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로 살펴보는 상호 교류의 흔적, 무령왕릉

무령왕릉 발굴이 훗날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발굴 등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주 무령왕릉, 유물로 살펴보는 상호 교류의 흔적

지난 2015년 공주와 부여, 익산의 백제 역사 유적 8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다. 바로 백제 역사유적지구다. 이곳에는 ▶ 웅진 시기 백제의 유적인 공산성,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사비 시기 백제의 유적인 관북리 유적 · 부소산성과 정림사지, 부여 나성, 부여 왕릉원 ▶익산에 있는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유적은 웅진과 사비 시기의 백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현장이다. 이러한 유적들 가운데 인상적인 장소를 꼽으라면 단연 무령왕릉(사적 제13호)을 들 수 있다. 아마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무령왕릉의 발견 소식이 대서특필된 것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무령왕릉의 발견은 기적적인 것으로 회자 되는데, 백년에 한번 발견될까 말까 한 사례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더 넓게 해외 사례를 비교하면 투탕카멘의 발견과 비견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무령왕릉

무령왕 묘지석 (공주박물관 제공)
무덤의 주인(무령왕)과 사망연도가 적혀있다.
송산리 고분군으로만 알려졌던 공주 일대 고분군이 백제 무령왕의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가장 뚜렷한 자료다.


무령왕비 지석 (공주 박물관 제공)


1971년 7월 5일, 장마철을 맞아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작업이 있었다. 그런데 배수로를 파던 인부의 삽 끝에 뭔가 걸렸고, 확인해보니 벽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파 내려가면서 무령왕릉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후 입구를 막고 있던 벽돌을 제거한 뒤 내부를 확인했던 김원룡 박사와 당시 공주박물관장으로 있던 김영배 관장은 기괴하게 생긴 진묘수 앞쪽에 두 개의 지석을 확인했다. 그리고 명문을 판독한 뒤 깜짝 놀라게 된다. 지석에는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으로 시작되는 명문이 있었는데, 사마는 무령왕의 이름이었기에 무령왕릉의 발견이 확인된 것이다. 특히 무령왕릉의 경우 도굴되지 않고 발견된 처녀분으로, 우리 고대사에 있어 피장자가 확인된 몇 안 되는 왕릉이자 백제로 한정시켜보면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런데 사실 무령왕릉의 발굴은 우리 고고학의 흑역사였다.

보통 이 정도의 발견이면 발굴과 조사에만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무령왕릉은 그렇지 못했다. 당시 무령왕릉에 대한 열띤 취재 경쟁 속에 청동 숟가락과 진묘수의 뿔이 부러지는 등 유물의 훼손이 있었다. 결국 무령왕릉은 채 하루도 못 되어 쓸어 담듯 유물의 수습이 이루어졌다. 훗날 김원룡 박사는 후일담을 남겨 이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며 스스로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고고학에 있어 무령왕릉의 발굴은 참담한 흑역사로 기록되었다. 실제 이때 무령왕릉에 대한 제대로 된 실측도나 사진 등을 남기지 못했기에 고분과 유물을 통해 더 알 수 있었던 사실 역시 미궁에 그친 점은 여러모로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무령왕릉을 반면교사로 삼았기에 훗날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발굴 등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면면을 보면 백제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다. 우선 눈여겨볼 점은 묘제 양식이다. 한성 백제 시기의 왕릉인 석촌동 고분군의 사례에서 보듯 이전에는 적석총(積石塚) 형태의 고분이 주를 이루었고, 사비 시기의 왕릉인 부여 왕릉원의 경우 석실분(石室墳)이 주를 이루고 있다.

반면 송산리 고분군 중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은 벽돌무덤으로 제작 되었다. 벽돌무덤은 전축분(博樂墳)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역사에서는 평양 일대의 낙랑 유적에서나 등장할 뿐, 우리와는 친숙한 묘제가 아니었다. 이는 벽돌의 경우 흙을 굽는 과정이 필요한데, 비용적인 측면이나 공정 과정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지형상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돌이다 보니 주로 돌로 만든 고분이 유행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의 묘제는 당시 중국의 남조 국가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실제 송산리 6호분에서 출토된 벽돌에는 양선이위사의(梁宣以爲師矣) 명문이 새겨져 있어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기괴하게 생긴 석수인 진묘수(鎭墓獸). 역시 중국에서 성행하던 것이다.


