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 망국 조선의 황녀 죽어 만난 아버지 고종

망국 조선의 황녀, 덕혜옹주 죽어 만난 아버지 고종

 

 

덕혜옹주는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이미 왕실은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였고,  1910년 8월에는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여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순종황제를 이왕, 고종황제를 이태왕으로 격하시켜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덕혜옹주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1912년 5월 25일 덕수궁에서 고종황제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고종황제는 늙은 나이에 얻은 귀한 자식이기에 일개 궁녀였던 덕혜옹주의 생모 양씨에게 ‘복녕당’이라는 칭호와 귀인 첩지를 내리고 후궁 중 가장 많은 봉록을 받게 조치했다.

 

 

1923년경 덕혜옹주

 

1968년부터 1989년까지 덕혜옹주가 기거했던 창덕궁 낙선재

 

1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78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짧지 않은 생을 살았지만, 덕혜옹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단지 추측 할 뿐이다.

 

회갑에 얻은 덕혜옹주를 고종은 끔찍이 귀여워하여, 1916년 덕수궁 안의 즉조당에 유치원을 만들어 5살된 덕혜옹주를 교육시키기 위해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된 담당교사들을 배치하고 풍금 등을 들여와 덕혜옹주와 귀족의 딸 몇몇이 어울려 놀게 조치했다. 나이는 옹주가 제일 어렸지만 학우 모두가 그녀에게 "하옵소서" 체의 극 존칭어를 쓰고 항시 그녀의 수발을 들 궁녀가 곁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니 오직 그녀만을 위한 유치원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만큼이나 옹주도 자애로운 아버지를 좋아해서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덕수궁 유치원시절

 

"나는 아바마마와 조금만 떨어져있어도 많이 보고 싶어요, 어머님(양귀인)은 그렇지 않은데."

하지만 그녀의 생모가 양귀인이 된 것과는 달리 덕혜는 그때까지도 그저 '복녕당 아기씨'일 뿐이었고 세상에 내놓을 떳떳한 작위하나 없었다. 고종은 당장 옹주로 봉하고 싶었지만 일제에 강제 합병 당한 상황이었고 당시 고종에게 하나뿐인 귀여운 딸을 황적에 올리고 공식적인 신분을 줄 힘조차 없었다.

황실이 조선인들의 마음의 구심점이자 상징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항상 가자미눈을 하고 황실을 감시했던 조선 총독부에서 고종이 딸을 얻었음을 모를리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총독부 총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계속 이를 모른 척 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조선인도 일본인과 차별 하지 않는다"는 미명 하에 조선 왕족들을 황적에 올리고 지금 까지도 일본 황실을 관리하는 일본 정부 내의 부서인 궁내청 과 비슷한 성격의 이왕직을 만들어 관리하면서 일본 황족들과 같은 대우를 해 주고 있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이였으므로 그들로서는 덕혜가 황적에 올라 '부양해야할 황족'이 하나 더 느는 것을 전혀 원치 않았다.

게다가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 문제를 떠나서도 옛 황실에 대한 조선인들의 소박한 애정과 충성심을 잘 알고 있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황실의 상징이 될 수 있는 직계 왕족이 느는 것이 몹시 껄끄러운 문제였다.

