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죽음을 앞두고 삶의 회한의 바람을 전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

 

문무왕, 죽음을 앞둔 회한과 바람

 

문무왕은 신라 제30대 왕으로서 ,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무열왕의 맏아들이며, 외삼촌인 명장 김유신과  함께 백제, 고구려를멸망시키고 중국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으며 661~681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다..

신라 30대 문무왕 20년(681). 삼국통일의 대원을 달성한 문무왕(재위 661∼681)과 당대 고승 지의대사(생몰년 미상)가 경주 궁궐 안 뜰을 거닐며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은 국가 대소사에서 시정의 서민 물정은 물론 불교 교리의 법담(法談)까지 허물없이 나누는 절친한 사이였다.

 

 

 

 

01. 경주시 통일전에 있는 문무왕 표준영정

02. 경주 문무대왕릉은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이다.

 

문무왕이 지의에게 말했다.  “대사, 짐은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으로 환생해 불법을 높이 받들며 나라를 지키고 싶소이다.” 지의는 깜짝 놀랐다.  비록 나라를 지키겠다는 왕심은 알겠으나 용은 육도(六道: 천상도, 인간도, 아수라도, 축생도, 아귀도, 지옥도)의 윤회 가운데 인간 세계보다 낮은 축생도가 아니던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벗어나려는 업장소멸을 위한 구렁텅이다.  “성상이시여, 금상의 옥체가 이리도 안온하시온데 이 어이 참담한 옥음이시옵니까?”  “짐은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되었소. 만약 추한 인과응보로 축생도를 떠돈다 해도 나는 용으로 다시 태어나 나라를 지킬 것이오. 나 죽은 뒤의 국가 안위가 근심돼 잠을 이룰 수가 없소이다.”

 

죽음을 직감했을 때 사람은 누구나 진솔해지고 회한이 앞서기 마련이다.  문무왕도 그랬다.  불현듯 왕위에 있었던 지난 20년 세월이 한순간으로 스치면서 바로 어제의 일처럼 되살아났다.  외교술에 뛰어났던 아버지(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용맹무쌍한 외삼촌(김유신 장군)을 따라 숱한 전쟁터를 누비며 얼마나 많은 병사들과 무고한 인명들을 살상했던가.  피아(彼我)를 떠나 그들 모두 소중한 생명이었는데 전쟁을 구실로 무참히 죽이다니…. 돌이켜보니 지난(至難)한 일생이었다.

 

문무왕은 신라 왕족과 가야 왕족 사이에 태어난 통일신라 최초의 혼혈 왕이다.  아버지 김춘추(603∼661)는 폐위된 25대 진지왕의 손자였다.  왕위에 오를 성골(聖骨:부모 모두 왕족인 혈통) 신분이 아니었으나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알천의 양보로 임금이 되었다.

 

문무왕의 어머니 문명부인은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으로 이름은 문희다.  김유신의 주선으로 김춘추와 결혼한 뒤 왕후가 되었고 아들 법민, 인문 등 5형제와 딸 지소를 두었다.  이 중 장남 법민이 문무왕이다.  문희가 언니 보희의 꿈을 사 왕비가 된 일화는 유명하다.

 

문무왕의 외할아버지(김서현)는 멸망한 가야국 왕자였고 외할머니(만명부인)는 만호부인(26대 진평왕의 어머니)의 딸이다.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2남(김유신 흠순) 2녀(보희, 문희)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가야 혈통으로 왕위를 잇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신분 상승을 위한 김유신의 자구책이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태자(654년 책봉) 시절부터 영특하고 무인 기질이 넘쳤다고 한다.  백제와 고구려 전쟁에 참전해 적군 장수와 병사들의 목을 수없이 베었다. 당나라 군대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660)시킬 때는 무열왕을 대신해 신라군을 지휘했다.  661년 7월 무열왕이 승하한 뒤 왕위에 올라서도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다.

 

나당연합군의 총공세로 고구려를 멸망(668)시킨 뒤에는 우군이었던 당나라와 싸워야 했다.  당의 참전 대가로 고구려 옛 영토인 대동강 이북 땅을 내주었건만 당은 신라까지 차지하겠다며 요소요소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물러가지 않았다.  문무왕은 국운을 건 필사의 전쟁으로 끝내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룬 것이다.

