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하루만 문을 여는 봉암사2

일년에 하루만 문을 여는 봉암사2

 

금색전(金色殿)이란 금색인(金色人)을 모시는 집이며, 금색인이란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금색전(金色殿) 주련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무여불)  천상천하 어느 곳에도 부처님 같은 분 없나니

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역무비)  시방세계에도 비교할 데 없네

世間所有我盡見 (세간소유아진견)  세상 천지 내가 다 보아도

日切無有如佛者 (일체무유여불자)  부처님같이 귀하신 분 없도다.

 

금색전은 1955년에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세운 전각이다.  금색전 뒷면 현판의 글씨는 대웅전이다. 봉암사의 본래 대웅전이 금색전 이었으며,  아마도 지증대사가 이 자리에 첫 전각을 세우지 않았을까.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에 겹처마로 지은 금색전은 치밀하고도 화려한 단청으로 장엄되었다.

기둥과 기둥을 잇는 창방 위에는 평방이 있다.

 

 

이 평방의 상단에는 다포식 공포와 공포사이의 공간에 수인(手印)을 달리하는 9품의 여래상을 모셔 놓았다.

별도의 닫집은 없으나 후불탱화에 그려진 천개(天蓋)가 부처님의 지위와 권능을 상징하고 있다. 불상 전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수염을 휘날리며 호위하고 있고, 들보 위에는 지혜의 문수보살과 실천행의 보현보살을 상징하는 코끼리와 사자가 올라 앉아 있다.  

 

금색전에는 통견차림으로 지권인을 한 화엄경의 교주이신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어느 자료에는 이 곳 봉암사 금색전에 문경 대승사 극락전의 관음보살입상을 옮겨와 모셨다고 하는데, 이 자료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곳의 비로자나불은 최근에 다시 모셔진 부처님이란 것을 알 수 있다.

 

獲是地也 庸非天乎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

不爲靑衲之居 其作黃巾之窟 수행승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 라고 하며 지증대사가 대중을 이끌고 와서 절터의 畫龍點睛(화룡점정)으로 삼은 곳이 바로 이 금색전이다.

 

금색전의 단청

 

도적의 소굴이 될 수 있을 만큼 기가 센 이 터의 비보책(裨補策)으로 지증대사는 네 개의 처마기둥을 세워 터를 누르고 두구의 철불(鐵佛) 모셨다고 하며, 그중 1구가 땅에 묻혀 있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 이는 터의 결함을 보완하여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맞추려는데 있다.  실제로 금색전 근처에 몇 년전에 파괴된 철조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하니, 초창기에는 금색전 자리에 금당이 있었지 않았을까.. 신라시  하대에는 철불들이 많이 모셔져 한 시대 특성을 이룬 만큼 구산선문의 하나인 이곳에도 당연히 철불이 모셔졌던 것이다.  창건주 지증대사와 풍수도참설로 유명한 도선(道詵)국사가 같은 시대의 인물들이니, 이러한 풍수비보는 당시의 사찰에서는 널리 행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심충(沈忠)이란 사람의 청으로 지증대사는 현 봉암사 자리에 절을 세우기로 마음 먹고  그 자리에 있던 큰 못을 메우려고 하는데 큰 용(龍)이 살고 있는지라, 지증대사는 신통력으로  그 용을 구룡봉(九龍峰)으로 쫓아 버리고 땅을 매립하여 그 자리에 봉암사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것이 곧 금색전이란 추측이다.    

        

1955년 신축하면서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의 현판을 왜 금색전이라 했을까...

삼신불이 각기 별도의 부처님들이 아니긴 하나, 대적광전이나 화엄전, 비로전으로 당호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품어본 의문이다. 

 

금색전 앞 마당에는 금색전, 희양산과 일축을 이루는 균형잡힌 삼층석탑이 고고히 서있다.

봉암사 경내의 유일한 석탑이다,

 

봉암련(鳳巖蓮)의 꽃술 봉암사 삼층석탑

 

봉암사 삼층석탑(鳳巖寺 三層石塔) 보물 제169호

이 탑은 단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륜부(相輪部)로 구성되어 있어 이중기단(二重基壇)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시대의 일반 석탑과는 차이가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지붕돌의 비례와 균형이 조화되어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상륜부는 보존 상태가 완벽하므로 한국 석탑 중에서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 탑의 높이는 6.31m이고, 그 중 상륜부의 높이는 2.38m이며, 지대석의 너비는 3.24m이다. 옥개의 층급받침은 각 층이 모두 5단으로 구성되었다.

조성시기는 9세기로 추정되고있다.

 

 

 

탑 상륜부의 구조는 아래로부터 인도 탑의 기단에 속하는 노반→반구형인 복발 →수미산 정상의 천계를 상징

하는 꽃잎을 벌려놓은 듯한 앙화→신들의 세계인 33천을 상징하는 바퀴 모양의 테 장식인 보륜→인도의 귀족계층이 쓰던 우산과 비슷한 보개→불꽃 모양의 수연→구슬 모양의 용차,보주→중심을 뚫고 세운 철심인 찰주 순서로 되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남쪽 구석진 곳에 국보로 지정된 웅장하고 잘 생긴 고선사 석탑을 볼 수 있다. 이 고선사 석탑은 상륜부의 노반, 복발, 앙화만 남아있어 아쉬움이 크다.  만약 고선사 석탑의 상륜부가 이 곳 봉암사 3층 석탑의 상륜부처럼 온전했다면 경주박물관구석진 곳에서 사람들의 눈길로 부터 멀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가 모두 온전한 탑은 실로 찾아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목수현 직지성보박물관 객원연구원의 봉암사 삼층석탑에 대한 설명이다.

