 두고, 3대 이하의 신위 중에서 홀수의 신위를 시조의 우측에 배치하는 형식 <좌소우목>을 말한다. 그 배치가 아버지(昭)와 아들(穆)의 순서를 따른다고 하여 소목제라고 했다. 출처: 글, 사진 정정남 (건축문헌고고스튜디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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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