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하고 장엄한 울림 속에 담겨진 역사의 흔적들

청아하고 장엄한 울림 속에 담겨진 역사의 흔적들

 

"종을 감싸고 있는 안쪽의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침묵을 깨는 것이 타종이다.

고요하던 산사에 타종의식이 거행되면 그 진동으로 응결되어있던 소리들이

용해되어 울려 퍼진다.

진동이 그치면 종소리는 다시 침묵 속에 잠긴다.

현상계에서 다시 궁극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허균-

 

한국 종은 ‘코리안 벨(Korean Bell)이라는 학명이 있을 정도로 세계에서 인정받는 독창적인 양식과 예술성을 갖고 있다. 또한 제작방식에 있어서도 한국종만 갖고 있는 과학적인 요소들로 인해 신비한 소리를 내어 한국종의 소리는 ’영혼을 깨우는 소리, 세상을 밝히는 울림‘으로 표현되고 있다.

본 신문은앞으로 우리의 종에 관하여 특집으로 5차에 걸쳐서 연재 해 보려고 한다.

 

조선 태조 임금은 광주(廣州)에 거둥하여 새로 주조한 종을 보고 제조(是調) 권중화(權中和)에게 상으로 안마(鞍馬: 안장 갖춘 말)를 내려주었다. 임금이 처음에 종을 주조하라고 명하고, 조금 있다가 시가(市街)에 누(樓)를 짓고 권중화와 이염(李活)으로 제조관을 삼았었는데, 염(活)은 성질이 강팍하여 제 마음대로 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아서, 세 번이나 주조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오로지 권중화에게 맡기니, 중화가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청취하고, 또 교묘한 생각을 써서 한 번에 주조하여 만들었다. 임금이 기뻐하여 상을 준 것이다. 광주에서 새로 종이 주조되었으므로 백악과 목멱산에 제사를 지냈다.

 

 

 

경주 선덕대왕 신종과 비천상

 

 

 

상원사 종

 

조선시대 종은 어떠한 존재이기 임금이 이렇게 종에 관심을 쏟았을까? 종이 주조되자 태조는 예문춘추관 학사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종(鐘)의 명(銘)을 지었다. 그 서문(序文)을 보면 종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종(鐘)과 솥[]에 새기는 대업의 기록들

"조선이 천명(天命)을 받은 지 3년에 도읍을 한수(漢水)북쪽에 정하고, 이듬해에 비로소 궁침(宮寢: 궁궐)을 경영하고 그해 여름에 유시(司)에 명하여 큰 종을 주조하여 이미 완성되매, 큰 시가에 누각을 세워서 달았으니, 성공한 것을 새기고 큰 아름다움을 길이 전하자는 것이다. 옛날로부터 국가를 차지한 자가 큰 공을 세우고 큰 업을 세우면 반드시 종과 솥에 새기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소리가 갱갱 굉굉하여 후인(後人)의 이목을 용동(聲動)시키고, 또 통도(通都)와 대읍(大邑) 가운데에서 새벽과 어둘 무렵에 쳐서 인민의 일어나고 쉬는 시한을 엄격하게 하니, 종의 쓸모가 크다. 공경하여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잠저에 계셨을 때로부터 덕망이 날로 높아져서 천명과 인심(人心)의 귀부(歸府)가 저절로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 어진 사람들이 힘쓰고 보좌하여 모두 그 지력을 다해서 하루아침에 고려씨(高麗氏)를 대신하여 차지하고, 소의간식(宵衣旰食)하며 생각을 다하여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베풀어서 자손만대의 태평을 기초하였으니, 공은 세워졌고 업은 정하여졌다고 이를 만하겠다. 이것을 마땅히 새기어 밝게 후대(後來)에 보여야 하겠다. 또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천지의 대덕을 생(生)이라 하고, 성인(聖人)의 대보(大)를 위(位)라고 하는데, 무엇으로 위(位)를 지키는가? 그것은 인(仁)이다. 하였으니, 성인이 천지의 생물지심(生物之心)으로 마음을 삼아서 확충하기 때문에 능히 그 위(位)를 보유(保有)함을 말한 것이니, 이것은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나 그 마음은 한가지인 것이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시는 날에 군사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중외(中外)가 편안하고 조용하여, 백성이 학정에 시달리던 자가 모두 생생(生生)의 낙(樂)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호생(好生)의 덕이 더할 수가 없으므로 이것을 더욱 명(銘)하지 않을 수 없다.”  (태조실록》, 태조 7년 4월 4일)

 

