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깊은 곳에 꼭꼭 숨은 부처를 찾아서

마음 속 숨은 부처를 찾는 곳  

포교도량 禪寺 문경 김용사(金龍寺)

 

문경군 산양면에 있는 김용사는 활불(活佛)이라 불리던 퇴옹당 성철 스님을 비롯해 당대 최고의 선승이라 불리던 서암, 서옹, 법전 스님이 한때 이곳에 머물렀다. 한국 불교의 거대한 산맥이 이곳에서 싹을 틔워 소백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번져나간 것이다. 31본산 시절 김용사는 인근 40여 개의 사찰을 관리하는 본사로, 영남의 대찰 중 하나였다. 김용사에 있던 경흥강원은 그 크기부터 엄청났다. 강원이 들어서 있던 건물은 설선당. 한꺼번에 3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국내 최대의 온돌방임을 자랑했다. 불을 넣는 아궁이는 초등학생이 걸어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컸고, 한 번 불을 들일 때 들어가는 나무만 해도 지게로 몇 짐씩이나 들어갔다

 

 

일주문의 이름은 홍하문(紅霞門)이며, 뒤면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일주문의 주련의 글씨가 무척 인상적이다.  - ‘세속의 번뇌 마음 비우라’ -

入此門來莫存知解  입차문래막존지해  無解空器大道成滿  무해공기대도성만

이 문을 들어오거든 알음알이를 피우지 말라. 알음알이 없는 빈 그릇이 큰 도를 이루리라.

 

김용사(金龍寺)는 신라 제26대 진평왕 10년(서기 588년)에 운달(雲達)조사가 창건했다. 임진왜란 때는 완전히 불타는 비운을 맞았으나 인조 2년(1649)에 혜총선사가 중건했다. 48동의 건물과 14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할만큼 규모가 컸던 김용사는 지금도 규모면에서나 역사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찰이다. 일주문의 주련은 이 사찰이 선·교에 치우치지 않은 수행도량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우선 사찰을 들어설 때는 세속에서의 지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찰은 무엇을 채우러 오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러 오는 곳이란 뜻이다. 사찰이 수행도량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비워냄’의 공부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비우지 못하여 넘쳐나는 것은 번뇌요 망상일 뿐이다. 그래서 일주문의 의미는 각별하다.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선이 바로 일주문이다. 번뇌의 세계와 그 번뇌를 씻어 맑고 맑은 자성(自性)을 찾는 세계 사이에 선 문이 바로 일주문이다.

 

천왕문의 주련

 

 - 사바세계 수호하는 사천왕 -

四大天王威勢雄 (사대천왕위세웅)  護世巡遊處處通 (호세순유처처통)

從善有情貽福蔭 (종선유정이복음) 罰惡群品賜災隆 (벌악군품사재륭)

사대천왕의 위엄 크고도 웅장하여라 온 세상을 지키시고 모든 곳에 나투시며,

세상 사람 착한 일엔 복을 주고, 악한 무리에게 벌을 주어 재앙을 내리도다.

 

천왕문은 사천왕문을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사천왕문은 글자 그대로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문이란 뜻이다 사천왕은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수호신장들이며 각각의 이름과 들고 있는 물건들이 다르다.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칼을 쥐고 있으며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은 탑을 들고 있다.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용을 잡고 있으며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비파를 들고 있다.

이렇게 사방을 수호하는 신왕들 대신 금강역사상을 조성해 금강문의 역할로도 사용하지만, 대개 금강문은 천왕문에 이르기전에 따로 세우는 것이 관례다. 금강문은 금강역사들을 모신 문이다. 어쨌거나 천왕문은 사찰 경내가 그만큼 신성하고 엄숙하다는 것을 표방하는 역할을 하는 문이다. 또 사바세계에서 갖고 온 번뇌망상과 탐욕, 분노 등을 모두 사천왕에게 조복 받고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서라는 경계의 뜻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천왕은 다만 사찰의 파수꾼이 아니라 인간세계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선(善)의 수호신장이란 뜻이 이 주련에는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다분히 권선징악의 논리에 부합된 이 싯귀는 천왕문을 지나며 새기는 순간마다 속진의 번뇌가 씻어질 것 같은 매력을 주고 있기도 하다.

 

천왕문을 들어서자 맞은편 오른쪽에 보이는 요사체.

 

요사체의 주련 

刹塵心念可數知 (찰진심념가수지)  大海中水可飮盡 (대해중수가음진)

虛空可量風可繫 (허공가량풍가계)  無能盡說佛功德 (무능진설불공덕)

세상 티끌 모두가 세어 알 수 있고, 가없는 바닷물을 모두 마셔버릴 수도 있고, 허공을 헤아리고 바람도 붙잡아 맬 수 있어도,부처님 공덕만은 능히 다 말할 수 없네

 

요사란 절의 대중들이 함께 공양(식사)을 하거나 잠자거나 일을 하는 등의 대중적 처소로 쓰이는 집이다. 김용사의 요사도 이런 대체적인 관례에 따라 사용되고 있는데 그 주련의 내용은 매우 인상적이다.

부처님의 공덕이 무엇보다 큰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단지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일들의 가능성을 잔뜩 예로 들고난 후에 부처님의 공덕을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맺고 있다. 어쩌면 매우 장황한 설명에 극도로 단정적인 결론을 갖고 있는 것이 이 주련 내용의 참맛이기도 하다.

