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 청년 김구 눈물 흘리며 삭발한 천 년 고찰 마곡사

“사제(師弟) 호덕삼(扈德三)이 머리털을 깎는 칼(削刀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 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21살 청년 김구 눈물 흘리며 삭발한 천년고찰 마곡사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本寺)로,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泰華山) 동쪽 산 허리에 자리 잡고 있다.

마곡사 사적입안(事蹟立案)의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640년 백제 무왕(武王) 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2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범일(梵日) 대사가 재건하였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覺淳) 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조선 세조가 이 절에 들러 영산전(靈山殿)이란 사액(賜額)을 한 일이 있었다.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할 당시만 하더라도 전각이 30여 칸에 이르는 대사찰이었으나 현재 마곡사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을 비롯한 대광보전(大光寶殿: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解脫門) 등의 전각들이 사찰을 이루고 있다.

이 밖에도 도량의 성보(聖寶)로는 5층 석탑(보물 제799호)과 범종(梵鐘: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괘불(掛佛) 1폭, 목패(木牌), 세조가 타던 연(輦), 청동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가 있으며 감지금니묘볍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제6권(보물 제270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이 보존되어 있다.


1896년 2월 하순, 울분에 찬 21살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츠치다죠스케(土田讓亮)를 난도질, 잔인하게 죽여버리고. 그의 피를 움켜 마시고 시신은 강에 버렸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보복 살인이었으나, 도망은커녕 해주에 사는 김창수(김구의 옛 이름, 김구 선생은 이름을 여러 번 바꾸었다. 아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으나 후에 창수(昌洙)로 바꾸고 25세 때는 구(龜)로, 3차 투옥 시절이던 1913년(38세) 서대문 형무소에서 다시 구(九) 정한 뒤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지었다)가 죽였노라 방을 붙이고 집으로 돌아와 잡으러 오길 기다리다 석 달 만에 해주 감옥에 수감 되었다. 그리고 두 달 후 인천으로 이감되어 사형집행일을 받았다. 이제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순간 덕수궁에서 고종이 긴급 사형집행정지 명령을 내렸다.



고종이 김구에 대한 사형 재가가 떨어진 직후 한 승지(承旨)가 기적처럼 김구의 죄명이 단순 살인죄가 아닌 국모보수(國母報讎 국모시해 앙갚음)임을 발견하고 고종에게 다시 아뢰어 사형집행 정지 결정이 내려진 것이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으므로 파발을 띄워도 한발 늦었을 것인데, 때마침 사흘 전에 개통된 서울~인천 간 전화가 그를 살렸다. 덕수궁에서 긴급 전화로 사형 집행 정지를 타전해 온 것이었다. (백범일지에 수록되어 있다)


1898년 탈옥하여 마곡사에서 은신하다가 하은당이라 불리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고, 눈물의 삭발식을 거행했다. 사찰을 안고 흐르는 태화천 옆 바위에 앉아 머리를 잘랐다. 상투가 잘려 나갈 때 자신도 몰래 눈물을 흘렸다.

백범일지에는 그의 출가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사제(師弟) 호덕삼(扈德三)이 머리털을 깎는 칼(削刀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 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이때부터 김구는 원종으로 불렸다. 불교에 귀의해 반년을 이곳에서 승려 생활하다 스님께 금강산으로 들어가겠다며 떠났다. 그러나 그가 간 곳은 평양이었고, 전국을 돌다 중국으로 건너가 조국 독립운동을 하였다.




지금도 마곡사에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바위가 있고 지금은 마곡사와 공주 시청이 이곳 삭발 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그곳에서 마곡천 절경을 굽어보는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또한 군왕대로 이어지는 백범 솔바람 명상 길은 한 시간 정도로 산책하기도 아주 좋다.



백범 선생이 거처 했던 백범당 그 옆에 김구 선생이 해방 후 1946년 동지들과 이곳을 찾아와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있다.  마곡사를 떠난 지 근 50년 만에 돌아와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라는 원각경에 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이 향나무와 무궁화를 심었다고 한다. 이때 김구는 주석에 이어 비상국민회 총리 신분이었다.


또 백범당에는 선생의 진영(眞影)과 동지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는데 백범 선생 뒤로 왼쪽에는 완장을 찬 좌익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넥타이를 맨 우익이 서 있다. 이렇듯 백범 선생은 사상 보다는 하나 된 조국을 더 원하였다. 사진 옆에는 백범 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친필 휘호가 있는데 그것은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의 시라고 알려졌지만, 이양연의 시라는 것이 정설이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백범 선생은 동학교도에서 승려, 독립군, 상해 임시정부 초대 주석에 이르기까지 투쟁과 투옥 그리고 망명으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언제나 해방된 조국, 하나 된 조국의 뚜렷한 목표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선생의 고절(孤節)한 생을 우러러보는 것이다.


                                  세조가 두고간 가마(연)


마곡사는 이보다 400년 앞서 또 한 사람이 숨어 들어왔다. 수양대군(세조)이 조카 단종에게 왕위를 찬탈하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 은신했다. 세조가 벼슬을 내리며 설득했지만 응하지 않자, 한양에서 가마를 타고 직접 찾아왔지만. 김시습은 황급히 부여 무량사로 숨어버렸다. 세조는 여기까지 와서도 헛걸음을 한탄하며 신하 하나 못 얻는 내가 어찌 가마를 타고 돌아가랴, 하고는 타고 온 가마를 두고 떠났다. 그 가마는 마곡사 성보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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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