하지만 그것을 천년만년 모른 척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고종이 직접 데라우치를 끌고 가 유치원에서 노는 덕혜를 보여주며 "저 아이가 내 딸이오. 이제 황적에 올리려 하오." 라고 노골적으로 나오자 데라우치도 어쩔 도리 없이 1917년 여섯살이 되었을 때 야 황적에 오르고 이후 황족들의 토의를 거쳐 비로소 "덕혜"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황실이 망한 뒤 작위의 명칭도 상당부분 바뀌어 그녀를 무엇으로 호칭할 것인가 에 대해서 다소 문제가 있었으나 결국 왕의 서녀에 대한 옛 호칭인 옹주로 최종 결정이 났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덕혜옹주"라는 호칭도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덕혜옹주가 8살 때인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서 사망하였다. 고종의 사후 곧 독살설이 떠돌았고, 3월 3일 고종의 국장일에 맞추어 전국적으로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 봄, 덕혜옹주는 양귀인과 함께 창덕궁 관물헌으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조선총독부는 덕혜옹주의 상징성을 의식하여 그녀를 일본인으로 교육시키고자 하였다. 덕혜옹주는 1920년 관물헌에서 일본인 교사 두 명에게 교육을 받다가, 1921년 4월에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히노데 소학교에 편입하였는데, 그녀가 일본 옷을 입고 일본인 학생 사이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덕혜의 정서에도 커다란 공백이 생기게 된다. 겉으로는 평범하게 일본인 학교였던 히노데(日出)학교를 다니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생활했지만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몹시 보고 싶은" 아버지는 이제 영원히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은 아직 열 살도 안 된 덕혜에게는 무척 잔인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1925년 12세 때 덕혜는 또 다른 오빠인 영친왕 이은의 전철을 밟아 정든 고국을 떠나 일본 정부에 의해 황족 학교인 각슈인(學習院)학교로 강제 유학을 당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일제는 8살 때 일본으로 유학 가서 일본여성과 결혼하였던 이은 황태자의 선례에 따라 덕혜옹주의 미래를 계획하였다. 14살 때인 1925년 4월 덕혜옹주가 일본 옷을 입고 경성 역을 떠나는 모습이 신문에 공개되었다. 덕혜옹주는 오빠 이은 황태자의 집에서 일본 화족들의 딸이 다니는 여자학습원에 다녔으나, 일본인 학생들과 어울리지 않고 고독한 학창생활을 보냈다.

 

1926년 4월 이은 공 부부와 함께 서울로 돌아갔으나,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한 후 6월 10일의 국장에는 참석을 허락받지 못하였다. 순종의 사후 황태자 이은 공이 뒤를 이어 이왕이 되었으나 즉위식은 없었다.

 

「고독 속에 스스로를 가두다」

덕혜옹주는 1927년 순종의 1주기 때에도 1928년 순종의 2주기 때에도 계동의 사가에 살던 어머니 양귀인을 만날 수 없었다. 1929년 6월 5일 양귀인의 장례식에서도, 덕혜옹주는 상복을 입는 것도, 장례행렬에 참가하는 것도 금지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틀 후 일본으로 떠나야 했다. 그 사이에 덕혜옹주의 마음의 병은 깊어져, 1930년 가을부터는 불면증과 등교 거부가 계속되었다. 이때 조발성 치매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사이 일본 정부는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추진하였다. 1931년 3월 덕혜옹주가 여자학습원 본과를 졸업하고, ‘소 다케유키’가 도쿄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그해 5월에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32년 8월에 외동딸 마사에(정혜)가 태어났다.

 

오늘까지도 고종의 죽음은 "독살일 수 있다."는 식의 의문으로 되어 있지만, 최소한 그의 딸인 덕혜는 아버지가 일본 정부에 의해 독살 되었다는 것을 믿었다. 사랑하는 부왕을 죽인 그 나라에, 그것도 막 사춘기 시기에 다 다른 예민한 나이에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와야 하는 덕혜의 심정은 어땠을까? 게다가 모국에서는 생모 양씨가 심상치 않은 병으로 오랫동안 앓고 있는 상태였다. 유방암이었다. 살날이 멀지 않은 어머니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혜는 어머니의 결에서 그녀의 죽음을 준비할 기회조치 박탈당한 상태였다(결국 일본정부는 매몰차게도 어머니양씨가 죽은 뒤에 조선으로 되돌려 보냈고, 이은이 모친 엄비를 잃었을 때와는 달리 양씨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복상조차 치루지 못하게 조치했다)모든 이의 중심이었던 어린 시절은 지나가고, 일본에서는 대부분 그녀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으며, 알아봤자 이미 옛날에 망한 식민지의 공주로나 기억할 뿐이다. 어린 시절의 발발한 의욕이 다 사라진 덕혜는 체육에서나 성적에서나 항상 최 하위권을 맴돌았다. 처음에는 나름 되로 "나도 왕족이다" 하면서 일본 황족들에게 절대 고개 숙이지 않는 조선 왕족의 꿋꿋함을 보여준 덕혜였지만 계속 급우들에게 심한 이지메를 당하면서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상항에 대해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이방자여사 조차 걱정스러워 할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덕혜는 어디 한 곳 하소연 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오빠인 이은은 안 그래도 군인 업무로 바빴을 뿐 아니라 말수도 적고 덕혜와 그리 친하지도 않았다. 이방자 또한 장남 진(晉)을 잃은 뒤로 도통 들어서지 않는 아이 때문에 남모르는 고민으로 정신이 복잡한 상황이었다.

