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열정과 장인의 인내로 지켜낸 낙화

화가의 열정과 장인의 인내로 지켜낸 낙화

 

화가의 열정과 장인의 인내로 지켜낸 낙화 국가무형문화재 제136호 낙화장 보유자 김영조 인두 몇 개가 걸려 있는 작업대 옆 숯불 화로에는 벌겋게 달궈진 인두가 꽂혀 있고, 작은 탁자 위에는 새끼로 꼬아 만든 옛날식 사포와 검댕이 묻은 천이 놓여 있다. 언뜻 거칠어 보이는 낙화장의 작업실을 보니 작업대 뒤에 펼쳐진 병풍 속 낙화 작품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진다. 뜨겁고 단단한 쇠붙이로 저토록 다채로운 선과 깊은 색감을 표현하기까지, 불에 달군 인두만큼이나 열렬하고 굳건했을 김영조 낙화장의 지난 인고의 시간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낙화장(烙匠) 종이, 나무, 가죽, 비단 같은 바탕 소재를 인두로 지져서[烙] 산수화, 화조화 등의 그림[畵]을 그리는 기술과 그 기능을 보유한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 낙화의 기원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쓴『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된 ‘낙화변증설(烙辨證說)’에서 찾을 수 있으며, 19세기 초부터 전라북도 임실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왔다.

 

 

전통예술, 낙화의 길을 잇다

김영조 낙화장의 작업실은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충청북도에서 활동하는 지역 및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들의 작업실 겸 전시장으로 꾸며진 공간이다. 김영조 낙화장은 2010년 10월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22호 낙화장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이어 2018년 12월 낙화장이 국가무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되면서 보유자 인정을 받았다. 김영조 낙화장이 낙화에 입문한 것은 1972년 스물두 살 되던 해였다.

 

“낙화도 배우고 취직도 할 수 있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우연한 기회에 시작했지만, 곧 낙화에 빠져들었어요. 낙화는 불과 인두를 쓰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인두를 몸의 일부처럼 자유자재로 쓰기까지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그때 스승이셨던 전창진 선생님 밑에서 함께 배우던 동문 중에서는 저 하나만 끝까지 남았어요.”

 

낙화를 익히는 고된 과정도, 더디고 긴 숙련의 시간도 묵묵히 견뎌낸 김영조 낙화장을 정작 힘들게 한 것은 전통예술로서 가치와 예술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낙화를 배우고 연구하며 낙화 사랑이 깊어 갈수록 아쉬움도 그만큼 커졌다.

 

“기꺼이 평생을 바쳐 일가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현실은 막막하기만 했지요. 아예 전통예술로 인정받지 못했으니까요. 한동안은 낙화를 생계수단으로 삼아 팔리는 작품을 만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낙화가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스스로 길을 만드는 방법뿐이라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낙화의 가치를 찾는 일은 오롯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마음으로 1990년대부터 낙화 연구에만 매진하기 시작했다. 김영조 낙화장은 치열하게 실력을 쌓는 한편, 전승공예대전 등 국내 공모전뿐 아니라 상하이, 이탈리아, 태국 등 해외 전시에도 사비를 들여 가며 참가했다. 낙화 관련 자료를 찾고 학자들과 교류하는 등 낙화의 역사적 의미를 찾는 데도 공을 들였다.

 

01. <낙화 하산도> 중국 북송(北宋)시대 굴정(屆鼎)이 그린 <하산도(夏山圖)>를 낙화로 재현한 작품

 

먹과 붓 대신 불과 쇠로 그리는 동양화

우리나라에서 낙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뚜렷한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김영조 낙화장은 그동안의 조사를 통해 500여 년 전 중국에서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낙화는 우리나라 고유 예술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전통예술로 자리를 잡았고, 1820년 무렵에는 박창규라는 걸출한 장인도 등장했지요. 그때부터 밀양 박씨 호계공파를 중심으로 전승됐는데, 1930년대 진안 출신 백씨 형제가 제자로 들어가면서 박씨 가문을 벗어났고, 전창진 선생을 거쳐 저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낙화로 일가를 이루려면 불과 인두를 다루는 ‘기술’도 경지에 올라야 하지만, 동양화가로서 ‘예술성’도 필요하다. 실제로 낙화 작품을 보면 표현 기법이나 농담(濃淡)의 깊이 등이 수묵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수묵화가 먹과 물의 비율로 농담을 표현한다면 낙화는 열기의 정도로 농담을 표현하는 것인데, 한지나 나무 등이 인두에 그슬리면서 나타나는 갈색에서는 먹색과는 또 다른 자연스럽고 소박한 기품이 묻어난다.

