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오대 본산 이야기

이런 오대 본산 이야기도 이제는 그 전통을 점점 잃어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호남의 오대 본산 이야기

호남에는 송광사, 선암사,  대흥사, 백양사, 화엄사 등 5대 본산이 있으며, 다음과 같은 말들이 불가에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송광사에서 계율 자랑하지 말고, 선암사에서 문장 자랑하지 말라.
대흥사에서 염불 자랑하지 말고, 백양사에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화엄사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


송광사(사적 제506호)는 승보사찰로 조선 초까지 진각, 태고, 환암, 무학 등 15명의 국사를 배출했고 근대 효봉스님, 구산 스님, 법정 스님등 위대한 선지식들이 불교를 일으킨 곳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의 본사이며, 이전에는 대길상사, 수선사라고 했다. 통도사, 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로 꼽힌다. <송광사사적비>에 의하면 신라 말 체징이 길상사라는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거의 폐허화 된 것을 1200년 보조국사가 수행 결사인 정혜사를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길상사로 옮긴 후부터 대규모 수도 도량으로 발전했다. 화재와 6·25전쟁 등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 또는 파괴되어 다시 중건되었다. 현재 한국 선종을 이끄는 중심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문화재로는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 금동 요령(보물 제176호) 묘법연화경찬술(보물 제206호) 등이 있다.


선암사(사적 제507호)는 한국불교 태고종 태고총림. 대한 불교 조계종 제20교구 본사. 신라 542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사적기〉에 의하면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1092년에 의천이 중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1660년에 재건을 시작했다. 1701년에 불조전이 완성되었고, 대웅전의 개수 및 승선교 축조 등 대대적인 확장과 정비가 이루어졌다. 1819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중건했고, 1823년 다시 화재 가나자 해붕 등이 중수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운 스님 같은 뛰어난 학승이 진진응 스님, 박한영 스님 같은 대강백을 배출하여 근대 불학의 최고봉을 이룬 도량이다. 그 맥은 작가 조정래를 통하여 이어지고 있다. 조정래의 아버지 조종현 스님은 시조 작가이며 일본 유학하고 돌아와 선암사 대웅전에서 최초로 결혼식을 올렸으며 선암사 아랫마을에서 조정래가 태어났다. 조정래의 형님은 조진래이다.


대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둔사라고도 한다.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1665년부터 1667년에 걸쳐 심수가 중창했으며,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썼다. 대웅전 앞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이란 편액이 있고, 동쪽 응진전 앞에는 대흥사응진전전3층석탑(보물 제320호)이 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흥사는 의식을 중시하여 범패와 장엄 의식을 자세히 가르쳤다. 조선 시대에는 13 대종사 13 대강사를 배출하면서 조선불교의 등불이 되었다. 대흥사 일지암에 머물던 초의스님은 다도뿐 아니라 선지가 깊고 불학에도 정통하였다. 그는 범자와 단청, 불화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불가의 승려 신분으로 시. 서. 화. 차. 향에 일가를 이루어 신분 계급을 초월하여 조선 후기 아회 문화의 꽃을 피운 분이다.


백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632년(백제 무왕 33) 여환이 창건하여 백암산 백양사라고 했으며, 1034년(덕종 3) 중연이 중창하면서 정토사라고 개명했다. 1350년(충정왕 2) 각진 국사가 3창하고, 1574년(선조 7) 환양이 현재의 백양사라고 개칭했는데 이것은 환양의 〈법화경〉 독성소리에 백학봉에 있는 흰 양떼가 자주 몰려온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만암 스님, 묵담 스님, 서옹스님 등 조계종과 태고종, 법화종의 종정을 배출한 고불총림이다. 백양사 운문암 선원은 내소사의 월명암, 선운사의 도솔암과 함께 호남의 3대 명당으로 이름난 곳이다.


화엄사 각황전


화엄사(사적 제505호)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의 본사이다. 1979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기록에 754년(경덕왕 13) 황룡사 연기조사의 발원으로 화엄사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했다고 되어 있다. 1424년(세종 6)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1702년(숙종 28) 중건했다. 가람배치는 대웅전 앞에는 동서 5층석탑이 비대칭으로 서 있는 독특한 형식이다. 이 절은 화엄종의 중심사찰로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화엄 사상을 펼쳐나간 곳이기도 하다. 현재 경내에는 각황전(국보 제67호)을 비롯하여 대웅전(보물 제299호) 등의 17세기 건축물이 남아 있어 중요 문화제로 지정되었다. 화엄사는 주먹질을 잘해서가 아니고 임진왜란과 일제를 거치면서 저항정신이 치열했던 곳이다. 정유재란 때는 승군의 본영 같은 역할을 했고 그 때문에 왜군에 의해 88개 암자와 함께 전 사찰이 불태워졌다. 화엄사 출신 자운대사는 이순신 장군 아래서 조선 승수군의 중요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거북선의 설계 도면도 자운 대사가 반야용선을 참조하여 장군에게 제출했다고 전해진다.

국보 제35호로 지정된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

화엄사 각황전 옆의 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35호로 지정된 4사자 3층 석탑을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석탑과 양식이 달라 불국사 다보탑과 함께 통일신라 시대 조성된 특별한 석탑 양식을 보여준다. 화엄사는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했던 연기 스님은 3층 탑을 4마리 사자가 받들게 하고 그 중앙에는 당신의 어머니를 모셨다. 그리고 맞은편에 석등을 이고 우슬착지, 오른 무릎을 땅바닥에 대고 어머니에게 차 공양을 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승상으로 조성하였다. 화엄사에서는 그런 연유로 이곳을 효대 라고 부른다.

화엄사 구층암 마루, 모과나무 기둥을 다듬지 않고 사용하였다.

이곳의 선원 건물은 모과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하여 유명한 곳이다.

이런 오대 본산 이야기도 이제는 그 전통을 점점 잃어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진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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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