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위엄을 쌓아 올린 한양도성, 오랜 빗장을 풀다

북악산은 비밀스러운 공간 그 자체였다. 서울의 DMZ 같은 곳으로 존재해왔다.

왕의 위엄을 쌓아 올린 한양도성, 오랜 빗장을 풀다


닿지 않는 것들은 애틋한 그리움을 만든다. 이는 문화유산이 가진 공통된 가치일 지도 모른다. 닿을 수 없지만 우리에게 남겨진 문화유산을 매개로 그 시대를 더듬어 상상하고 소통하며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그 귀한 가치를 가늠함으로써 과거를 현재에 새기고 미래로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 오랜 빗장을 풀고 마침내 후세에 걸음을 허락한 한양도성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북악산 북측 탐방로를 걸으며 오랜 세월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한양도성에서 조선 건국의 큰 그림을 그린 왕의 마음으로 한해의 계획을 세우며 미래를 향한 걸음을 내딛어도 좋을 것이다.



북악산은 비밀스러운 공간 그 자체였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이 내려다보인다는 이유로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총독 관저로 사용되면서 오를 수 없는 산이 되었으며, 광복이 된 후에도 청와대가 자리를 잡으면서 일반인들의 통행이 자유롭지 못한 지역이 되어버렸다. 금단의 구역이 된 결정적인 사건도 있었다. 1968년 1·21 사태(청와대 기습 미수사건)가 발생하면서 문을 걸어 잠근 이후 청와대 방호를 위해 출입이 완전히 통제되면서 닿지 못하는 서울의 DMZ 같은 곳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지난 2007년 4월 한양도성 성곽길 개방을 시작으로 베일에 싸여있던 북악산은 조금씩 공개되기 시작해 지난해 11월 1일 마침내 북악산 북측 탐방로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공개된 구간은 총 3.5km로 북악산 둘레길 탐방로 3번 출입구로 입장해 옛 군견 훈련장, 청운대, 1·21 소나무, 백악마루를 거쳐 청운대 쉼터와 한양도성 옆길을 지나 곡장 전망대까지 이를 수 있다.


01.축성시대별로 그 모양의 차이가 뚜렷한 한양도성    02.험준한 서울의 산세가 한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풍경

03.경복궁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청운대



서울의 수려한 산세를 한눈에 조망하는 곡장 전망대

북악산 북측 탐방로에 올라 탁 트인 풍경과 마주하게 되는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곡장 전망대다. 아득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인왕산과 북악스카이웨이에 있는 팔각정, 그리고 서울의 풍경이 어우러져 오랜 역사를 이어온 도시의 매력을 발산한다. 제법 가파른 곡장 전망대에 오르는 동안 내뱉은 거친 숨을 가다듬고 휴식을 취하면서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과 끝없이 이어진 성곽 등을 바라보면서 서울의 시간을 더듬어 볼 수 있다.

곡장 전망대는 조선시대에 주요 지점이나 시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한양도성 내에 곡장은 인왕산과 북악산에 하나씩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곡장 전망대에서 저 멀리 인왕산에 있는 곡장도 바라볼 수 있어서 더욱 값지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곡장 전망대의 조망은 가히 일품이라 할 정도로 서울의 수려하면서도 험준한 산세가 가려지는 것 없이 펼쳐져 힘겹게 올라온 탐방객의 감탄을 자아낸다.



북악산 북측 탐방로의 백미, 한양도성 성곽길

곡장 전망대를 벗어나 숨을 고르며 비교적 평탄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 오랜 시간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굳건한 성곽이 동행하듯 따라온다. 이곳이 바로 한양도성 성곽길이다. 이번 북악산 북측 탐방로가 개방되면서 마주하게 된 여러 풍경 중 한양도성 성곽길은 단연 백미로 손꼽힌다. 이 길은 조선의 성곽 축조 방식을 시대별로 비교하면서 한눈에 가늠할 수 있는 곳으로 쉽게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한양도성은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등 4개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로 현존하는 도성 중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도록 성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이라 그 의미가 값지다.