 

“낙화를 시작한 지 5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온전히 터득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하면 할수록 농담의 깊이가 켜켜이 쌓여 가는 맛이 있지요. 그 기술적, 예술적 지평이 평생을 다해도 통달할 수 없을 만큼 넓다는 것이 저는 참 좋습니다. 계속 연구할 맛이 난다고 할까요.”

 

김영조 낙화장은 인두를 붓과 같이 능숙하게 사용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한편, 선조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동양화 실력도 쌓아 왔다. 유명 작품을 모사한 김영조 낙화장의 작품을 보면 섬세한 선부터 은근한 농담까지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기술만큼이나 동양화풍을 이해하는 수준도 상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창작 작품의 경우에도 낙화 작업에 들어가기 전 수묵화로 그려 보는 과정을 거치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나간다.

 

02. <낙화 맹호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맹호도(猛虎圖)>를 낙화로 재현한 작품. <맹호도>는 원작자 미상이지만

강세황과 김홍도 합작품인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중 김홍도가 그린 호랑이 부분과 흡사하다.

03. 낙화에서 먹과 붓 역할을 하는 숯불 화로와 인두

04. 김영조 낙화장이 그간 그린 낙화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 공간

 

열정과 인내, 낙화의 길을 열다

낙화는 수묵화와 유사한 점이 많지만, 결정적인 차이도 있다. 공예로서의 가치다. 낙화는 종이, 나무, 가죽 등 폭넓은 바탕 소재를 사용할 수 있는 데다 인공 색을 쓰지 않기 때문에 어느 자리에서든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목재가 주로 쓰이는 건축과 가구부터 부채 같은 소품이나 악기까지, 다양한 전통공예에 더해지는 낙화는 예술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낙화는 표현 방식 면에서도 폭이 넓은 예술이다. 김영조 낙화장은 이인문의 < 강산무진도 > 병풍에 꼬박 1년을 매달렸지만, 단 5분 만에 거친 대로 멋스러운 한 폭의 산수화를 완성할 수도 있다. 속도감 있는 낙화 시연은 전통예술의 변방에 있던 낙화장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 아솔로비엔날레에서 시연할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예술가를 대상으로 하는 비엔날레였는데, 손때 묻은 도구를 들고 시연을 시작할 때만 해도 반응이 냉담했어요. 그런데 빠르게 그림을 완성해 나가니 이목이 집중됐지요. 물감도 없이 어떻게 그런 색 표현이 가능한지 질문 공세가 이어졌고, 인두며 새끼사포, 재 닦아내는 천까지 관심이 쏟아졌어요.”

 

김영조 낙화장이 처음 낙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은 멀다 못해 뜬구름 같은 얘기였다. 하지만 김영조 낙화장은 아직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한다. 한 가지는 전통예술 낙화의 가치를 국내외에 확실히 각인시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열정과 인내 그리고 예술적 자질을 갖춘 후배 낙화장을 많이 키워내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18년간 낙화를 전수해 온 둘째 딸 김유진 씨가 두각을 나타내는 대표 전수자다.

 

“낙화가 인정을 받으려면 우선 좋은 작품을 많이 그려야지요. 국내외에서 꾸준히 전시회도 열 계획입니다. 또 전수자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전수시설도 준비 중입니다.”

 

신규 종목으로 국가무형문화재에 지정된 낙화장이 널리 인정받고 착실히 이어져 우리 전통예술 분야를 넓히는 좋은 사례가 되길 바란다는 김영조 낙화장. 낙화장으로서 또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서 그가 앞으로 열어갈 길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출처 : 글. 김수영 / 사진. 김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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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