태종은 돈화문 누각에 종을 걸고 예문관 제학 변계량 에게 돈화문 누각의 종명을 짓도록 명하였다. 그 서문에 “우리 전하(태종)께서 마침 제릉(齊陵) 곁에서 여막을 사시다가 일이 급함을 듣고, 곧 오시어 기미에 응해 제재하시고, 드디어 훈친(勳親)이 창의(倡義)하여 추대함으로써 대업을 세우셨습니다. 그 뒤 간신이 다시 난(亂)을 꾸미는 자 있었으나, 우리 전하께서 즉시 평정하여 사직(社稷)을 안전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시니, 덕이 이보다 더 성함이 없고, 나라를 열고 사직을 정하시니 공이 이보다 큼이 없으므로, 진실로 종(鍾)과 정(鼎)에 명(銘)을 새겨 만세에 보이심이 마땅합니다. [...] 이제 또 특명으로 종을 달게 하심으로써 새벽과 밤의 한계를 엄히 하시니, 자강불식하고 서정(庶政)에 부지런히 힘쓰심으로써 만세의 태평에 기초를 잡으신 까닭이 지극하고, 유택(流澤)이 길고 해를 지남이 오래이기에 마땅히 이 종(鍾)과 같이 한없이 내려갈 것은 틀림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보신각종에 새긴 공덕과 충훈

태조는 광주에서 주조한 종을 군사 1300명을 풀어서 종각으로 운반하여 놓고 인정(人定)과 파루에 치도록 하였다. 종각은 운종가 동편에 있던 건물이다. 보통 마루 바닥이 지면에서 높이 떨어진 다락집, 2층으로 되어있어 종루라고도 한다. 인정은 통행금지이다. 매일 밤 이경(二更), 밤10시께 28번 종을 쳐서 성문을 닫게 하여 통행을 금하였다. 28번은 28수(二十八宿, 하늘의 적도를 따라 그 남북에 있는 별들을 28개의 구역으로 구분하여 부른 이름)의 수(數)에 따른 것이다. 오경에는 삼십삼천(三十三天)의 뜻으로 33번을 쳐서 통금을 해제하였다. 이를 파루라 한다. 통행금지를 해제할 시각이 되면 도성 남문인 숭례문에 말과 수레가 많아졌다. 도성의 종은 국난을 당하여 국가와 고락을 함께 하였다. 심수경의 《견한잡록》에는 수난 당한 도성의 종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한양 경복궁, 광화문 위에 큰 종이 있고 종루(鐘樓)에도 큰 종이 있는데, 모두 새벽과 저녁에 울린다. 신덕왕후(태조의 계비 강씨)의 정릉이 돈의문 안에 있고 능 곁에 절이 있었는데, 능을 옮기자 절도 폐지되었으니, 오직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원각사는 도심지에 있었는데, 절이 폐지되 또한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중종 때에 김안로가 정승이 되어 건의하여 두 종을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두고 또한 새벽과 저녁에 울리려고 하다가, 김안로가 죄를 입게 되면서 종을 달지 못하고 수풀 속에 버려둔 지 60여 년이 되었다. 만력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멋대로 불을 지르니, 광화문 종과 종루의 종도 모두 불에 녹게 되었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자, 그해 겨울에 성상이 환도(還都)하였고, 갑오년 가을에는 남대문에 종을 걸어 새벽과 저녁으로 울리게 하니, 그 종소리를 듣는 서울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유년 겨울에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서울에 와서는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 위에 옮겨달도록 명령하였다.”

 

종각은 태조 4년(1395)에 처음 지은 후 네 번이나 불타 없어지고, 여덟 차례에 다시 지었다. 종각은 보신각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고종 32년(1895) 보신각'이란 사액 내린 데서 비롯되었다. 현재의 보신각은 1979년 8월에 서울시가 지은 것으로, 동서 5칸·남북 5칸의 2층 누각이다.

보물 제2호인 보신각종은 조선 세조 14년(1468)에 만들어져 원각사에 있다가, 절이 폐사된 후 광해군 11년(1619)에 현재의 보신각 자리에 옮겨졌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몸통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종을 칠 수 없게 되자, 경복궁 안에 종각을 지어 보관하였다. 보신각에 현재 걸린 종은 1985년 국민의 성금으로 새로 만들어 그 해 광복절에 처음 타종하였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새로 종을 주조할수록 그 이전은 평안하지 못한 시대였다. 종각이 불타 종이 녹는 때 백성은 수백만이 죽어갔다. 한 번 주조한 종을 대대로 울리수록 태평성대였으니, 보신각 종이여! 영원하라.

 

 현재의 보신각 종

 

 

국립중앙박물관 있는 보물2호의 옛 보신각 동종

 

 

광주 금남로에 세워진 민주의 종

 

 

안양 마애종

 

이 마애종은 달아놓은 종을 스님이 치고 있는 장면을 거대한 바위에 묘사한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마애종이다.

사각형의 결구 형식에 쇠사슬로 연결된 종은 음통을 갖춘 비교적 정교한 용뉴 아래에 종신이 연결되어 있다. 종신의 표면에는 상대에 붙어 있는 유곽, 종복에 있는 연화문당좌, 뚜렷하지 못한 문양을 새긴 하대가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공간의 균형감이 있어 보이며, 전체적으로도 안정감이 있는 종을 표현하였다.

이 마애종은 조각수법이나 종뉴.종신의 표현 등에서 신라말 내지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생각되며 마애종의 유일한 예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일부 자료는 정유철님의 글에서 발췌 하였음  - 다음회에 - 편집부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