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을 울려 나의 목소리를 전하오

북을 울려 나의 목소리를 전하오

 

북을 울려 ~ 나의 목소리를 전하오,  변화와 개혁을 만든 민의의 역사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고려시대까지 백성의 정치 참여는 극히 제한되었다. 소수의 지배계층이 권력을 일방적으로 독점했고, 민의(民意)는 민란 같은 극단적인 방식으로만 표출될 수 있었다. 잦은 민란은 국가의 기반을 흔들고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촉발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국가의 정치는 기존 국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민의의 정치적 역할에 결정적인 변화가 생긴 때는 여말(麗末) 선초(鮮初)로, 민(民)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 정치철학인 유교사상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민의를 품은 정치사상 등장

정치사상으로서 유교가 지향한 사회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회다.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는 하나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명제에 근거한 천인합일론은 유교 정치사상을 설명하는 핵심 이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원리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 즉 ‘호생지덕(好生之德)’을 가리킨다. 인간의 길, 도리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이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또한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살리기를 좋아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 유교에서는 명분(名分)과 민본(民本)을 강조한다. 명분론은 사회계층 사이의 상하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민본론은 피지배층으로서 민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인식이다. 상하의 질서가 유지되어야 혼란이 없고, 민이 나라의 근본이므로 민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명분론은 지배층이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작동해 민본론을 얼마든지 무력화할 수 있었다.

 

01.이제현 초상(李齊賢 肖像) 고려에 성리학을 전파,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이다.

이후 목은이색(1328~1396년), 포은 정몽주(1337~1392년) 등 신흥유신들이 등장해 민본사상을 발전시켰다.

국보 제11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화재청

 

고려시대 이전, 일방적인 권력과 민의 항쟁

유교는 삼국시대에 이미 전래되었지만, 정치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고려시대부터였다. 과거제 시행과 국자감 설치로 유교를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었고 12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북송의 성리학까지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유교는 정치이념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민의를 반영하는 민본정치로 이어지지 않고 오로지 지배 명분만 강조되었다. 예컨대 문종때 정문(鄭文)이라는 인물이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군주는 민의 하늘[君爲民天]’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었다.

 

“만약 만물이 초췌하여 시들면 나는 비와 이슬의 은택을 베풀겠고, 만약 풍속이 완악하고 흉포해지면 나는 우레와 천둥의 노여움을 나타낼 것이다.”

 

문종은 이 글을 보고 몇 번이나 칭찬하고 감탄했다. 여기서 군주는 천과 같은 절대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비록 민을 위해 은택을 베푼다고 하지만 그것은 민을 나라의 근본으로 여기는 정치이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단지 군주의 온정적 ‘시혜’에 불과했다. ‘군주는 민의 하늘’이라는 인식 아래서 군주와 민은 일방적인 지배-피지배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민본정치가 작동하지 않고 민의가 무시되면서 민은 지배층의 폭력적인 수탈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에 12세기 후반부터 전국 각지에서 민의 항쟁이 일어나 고려는 일대 혼란에 휩싸였다.

 

02.『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고려 말 조선 초 문신이며 학자인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이 편찬한 법전서.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적 민본사상이 담겨 있다. 보물 제1924호.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문화재청

03.『홍길동전』(경판본) 1500년 전후 서울 근처에서 활약했던 농민무장대의 지도자 홍길동의 이야기를 소재로

허균(許筠)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국립한글박물관

 

조선 건국, 민의 폭발과 민본주의 국가 등장

장기간의 사회적 혼란을 겪은 후 고려 후기에 이르러, 민의가 정치에 반영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경험한 관료계층 내부에서부터 변화가 나타났다. 이른바 신흥유신(新興儒臣)을 중심으로 민을 새롭게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사회 혼란의 책임은 유교를 배웠음에도 민본정치를 행하지 않은 자신들에게 있음을 스스로 반성했다. 이 자기반성의 결과 민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되었다.

 

“대개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민에 의존한다. 민은 국가의 근본이면서 군주의 하늘이다. … 인군이 된 자가 이 뜻을 안다면 애민하는 바가 지극해야 한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의 이 말은 민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종래 ‘군주는 민의 하늘’이라는 인식이 ‘민은 군주의 하늘’로 역전된 것이다. 이로써 민을 위한 정치는 군주의 시혜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군주의 의무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배층과 민은 일방적 상하 관계에서 상보적(相補的) 관계로 전환되었으며 동포라는 생각까지 등장했다. 민이 지배층에 정치적 실체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새 왕조가 역성혁명을 추진하면서 민본 이념을 표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민본론이 중시되면서 현실 정치에서는 명분론과 충돌이 일어났다. 지배층은 자신들에게만 유교의 도덕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능력이 부족한 민을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의 지배층은 민의가 지배의 명분에 묻히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했다.

 

명분과 민본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양상은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 시행을 둘러싼 대립에서 잘 드러난다. 이 법은 지방민이 수령을 고소할 수 없게 하는 것으로 세종 때 제정되었다. 민이 수령을 고소한다는 것은 마치 신하가 군주를 고소하는 것과 같으니 명분상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 법이 시행된다면 민은 억울한 일이 있어도 하소연할 데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명분을 지키자니 민의가 무시되고, 민의를 따르자니 명분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 법은 15세기 내내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지만,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시기에 부민고소금지법으로 민이 처벌받은 사례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민이 억울한 일을 당해 수령을 고소하면 수령이 처벌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명분 때문에 법이 만들어졌지만, 구체적 사건에서는 이 법을 적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묘책이었다. 이처럼 명분과 민본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조선 초기는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될 수 있었다.

 

04.『속대전(續大典)』1746년(영조 22) 편찬한 법전.  조선조 제1 법전인 『경국대전』을 개정,

증보한 이 법전에서 ‘격쟁’이 정식으로 법제화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05.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환어행렬’ 부분 격쟁은 정조대에 특히 급증했다.

한 차례 능행에서만 100건이 넘을 정도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민본정치의 퇴보와 민의 성장

16세기가 되면서 건국 초의 개혁적 분위기는 점차 퇴색했다. 그 대신 양반 지배체제가 확고해지면서 다시 명분론이 강화되었다. 민본정치가 작동하지 않고 민생이 어려워지자 전국 각지에서는 또다시 민의 저항이 집단적으로 발생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등이 활동했던 시기가 16~17세기였다.  이 시기 민의 대응 방식에서 주목되는 것은 격쟁(擊錚,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징이나 꽹과리를 쳐 임금에게 하소연하던 제도)이 급증했다는 점이다. 격쟁은 민의를 직접 표출하는 것으로, 종래 지배층이 스스로를 경계하며 민의를 수렴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조정에서는 격쟁을 억제하려 했으나 막을 수 없어 결국 18세기에 이르러 법제화했다. 민이 격쟁을 통해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의외로 자신도 지배층과 마찬가지로 충효의 윤리를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가가 알아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도덕의 실천 유무로 구분되었던 지배층과 민의 경계를 허무는 신호였다.

 

민이 유교공동체의 일원으로 지배층과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사를 직접 표출하는 것은 민의의 역사가 도달한 종착점이었다. 이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19세기 이후 한반도에서 민이 주체가 된 변혁의 역사가 전개될 수 있었다. 글. 이석규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