 

절에 가보면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전각당우(殿閣堂宇)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상을 모신 금당인 법당을 비롯하여 금당과 대칭되는 곳에 자리한 누각, 그리고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 등 다양한 기능의 건물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그런데 건물들을 자세히 보면 그 하나하나의 기능과 용도가 다 다르고 또 격에 차이가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건물마다 고유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건물의 의미를 단박에 알 수 있도록 하였는데, 직사각형 나무판자에 건물의 이름을 적은 것을 바로 편액(扁額)이라고 한다.편액은 말하자면 집의 문패와 마찬가지라서 편액만 보고서도 그 건물의 기능과 어느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편액을 중요시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걸린 건물의 성격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 있다.

 

 

 

 

 

 

 

 

 

석제루 ,설선당, 대웅전의 기와線

 

대웅전의 풍경.운달산(雲達山)자락이 멀리 보인다.

 

유명한 김용사의 후불탱화

 

이날 직접 볼 수가 없어 다른 곳의 사진을 퍼왔다.    

괘불은 옥외에서 법회를 행할 때에 밖에 내다 걸 수 있게 만든 걸개 그림으로, 임진왜란 이후 많은 사찰이 복원되면서 괘불 제작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김용사 대웅전에 보존되어 있는 이 괘불은 중앙의 본존불을 화폭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표현하였고, 그 아래쪽에 2구의 보살과 사천왕을 배치하였다. 사천왕 뒤쪽으로는 다시 6구의 보살을 일렬로 배치하고 본존불의 머리 좌우로 5구씩의 십대제자를 그려 넣었으며, 보살상의 외곽에 인왕과 팔부중 등을 배치하였다. 외곽의 괘선 밖에는 범(梵:불교문자)자를 원 속에 써서 배열하고 있다. 화폭의 아래에는 그림의 제작 동기와 그 시기를 적은 29줄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이 괘불은 숙종 29년(1703)에 상주 북면에 위치한 운달산 운봉사의 괘불로 처음 만들어졌다 한다. 이곳 김용사로 옮긴 과정은 알 수 없으며 다만 운달산과 김용사가 상주의 관할 아래 있었다는 사실만이『성주읍지』에 나타나 있다. 거대하면서도, 비교적 섬세하고 다양한 선을 사용하여 돋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대웅전을 바라보며 왼쪽에 있는 스님들의 거처인 해운암(海雲庵), 대강당인 설선당(設禪堂), 김용사 대강당인 설선당 기둥의 주련 끝 부분에 큰 흰판에 쓴 글씨가 눈에 확 뜨인다. 

시심마(是甚麽)란 휘호가 서각되어 있는데, 시심마(是甚麽)란 유명한 '이 뭐꼬'라는 말의 한자어로 선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공안(公案)을 이르는 말로 인생의 모든 생활 현상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써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시심마是甚麽> ― 이것은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지우고, 사념(思念)을 지우고,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분별을 거두고, 무심의 마음으로, 텅빈 마음으로 돌아가 사물의 모든 경계에 대한 마음의 울림을 듣는 것이 시심마의 의미다. 치열한 자기 물음으로 도에 이르려는 선승의 서릿발 같은 결의가 이 글에 담겨 있는 듯하다.

 

설선당의 한 부분에 특이한 편액을 발견했다.

일반 사찰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된 "응향각(凝香閣)"이다. 凝香閣...향기가 엉긴다....

 

석제루의 주련과 단청

 

상선원(上禪院)은 스님들의 참선도량이다.

 

 상선원의 주련 - 영인이 되어 진리의 노래 부르네 -

최殘枯木依寒林 (최잔고목의한림)  幾度逢春不變心 (기도봉춘불변심)

樵客過之猶不顧 (초객과지유불고) 영人那得苦追審 (영인나득고추심)

꺾어진 고목이 찬 숲을 의지하고, 몇번이나 봄을 만나도 그 마음 변치않네, 나무꾼 지나쳐도 돌아보고 그냥가니, 영인이 와서 그 고난을 살펴 노래하네.

 

김용사 상선원은 선방이다. 스님들이 불성을 깨닫기 위해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는 수행방인 것이다. 이 상선원에서는 현대의 최고승인 성철스님도 꽤 오래 선수행을 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선방은 앞쪽 기둥에 붙은 이 주련이 있으므로 해서 더욱 그윽한 선수행 도량의 풍치를 말해 준다. 그러나 그 죽어간 나무의 소외된 마음을 한낱 ‘영인(노래를 잘하는 사람)’만 관심을 갖고 노래를 부른다. 어찌 보면 매우 평상적인 구절 이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진리가 이 주련의 내용 속에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외된 진실’의 문제다. 표현은 꺾어진 고목등걸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진리의 세계’를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이 외면된 사회, 각종 거짓이 득세를 하는 세상, 세월이 흘러가도 그 악의 순환은 그침이 없다. 소외된 진실, 그 맑은 진리의 묘체를 깨달아 이 사회에 전해 줄 ‘영인’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김용사 상선원에서 참선수행에 몰입하는 수좌들이 종내에는 ‘영인’이 되어 진리의 노래를 부를 것임을 믿는다

 

 

 

 

 

명부전에서 바라본 김용사 전각들. 제일 앞의 요사체를 비롯한,석제루,해운암,설선당,대웅전.

자료출처 : 김정대 선생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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