 

결국 1930년, 덕혜 에게는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병명은 조발성 치매증, 소위 말하는 정신분열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덕혜에게 정신병이 있건 말건, 내선일체(內鮮一體 )라는 논리를 들어 일본 황후 구죠사다코(九條節子, 다이소 천왕의 황후로 데이메이 황후로도 알려져 있다. 유약한 남편과 어린나이에 제위를 물려받은 아들 쇼와 천황의 치세 내내 대내외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를 중심으로 조선 왕족들을 일본인과 결혼시키는데 열심이었던 일본 황실에서는 그녀의 강제 결혼을 계획하게 된다. 바로 대마도주 소 다케시 (혹은 소 다케유키 라고도 함. “덕혜옹주의 일대기를 쓴 일본 작가 혼마 아쓰코”는 그의 이름을 '다케유키‘로 기록하였으나 일반적으로 ’다케시‘로 알려져 있다)와의 결혼이었다. 태생이 일본 황족인 마사코 비 조차 분개했을 만큼 일본 황실 멋대로의 억지계획이었다.

 

 

 

 

덕혜옹주의 결혼 생활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는 남편의 학대로 덕혜옹주가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는 설이 오랫동안 있었다. 덕혜의 남편 ‘소 다케시’는 오늘날까지 많은 한국인에게 애꾸눈에 추한 외모를 가진 무식한 인물, 농장주 정도의 천한신분이었으나 덕혜와 강제 결혼시키기 위해 일본 황실에서구색을 갖추느라 백작 작위를 주었으며 덕혜를 강간하고 때리는 몰지각할한 왜놈 정도로 묘시되어왔다. 그러나 실제의 다케시는 이런 이미지와는 정 반대의 인물로, 도쿄대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으로서 교수까지 지낸 교양인 이었고 그림과 작곡도 약간하며 사진에서 보여 지듯이 훤칠한 키에 서구적인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혼마 야스코’씨는 ‘소 다케유키’의 후견인이었던 외할아버지의 노트와 언니의 인터뷰, 소 다케유키가 그린 마사에의 초상화 사진과 시집 등의 자료를 발굴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복원했다. 특히 소 다케유키의 시를 분석하여, 아내 덕혜옹주에 대한 연민, 원망, 체념, 한탄을 읽어냈다. 집안의 특별한 인연 때문에 ‘소 다케유키’ 편들기 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아니면 영원히 어둠속에 묻혀 있었을 부분에 빛을 던진 것은 분명하다.

 

그녀의 결혼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남아 있다. 고종황제가 살아있던 시절, 이미 아들 이은을 일본정부에게 빼앗긴 경험이 있는 고종은 일본이 덕혜까지 일본으로 납치해 가지는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조선 귀족인 김장한(金章漢)과의 약혼을 일본 몰래 계획했다고 한다. 저들이 어쩌건 말건 약혼만 해도 실제 결혼한 것과 매한가지로 쳤던 시대였으므로 이미 약혼 해버렸다 하면 어쩔거냐 싶은 것이 고종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궁중에 일본스파이 들이 파다하게 깔려 있었던 탓에 이 일은 애초에 발각되어 관련자인 김항진이 퇴출되는 등 소동이 일어났다. 게다가 고종이 이 계획을 채 실현시키기도 전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이 일은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고종만큼이나 하나뿐인 여동생을 아꼈던 이복오빠 순종 또한 아버지처럼 비밀 약혼까지 진행시킬 뱃심은 없었어도 일본이 그녀를 데려갈까 염려해 한동안 전족까지 시켰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고종과 순종 모두 덕혜가 일본으로 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고, 일본인과의 결혼조차 막지 못했다.