진묘수(무령왕릉 입구에서 발견) 공주 박물관 제공

기괴한 신수를 표현한 공상적인 동물을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서 악귀(惡鬼)를 쫓아 사자(死者)를 수호한다는 중국의 묘장풍습(墓葬風習)에서 나온 것이다. 출토당시 무령왕릉 널길 중앙에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뭉뚝한 입을 벌리고 있고 코는 크지만 콧구멍이 없으며, 등에는 네 개의 융기(隆起)가 있고 머리 위 융기 상면의 패어진 홈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철제 뿔이 꽂혀 있다. 몸통 좌우에는 앞뒤로 날개모양의 갈기가 도안처럼 부조되었다. 네 개의 짧은 다리가 있으며 발톱이 표현되어 있는데 뚜렷하지 않다. 


송산리 6호분 사신도 (구글캡쳐)


그런데 송산리 6호분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중국의 벽돌무덤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이다. 보통 사신도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주로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백제가 중국의 묘제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 백제만의 양식으로 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부장된 유물의 면면을 보면 관의 재질은 금송(金松)으로, 원산지가 일본으로 확인되었으며, 그 밖에 백제 유물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양상이다. 때문에 무령왕릉은 발견 과정과 출토된 유물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묘제 양식과 부장된 유물을 통해 상호 교류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521년 11월 무령왕은 양나라로 국서를 보내 여러 번 고구려를 무찔렀다고 했는데, 이때 「양서』는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고구려의 남진으로, 한성을 떠나 공주로 쫓기듯 도망쳐야 했던 백제는 무령왕 때 이르러 다시 강국이 되었다. 그리고 이 힘을 발판으로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 대에 사비 천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무령왕릉은 단순한 능이 아니다. 무령왕릉을 통해 상호 교류의 역사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과 당시의 시대상을 읽어볼 수 있다는 점에 그 의미는 남다르다 할 것이다.  그리고 지난 27일 백제 왕릉과 왕릉급 무덤이 모여 있는 충남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고분에서 '중국 건업(建業) 사람이 만들었다'는 글자를 새긴 벽돌(전돌)이 나왔다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확인하여 중국 남조 영향 더욱 명확해졌다고 밝혔다.

건업은 420년부터 589년까지 중국 남쪽에 들어선 남조(南朝)의 도성이자 난징(南京)의 옛 지명으로, 무령왕릉과 왕릉원의 벽돌무덤이 남조 영향을 받아 축조됐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입증하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학계에서는 명문 첫 글자인 양(梁)을 남조의 나라 가운데 하나였던 양나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29호분 벽돌에서 남조 수도인 건업 글자가 드러나면서 남조 기술자들이 백제 벽돌무덤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발굴조사를 진행한 무령왕릉과 왕릉원 29호분의 입구를 폐쇄하는 데 사용한 벽돌을 조사해 반으로 잘린 연꽃무늬 벽돌 옆면에서 '조차시건업인야'(造此是建業人也)라는 글자를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이 문구는 '이것을 만든 사람은 건업인이다'로 해석된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29호분 글자 벽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29호분 벽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무령왕릉과 왕릉원 29호분 내부 모습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연구소는 29호분 인근 6호분에서 과거에 발견된 또 다른 명문(銘文·비석이나 기물에 새긴 글) 벽돌을 주목했다. 이 벽돌에는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 혹은 '양선이위사의'(梁宣以爲師矣)로 판독되는 글자가 있다. 연구소 관계자는 "29호분과 6호분 명문 벽돌은 서체와 내용이 유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추가로 상호 연관성을 검토하려고 한다"며 "29호분 벽돌의 글자를 3차원 입체 정밀 분석 기법으로도 판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병호 공주교대 교수는 "29호분 벽돌에서 '건업'이라는 지명이 확인되면서 백제와 남조의 중앙 세력이 교류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됐다"며 "29호분 벽돌 글씨 서체를 살펴보면 중국인이 쓴 듯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남조 사람이 벽돌만 만들었는지, 아니면 벽돌무덤 전체를 축조했는지는 여전히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명문 벽돌이 무덤 입구에서 나온 데 대해서는 "다른 무덤에서 사용하고 남은 것일 가능성이 있다"며 "무령왕릉과 왕릉원에 또 다른 벽돌무덤이 있을 수도 있다"고 짚었다.

무령왕릉과 왕릉원 29호분은 작년 조사를 통해 일제강점기 이후 처음으로 내부 모습이 드러났다. 무덤방 벽체는 무령왕릉과 왕릉원 1∼5호분처럼 깬돌인 할석(割石)을 썼지만, 바닥과 관을 두는 관대(棺臺)는 무령왕릉이나 6호분처럼 벽돌을 깔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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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