 

문무왕의 무덤, 이승과 소통하는 공간

 

문무왕은 지의대사에게 죽어서 용이 되고 싶다는 말을 남긴 뒤 머지않아 중병에 들어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7월 1일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태자 정명과 신료들이 왕의 임종을 지키며 유언을 들었다.  “태자는 듣거라. 나는 마침 국운이 어지럽고 전쟁하는 시대를 만나 서쪽(백제)을 정벌하고 북쪽(고구려)을 토벌하여 강토를 평정했다.  반역한 자를 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는데 어찌 그것이 내 본심이었겠느냐. 그 러나 아직도 강역은 온전히 제압되지 않아 국운이 여전히 위태롭구나.  내가 죽은 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함이니 절명 뒤 열흘이 되거든 불교 의식에 따라 화장해 동해 바다에 장사토록 하라.” 잠시 후 기척이 없어 살피니 왕은 이미 숨져 있었다.  재위 20년 1개월 만이었다. 태자가 7일 뒤 왕위에 오르니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이다.  지의는 문무왕과 나눴던 생전의 대화내용을 신문왕에게 남김없이 전했다.  부왕의 시호(諡號: 사후 공덕을 치하해 올리는 호)를 문무(文武)라 지어 올리고 궁궐 밖에서 시신을 화장했다.

 

신라 백성들은 경악했다. 삼국을 통일해 영토를 넓힌 위대한 임금을 왕릉으로 조성해 매장하지 않고 불에 태워 바다에 산골(散骨)한단 말인가.  당시는 이차돈(506∼527)의 순교로 신라에 불교가 공인(528)된 지 153년째 되던 해로 화장은 주로 불교에서 시행하는 장법이었다.  신문왕은 화장한 부왕의 유골을 수습해 동해의 수중 바위 안에 장사지냈다 . 사람들은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용이 되어 물리치겠다는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바위를 대왕암 또는 문무대왕 수중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왕암은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육지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바다에 있다.  1967년 7월 24일 사적 제158호로 지정된 경주 문무대왕릉(대왕암)의 구조는 매우 기이하다.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싼 중앙에는 인공으로 다듬어 배치한 듯한 장방형의 대석(大石)이 덮여있다.  바위 밖에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물길이 나있어 동에서 들어온 물이 서로 빠진다. 불교계에서는 대왕암의 네 방향 수로를 석가모니 사리를 안치한 초기 불교의 사리탑 형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경주 감은사지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업을 세우고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지은 절이다

 

경주 문무대왕릉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신문왕은 바다에서 1.5km 떨어진 해변에 사찰을 건립하고 부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은사(感恩寺)라 했다.  절의 금당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도록 설계해 용이 된 부왕의 접근이 쉽도록 배려했다.  대왕암은 감은사의 안산(남주작)격이어서 풍수지리상으로도 명당에 해당된다.  절 동쪽에는 용이 나타난 것을 보고 지었다는 이견대(利見臺)가 대왕암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동안 일반인은 물론 고고학계에서도 대왕암의 안치방법과 유골의 수장 여부에 대해 많은 의문점을 제기해 왔다.  2001년 3월 한 방송사에서 초음파 탐지기를 동원해 바위 내부와 수면 아래를 정밀 탐사한 적이 있다.  당시 1천 320년이 지난 짠 물속의 수중릉에서 부장품이 발견될 리는 만무했다.  세계 최초의 수중왕릉인 문무왕의 대왕암에 관해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서도 정사로 인식되고 있다.

 

문무왕은 자신이 성취한 삼국통일이 뒷날의 권력 다툼이나 국방 소홀로 영토를 다시 잃을까 노심초사했다.  신문왕 2년(682)에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란 신령스러운 피리를 내려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마다 불면 우환이 사라지게 했다.  그는 인간의 죽음을 산 자와의 영원한 단절로 보지 않았다.  무덤 또한 이승과 저승을 가로막는 막힘의 공간으로 여기지 않았고 죽은 영혼의 의지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이승과 소통할 수 있음을 믿었다.

 

천년 사직의 56대 신라 임금 중 문무왕만큼 뼛속 깊이 나라를 사랑하고 호국정신에 투철했던 왕이 과연 누구였을런가.

 

인간에게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사람은 영물(物)이어서 자기가 죽을 때를 신비한 감(感)으로 알아차린다고 한다. 그것이 비록 자연사가 아닌

사고에 의한 돌발적 죽음이라 하더라도 자신만은 미리 어떤 징후를 통해 감지한다는 것이다.

유시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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