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 건축의 시작과 끝, 한국 부엌 연대기

주거 건축의 시작과 끝, 한국 부엌 연대기

 

 

주거 건축의 시작과 끝, 한국 부엌 연대기 선사시대 화덕자리부터 현대 스마트키친까지 부엌은 집을 구성하는 여러 공간 중에서 가장 먼저 생겨났다. 인류 생존에 필수인 물과 불을 이용해 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으로 생존과 직결되기에 기술의 발달을 가장 민감하게 수용해 변화된 공간이기도 하다. 집 안의 어떤 공간보다도 가시적으로 큰 변화를 겪어 온 우리 부엌의 모습을 살펴 본다.

 

01. 서울 암사동 유적 ⓒ문화재청

 

불이 있는 곳에서 시작해 부뚜막으로 발전

인류 건축의 원형은 구석기시대의 막집이나 움집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심에는 난방과 취사를 위한 불이 있었다.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기의 주거 형태인 움집이나 막집을 보면 대부분 바닥 중앙에 불을 피웠던 화덕자리가 있었다. 화덕 옆에는 토기 항아리를 두고 그 안에 식량이나 취사도구를 보관했다. 물리적인 공간 구분은 없었지만 화덕자리 주변은 부엌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불이 있는 자리에서 부엌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학자에 따라 이견은 있지만, 대체로 ‘불’이라는 의미의 ‘블’과 장소를 의미하는‘억(어긔)’ 또는 땔감을 의미하는 ‘섭’ 등 다른 말이 결합해 ‘부엌’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청동기시대부터는 주거 양식이 움집에서 반움집이나 고상식 주거로 발전했고, 이에 따라 화덕자리가 하나에서 2~3개로 늘어나거나 별도의 저장공간을 만드는 등 부엌이 확대되었다.

 

삼국시대 이후부터 부엌은 일정한 구조와 형태를 지니게 된다. 부엌에 부뚜막을 두고 취사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안북도 운산 용호동 1호 무덤 출토 부뚜막이나 안악 3호분 벽화를 보면 고구려에서 사용했던 부뚜막은 네모난 모양이며, 옆면에는 굴뚝이 달려 있어 취사 전용 도구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상류층은 별도의 난방 도구나 부분적인 구들을 사용했지만, 이미 이 시기부터 서민들은 부뚜막과 온돌이 연결된 형태의 주거지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온돌은 점차 고구려 남쪽으로 전파되어 삼국시대 말기에는 백제에서도 일반적으로 쓰였다.

 

고려시대에 부뚜막과 온돌이 연결되어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하는 가옥 구조가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서민들은 땅에 굴(고래)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흙침상을 사용했다.

 

02.운산 용호동 1호 무덤 출토 부뚜막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환경에 맞춰 다양해진 가옥과 부엌

조선시대에도 ‘부뚜막과 온돌’이라는 난방과 취사의 결합 형태가 유지되었으나, 각 지역의 자연환경에 따라 가옥 내 방과 부엌의 배치가 각기 달랐다. 기후가 한랭한 함경도에서는 ‘정주간’이라 해 부엌과 마루를 구분하지 않는 주거 양식이 나타난다. 현재도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조선 족 가옥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강원도나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서도 부엌과 마루가 구분되지 않는 겹집을 지었다. 이들 가옥은 부엌을 실내 공간으로 편입해 겨울에도 작업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 중부와 남부지역에서는 일자형의 홑집을 지었으며, 부엌은 안방과 벽을 사이에 두고 배치되며 공간도 넓지 않았다. 제주도의 경우 부뚜막이 아닌 돌 세 개를 놓고 그 위에 솥을 걸어서 취사했으며 난방을 위한 아궁이는 별도로 두었다. 조선시대 부엌은 기능적으로 크게 가열공간, 조리공간, 수납공간, 배선공간, 개수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부뚜막은 가열공간이자 도마 등을 올려두고 조리하는 조리공간이었다. 또 찬장이나 시렁을 두어 식재료, 식기, 조리도구를 수납하기도 했고 찬마루를 두어 밥상을 차릴 때 활용했다. 또한 물두멍(항아리)에 식수를 보관하고 개수대를 두고 설거지했다. 이러한 부엌의 구성 요소는 현대에 와서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03.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하이란촌의 정주간(부엌). 2018년 촬영 ⓒ국립민속박물관

04. 제주 민가 부엌 내부(제주민속촌, 2019년). 제주 부엌은 솥이 많고, 방 쪽을 향해서 놓지 않는 특징이 있다. ⓒ이주홍

05. 타일을 붙인 부뚜막(충남 서산, 2019년) ⓒ국립민속박물관    06. 1970년대 오리표씽크 광고 사진 ⓒ(주)에넥스

 

근현대, 부엌 개량의 시대

우리나라의 주거 양식이 전통 한옥에서 본격적으로 서양식 또는 일식 가옥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이후다. 1920년대에는 신생활·신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가정주부를 위해 전통 부엌이 개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지만 가시적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930년대 도시지역에서는 한옥과 일본식·서구식 주택을 절충한 ‘문화주택’이나 ‘개량 한옥’이 건축되었지만, 부엌은 전통적인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본격적인 부엌 개량은 6·2 5전쟁 이후 국가 재건과 생활의 근대화라는 기치와 맞물려 1960~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1960년대부터는 도시지역 가정을 중심으로 연탄 난방을 이용하게 되면서 취사와 난방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엌에는 (연탄)부뚜막이 위치했고, 취사에는 석유풍로를 사용했다. 식수 이용은 공동 우물에서 1960년대 이후 공동 수도로, 다시 현재의 개별 상수도로 발전했다. 농촌에서는 1970~1980년대 새마을운동의 부엌개량사업에 따라 부뚜막에 타일을 붙이고 개수대나 조리대를 설치했다.

 

진정한 입식 부엌을 완성한 것은 스테인리스강 싱크대였다. 스테인리스강 개수대이자 조리대를 의미하는 싱크대는 1970년대 가스레인지와 냉장고 등 부엌 가전제품과 함께 도시의 아파트 부엌을 시작으로 점차 대중화되었고, 여성들이 더는 낮은 부엌 바닥에서 허리를 굽히지 않고도 취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부엌’보다는 ‘주방’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주방은 거실과 구분 없이 개방된 공간이자 식사공간을 겸하는 곳으로서, 특히 ‘신식 설비’를 갖춘 부엌이라는 의미로 널리 쓰였다.

 

석유풍로 ⓒ국립민속박물관

 

시스템키친을 넘어 스마트키친으로

시스템키친은 준비대, 개수대, 조리대, 가열대가 일체화된 조립식 붙박이형 부엌가구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1980년대 등장했으며, 현대의 부엌 역시 여기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남성 가사노동 비율이 증가하면서 남성 혹은 부부가 함께 조리할 수 있는 제품을 출시하는 등의 변화는 있다.

현재 부엌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부엌에서의 가사노동 효율을 높이는 ‘스마트키친’을 지향하고 있다. 실시간 상태를 확인하고 원격 제어가 가능한 전기레인지, 냉장고, 배기후드 등 부엌 가전제품을 중심으로 한 스마트키친 시장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술 발전에 힘입어 가사노동을 최소화하려는 이 같은 움직임은 부엌을 계속 변화시킬 것이다. 글. 이주홍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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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