 

덕혜의 남편 가문인 ‘소’ 집안은 대대로 대마도를 지배해 온 분명한 영주집안으로 대마도정벌을 떠났던 이종무장군에게 사죄를 청했던 당시 대마도주의 이름이 ‘소 사다모리’(宗貞盛 종정성)로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소 가문이 오랫동안 대마도 통치를 한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확실히 ‘소 다케시’가 조선 왕족(비록 이때는 일본에 의해 한 단계 강등되어 이태왕으로 되긴 했지만)의 직계 자손이자 황족인 덕혜와 결혼하기에는 ‘소 다케시’ 가문의 지체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영친왕비 마사코 비도 일본인 이긴 했지만 그녀는 엄연한 일본 왕족 출신이었고 한때 일본 황태자비 후보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그에 비하면 다케시는 그전까지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은 일개 화족이었고, 덕혜와 정략결혼하기 전만 해도 가문으로부터 작위와 함께 물려받은 거액의 빚들 때문에 상당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다만 그의 고모 카즈코(和子)가 구조 공작이자 사다코 황후의 아버지인 구조 미치타카(九條道孝)에게 시집가 황후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것이 이 젊은 섬 백작이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였다. 덕혜와 결혼하는 것도 실은 그저 가문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조선 왕실로서는 하나뿐인 황녀가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도 속상한데 지체까지 변변치 못한 백작에게 시집가는 것이 그저 원통할 뿐 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이런 원통과는 별개로 신혼생활동안 덕혜는 아버지 고종에게서 그렇듯이 사랑받는다는 것을 다시 느꼈던 듯하다. 오히려 병세가 크게 호전되어 약 1년 간 거의 정상인이나 다름없는 나날을 보냈다. 이후 사진 속에서 조차 거의 웃음을 짓지 않던 덕혜가 위의 신혼 여행사진에서는 활짝 웃고 있는 것을 보면 초기의 결혼생활은 꽤 행복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대마도의 영주 집안이었지만 다케시의 학업을 위해 지냈던 도쿄 저택에서 그녀는 외동딸 마사에(正惠한국명 정혜)도 얻었다. 그러나 마사에가 태어난 직후 다시 정신병이 재발하면서, 덕혜는 다시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최근까지도 그렇지만 당시, 그것도 황실출신의 귀족가문에서 정신병이란 굉장한 가십거리이자 창피한 일이어서 다케시는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그러한 덕혜를 집안 깊숙한 곳에 가두는 것을 선택했다. 자꾸 한밤중에 집 밖으로 뛰쳐나가려 하는 옹주를 붙들어 두기 위해 족쇄를 채우는 일도 가끔 있었다.

 

그저 환자들을 축 늘여놓고 전기 충격이나 가하는 정도의 수준에 그쳤던 당시의 낙후적인 정신과 치료를 생각 볼 때 설령 의사에게 보이거 나 병원에 입원 시켰다고 해서 그녀의 병이 호전되지는 않았겠지만, 다케시의 선택은 안 그래도 그를 달갑게 보지 않았던 조선인들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킬 여지가 있는 행동이었다. 그가 덕혜를 가두자 곧 황실을 둘러싼 조선에서는 그가 덕혜를 가두어놓고 매일 때린다드니 옹주는 남편이 너무 무서워서 이불속에 고양이처럼 누워만 있다느니 하는 식의 소문이 또다시 퍼졌다.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딸 미사에가 정상적으로 성장했을 리는 만무하다. 한창 태평양 전쟁을 겪

으며 황실도 어려움을 겪던 시절 마시에를 직접 보았던 기록에 따르면 마시에는 매우 마르고 무척 우울한 표정의 소녀였다고 전해진다. 당시는 담장이나 저택의 귀퉁이가 상해도 수리를 못하고, 하인을 거의 두지 못해 귀족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마시에가 직접 불을 피우고 차를 끓이는 등의 잡일을 해야 했을 정도로 소 가문의 형편이 많이 어려워진 상황 이었다. 운동량이 전혀 없는 덕혜를 위해 가끔씩 오는 안마사를 제외하면 덕혜를 돌 볼 간병인조차 고용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마사에는 어머니의 병수발도 해야 했다. 하루 종일 멍하니 않아 있다 가끔 히스테리를 부리는 어머니 덕혜에게서 거의 애정을 받지 못한 그녀는 어머니 보다는 아버지인 다케시를 훨신 좋아했고, 어머니에 더해서는 애정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다케시도 딸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듯 마사에를 많이 아껴서 직접 딸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고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덕혜옹주의 외동딸 마사에(正惠)