"상륜부까지 제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는 석탑이 드문 가운데 이 봉암사 석탑은 비교적 단아한 자태를 잃지 않고 있다. 상륜부까지 전체 높이가 6.3m에 이르니 산사의 탑치고는 규모가 대단한 편이다. 각 층의 비례도 매우 조화롭고,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5단이나 되어 규범을 잃지 않았는데 그 지붕면 곡선은 매우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보통 탑들의 기단이 대개 2층인데 비해 문경지방의 탑들은 기단이 단층인 점이 좀 톡특하다. 봉암사 삼층석탑은 석가탑과 닮은 모습으로 비례도 아름다워 봉암사 창건 당시에 세운 것이리라는 짐작도 있고, 상륜부 보개의 귀마다에 연꽃이 조각된 귀꽃으로 새긴 점이 고려시대에 유행하는 석조부도의 지붕과 비슷하다고 보아 그보다 늦은 고려 초에 조성되지 않았나 하고 여기지기도 한다. 탑을 세우는데 들인 공이 대단했다는 점에서나, 탑이 지니고 있는 나이로 보나, 또 그 아름다움으로 보나 눈에 꽉찬다. 탑 앞쪽에 배례석까지 있으니 이 석탑은 갖출 것은 다 갖춘 셈이다. 배례석은 앞면에 둘, 옆면에 하나씩 안상을 새겨 장식하였다."

 

반야용선(般若龍船의 돛대

 

이 멋있는 탑을 돛대로 달고 대웅보전 뒤에 있는 굵은 소나무 한 가지를 삿대로 만든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극락정토 구품연지(九品蓮池)를 건너는 중생들은 그 얼마나 환희의 몸부림을 칠까 ....

그 원(願)을 이루고자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중생들은, 기러기처럼 열을 지어 끝없이 오르고 또 오르고 있는 것이다 ..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의 하나인 통일신라시대의 탑비.

 

 

 

중앙박물관에 있는 탁본

 

국보 제315호. 높이 2.73m, 너비 l.64m, 두께 23cm. 재료는 편마암이다. 2010년 1월 4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을 창시한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이다. 비석의 크기, 조각수법 등에서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이 엿보인다.

이 비는 당대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그가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비,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제47호)와 함께 사산비명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비문에 따르면 882년(헌강왕 8) 지증이 입적하자 왕이 시호를 내리고 적조라는 탑호와 함께 비명을 최치원에게 짓게 했다. 비문은 893년(진성여왕 7)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탑은 924년(경애왕 1)에 건립되었다.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가 밝혀져 있을 뿐 아니라, 비문을 쓰고 각자한 사람이 분황사의 승려 혜강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의 정보가 담겨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소도에 대한 기록도 있는데, 이는 소도에 대한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보물 제137호. 높이 3.41m. 신라 말에 활동하였던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 824~882)의 사리탑으로, 883년(헌강왕 9)에 건립되었다. 지증대사(824∼882)는 이 절을 창건한 승려로, 17세에 승려가 되어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882년에 입적하였다. 왕은 ‘지증’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적조’라 하도록 하였다. 현재 대웅전 왼쪽의 비각(碑閣)에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제315호)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지붕돌이 1/3 정도 파손되어 없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는 온전한 모습에 가까우며, 그 외에 별다른 훼손이 없이 보존 상태도 좋은 편이다.

이 승탑은 각 세부의 전체적인 비례가 잘 어우러진 것으로, 지붕돌이 넓어 보이지만 안정감이 있는 신라 말의 대표적인 승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승탑은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이다. 밑 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으며, 윗단을 괴는 테두리 부분을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두툼하게 하였다. 윗단은 각 모서리 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 사이에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다. 가릉빈가는 불교에서의 상상의 새로, 상반신은 사람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의 각 면에는 여러 형태의 조각을 새겨 넣었는데,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다. 윗받침돌은 윗면에 탑신을 괴기 위한 굄대를 두었으며, 모서리마다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입체감 있는 난간을 표현하였다. 탑신은 8각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고, 앞뒤 2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다. 그 양 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나머지 두 면에는 보살의 모습을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 역시 8각이며, 아래에는 서까래가 두 겹으로 표현되어 겹처마집을 보고 있는 듯하다. 처마는 살짝 들려 있으며, 낙수면의 각 모서리선은 굵직하고 끝에 꽃장식이 알맞게 돌출되어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연꽃받침 위로 머리장식이 차례로 얹혀 있다. 지붕돌의 일부분이 부서져 있으나 각 부분의 꾸밈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품격이 느껴진다. 이 탑은 전체적인 비례가 잘 어우러져 있으며, 지붕돌이 조금 넓어 보이기는 하지만 안정감이 있다. 탑 옆에는 탑비가 나란히 서 있어서 지증 대사의 생애와 행적을 알 수 있으며, 비문의 기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헌강왕 9년(883)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출처 : 문화재청>

온 절이 문화재로 가득한 이 곳 봉암사는 우리 불교적 양심이 마지막 한가닥 있는 곳이라 밝게 중생들을

향하여 두팔벌리는 그 옛날 선승들의 고귀한 가르침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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