축성 시기에 따른 형태를 살펴보면 1396년 태조 때 축조된 것은 산지는 석성, 평지는 토성으로 쌓았으며, 모양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서 사용했다. 축성된 후 확장, 보완되는 등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는 아쉽게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 세종 때(1422)에 쌓은 성곽은 재정비 차원에서 작업한 것으로 이 시기에 평지의 토성을 석성으로 교체하고 성돌 역시 마치 옥수수알을 연상케 하는 다소 작고 둥근 모양으로 다듬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군사적 목적으로 도성을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숙종 때는 1704년부터 여러 해 동안 무너진 구간을 수차례에 걸쳐 새로 쌓았다.

이 시기에는 성돌을 가로세로 40~45cm 내외의 장방형으로 규격화해 사용했으며, 그를 통해 성벽은 한층 견고해졌다. 마지막 시기인 순조 때에 축조한 성곽은 규모와 정교함에 있어서 정점에 이른 모습을 보여준다. 정방형으로 다듬어 쌓은 성돌은 크기가 무려 가로세로 60cm에 이를 정도로 큰 것을 사용했다. 각 시기별로 축성방식이나 성돌의 모양도 달라졌지만 각각의 시기가 모두 왕권이 강화되고 안정적인 때였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태평성대와 부국강병, 강력한 왕권을 향한 염원을 담아 쌓았을 한양도성. 그 묵직한 무게감까지 마주할 수 있는 한양도성 성곽길은 오래 그곳에 있었고 또한 앞으로도 더 오래 그곳을 지킬 귀하고 강건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공간, 청운대와 백악마루

한양도성이 품고 있는 남다른 가치 중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경복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정점이 청운대와 백악마루다. 청운대는 북악산 전면개방을 기념해 서울의 진산인 북쪽 최정상인 백운대를 본떠 청운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청운대는 북악산에서 경복궁을 조망하기 가장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복궁은 마치 조감도를 펼쳐놓은 듯 궁궐의 모습이 그림처럼 시야에 잡힌다. 든든한 모습으로 등 뒤에 한양도성을 두고 산 아래로 자리 잡은 경복궁을 바라보는 심정은 마치 조선 건국을 계획한 정도전에 빙의된 듯 비장해진다.

수백 년을 거슬러 소통하는 느낌을 선사하는 한양도성의 위엄은 찬란한 왕조 조선의 심장과 다름없는 경복궁으로 옮겨간다. 청운대와 나란히 자리한 백악마루에 서면 조금 더 가까이 보이는 경복궁과 그 시절 수도 한양의 모습까지 그려볼 수 있다. 한양도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백악마루는 경복궁과 일직선으로 이어진 세종로, 그리고 한강을 지나 아득히 보이는 관악산까지 시선이 닿는 곳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상상력을 동원해 조선의 모습을 그려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청운대와 백악마루는 한양도성이라는 위대한 건축물이 품은 또 하나의 명품이다.



한양도성에서 만난 조선 그리고 근대의 기록. 한양도성 각자성석: 한양도성을 걸으며 놓치지 말고 봐야 할 것이 바로 한양도성 각자성석이다.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심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봐야 보이는 한양도성 각자성석은 일종의 건축 실명제 같은 것으로 순조 4년(1804) 10월 오재민이 공사를 이끌고, 공사의 감독은 이동한이 담당했으며, 전문 석수 용성휘가 성벽을 보수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처럼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1·21 사태 소나무: 북악산이 금단의 땅이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1·21 사태의 총격의 흔적이 남아있는 1·21 사태 소나무는 한양도성 성곽길 백악마루 인근에 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31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고자 침투해 경찰과 교전을 벌이다가 북악산과 인왕산 일대로 숨어들었다. 당시 치열한 교전을 벌이면서 소나무에 15발의 총탄의 흔적이 남았다. 그 후로 1·21 사태 소나무로 불리는 이 나무는 총탄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MINI INTERVIEW

문화해설사 홍성규. 현재 10년째 종로구청 소속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북악산 북측 탐방로는 제가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개방을 통해 조금씩 시민의 품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와 근대의 아픈 역사까지 담고 있는 이 탐방로는 다양한 문화유산을 가득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탐방로가 개방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 이곳의 의미와 가치를 더듬는 시간을 가지는 데 해설사로서 작은 보탬이 될 수 있어 보람을 느낍니다.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조선의 역사와 문화가 빚어진 만큼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곳에서 우리의 유구한 문화의 힘을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글. 김영임 사진. 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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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