 

열여덟은 커녕 멀쩡히 이십대가 되어 와세다 대학에 진학한 마사에는 집안에서 얻지 못한 행복을 결혼을 통해 얻고자 했다. 아직 졸업도 안한 학부생의 신분으로 연애 끝에 스즈키(鈴木)라는 일본인과 결혼을 강행한 것이다. 스즈키는 귀족 출신도 아닌 평민이었으므로 다케시는 미덥지 않게 여겼지만 딸이 소(宗)씨 성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결혼을 수락했다. 그러니 일 년도 못가 마사에는 돌연 “자살 하겠다”는 의문의 유서를 남기고 사라지고, 남편 스즈키와 아버지 다케시 등 가족들의 애타는 수색 작업에도 불구하고 변사체로 산에서 발견되었다. 마사에가 불행한 삶을 산 것과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것은 사실이지만(정말 자살이 아니라 타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해탄에 빠져 죽었다든가 가문 사람들에게 살해당했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딸을 잃은 덕혜는 결국 정신 병원에 들어가고, 1959년 다케시와 정식으로 이혼하였다. 황태후 사다코의 강한 의지로 강제 결혼해야 했던 한국인, 일본인 귀족부부들이 마침 황태후 사다코의 사망으로 많이 헤어졌던 시기였다. 덕혜부부도 예외는 아니어서 후원자였던 황태후 사다코가 죽자 다케시도 말뿐이었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그 후 다시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교수기 되어 조용히 살다가 사망하게 된다.

 

 

 

그렇게 사라졌던 덕혜가 다시 세상으로 나온 것은 1962년 오빠 영친왕 부부와 한국으로 귀국하면서였다. 그때까지 영친왕을 비롯한 일본의 옛 조선황족들은 자신을 황족으로 착각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일본에 끌려 와 있던 조선황족들을 위험요소로 여겼던 이승만의 고의적인 방해로 받아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전주이씨 양녕대군파였던 이승만은 자신의 혈통에 대한 지나친 프라이드를 주체하질 못해 일각에서는 명함조차 Prince Lee로 인쇄하여 다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정권이 망하고, 5.16혁명으로 막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박정희에게 일본의 조선황족들은 끈질기게 접촉을 시도한 끝에 박정희 대통령이 일종의 선심정책으로 옛 황족들의 입국을 허락하면서 마침내 덕혜옹주 역시 정신 병원에서 풀려나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조차 고종의 직계인 영친왕까지는 알았지만, 덕혜옹주에 대해서는 “그런 분이 있었냐”고 되물을 만큼 그녀는 잊혀진 존재였다.

 

귀국 직후 낙선재(樂善齋)에서 순정효왕후(대한제국 순종의 황후) 윤씨 에게 문안을 드릴 땐 모로 꺾어 절하는 등의 궁중 예법을 많이 기억하고 있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는 하지만, 오랜 감금과 정신병원 생활로 덕혜의 정신은 황페 해질 정도로 황페 해져 말도 제대로 못하고, 주변 상황에 대해 거의 무감각해 병세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으로 생활은 궁핍하진 않았지만 계속 입원과 낙선재를 오가는 생활이 계속되어 낙선재에서도 거의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멍하니 방구석에 않아 있거나 가끔씩 혼자 화투를 치는 정도였다. 호적 또한 1982년에야 그나마 이덕혜(李德惠)가 아닌 어머니의 성을 딴 (梁德惠)로 어렵게 만들어졌다.

 

결국 덕혜옹주는 시대가 만든 비극으로 점철된 삶을 마치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洪陵)한 쪽에 묻혀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버지와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1989년 4월 21일 에서였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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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