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궁 七宮

칠궁(七宮)은 왕을 낳은 생모이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으로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청와대 내부에 위치하여 일반인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칠궁 七宮

칠궁(七宮)은 왕을 낳은 생모이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으로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청와대 내부에 위치하여 일반인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숙빈최씨는 무수리 출신으로 숙종의 후궁이 되어 아들이 임금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아들 영

영조는 즉위하여 생모인 숙빈최씨의 묘를 육상궁으로 승격했다 숙빈최씨의 육상궁에 6명의 후궁의 신위를 추가로 옮겨왔다 왕을 낳은 후궁 7명이 함께 모셔져서 칠궁(七宮)이라고 한다

육상궁(사적 제149호)에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이 옮겨와서 7궁이 되었다 숙종의 후궁인 육상궁과 영조의 후궁인 연호궁, 영조의 후궁인 선희궁과 정조의 후궁인 경우궁은 한 건물에 두 분의 신주를 모셔져서 모두 다섯 건물이 되었다

‘저경궁(儲慶宮)’은 선조의 후궁이며, 인조의 생부인 정원대원군 '원종'의 생모인 인빈김씨의 사당이다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은 죽어서 아들이 인조반정으로 임금이 되자 정원대원군이 되었다

‘대빈궁(大嬪宮)’은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의 사당이다 ‘육상궁(毓祥宮)’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사당이다 희빈장씨와 숙빈최씨는 살아서는 원수로 지냈고 죽어서 한 울타리에 묻혔다

'연호궁(延祜宮)'은 영조의 후궁이며, 효장세자 '진종'의 생모인 정빈이씨 사당이다 '선희궁(宣禧宮)'은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사당이다 효장세자는 정조의 양부이고 사도세자는 정조의 생부이다

'경우궁(景祐宮)'은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사당이다 '덕안궁(德安宮)'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엄귀비의 사당이다 칠궁에는 육상궁부터 덕안궁까지 7명의 신위가 모셔졌다

'의빈궁(宜嬪宮)'은 정조의 후궁이며,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의 사당이다 순종이 의빈궁을 칠궁에서 제외하여 육궁이 되었다 1929년 덕안궁이 육상궁에 봉안되어 다시 칠궁이 되었다


2 저경궁)

‘저경궁(儲慶宮)’은 선조의 후궁이자 추존왕 ‘원종’의 생모이자 인조의 조모인 인빈김씨를 모신 사당이다 

정원군은 선조의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했다'라고 선조실록에 기록됐다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조선 최초로 원종으로 추증됐다 

영조가 인빈김씨의 사당을 저경궁으로 격상했다 1908년 저경궁을 궁정동의 칠궁으로 옮겼다


인빈김씨는 선조의 후궁이 되어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 의창군 등 4남 5녀를 낳았다 선조는 신성군을 세자로 삼으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묘사직을 위해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다

인빈김씨의 장남 ‘의안군’은 12세에 요절했고 차남 ‘신성군’은 15세에 요절했다 삼남 ‘정원군’은 인조반정으로 추존왕 ‘원종’이 되었다 사남 ‘의창군‘은 허균의 역모와 관련하여 유배됐으나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총애를 받았다

정원군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여 호종공신에 책록됐다 선조실록에는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탄핵을 받았다’고 기록됐다 정원군은 아들 능창군이 역모죄로 처형되자 화병에 사망했다

정원군은 아들 능양군이 인조반정으로 임금이 되자 사후에 정원대원군으로 추증됐고 다시 추존왕 ‘원종’으로 추존됐다 광해군이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린다는 소문을 듣고 정원군의 집터를 빼앗아 경희궁을 지었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추존왕 ‘원종’의 아들이며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왕위에서 내쫓고 임금이 되었다 인조는 이괄의 난으로 공주까지 도망갔고 정묘호란으로 강화도로,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 결국 청나라에 치욕스런 항복을 하였다


3 대빈궁)

‘대빈궁(大嬪宮)’은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장희빈을 모신 사당이다 경종이 즉위하여 장희빈을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하고 사당을 건립하여 ‘대빈궁’이라 불렀다 1908년 대빈궁을 궁정동의 칠궁으로 옮겼다


희빈장씨는 궁녀로 입궁하여 조선 최초로 왕후에까지 승진하였으나 서인들의 탄핵을 받아 폐비되어 사약을 받고 처형됐다 


숙종은 7세에 세자가 되었고 14세에 왕이 되었다 45년 10개월 동안 재위하며 왕비 3명, 후궁 6명을 두었다 정비 인경왕후, 1계비 인현왕후, 2계비 인원왕후 등은 후사가 없었다 후궁 장희빈이 경종을 낳았고 후궁 숙빈최씨가 영조를 낳았다

장희빈의 본명은 장옥정이며 아버지는 역관이고 어머니는 노비라서 천민으로 성장했다 나인(內人)으로 궁궐에 들어가서 숙종의 승은을 받아 아들을 낳아 희빈이 되었다 조선에서 유일하게 궁녀에서 왕비까지 승진했다

숙종이 ‘경신환국’으로 남인을 축출하자 서인이 집권했다 다시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인현왕후가 폐위됐고 장희빈이 왕비가 되었다 또다시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인현왕후를 복위했고 장희빈은 폐비됐다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한 혐의로 사약을 받고 사사됐다 숙종은 ‘후궁이 왕비로 승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명했다 서인인 인현왕후와 남인인 장희빈은 당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숙종은 죽어서도 서인들의 등살에 의해 원비 인경왕후와 계비 인원왕후는 떨어진 곳에 묻혔고 계비 인현왕후와 나란히 묻혔다 후궁 장희빈은 경기도 광주에서 서오릉으로 천장했고 후궁 숙빈최씨는 경기도 파주에 묻혔다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나서 3세에 세자가 되었고 장희빈은 왕비가 되었다 임금이 되었으나 경종은 숙빈최씨의 아들이자 이복동생인 연잉군이 올린 음식을 먹고 생모에 이어 비극적인 죽임을 당했다


4 육상궁)

‘육상궁(毓祥宮)’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는 경복궁 북쪽 산기슭 아래 생모 숙빈최씨의 사당을 지어 ‘육상궁’이라고 불렀다 1908년 여섯 명의 신위를 궁정동 육상궁으로 옮겨 칠궁이라고 하였다


숙빈최씨는 인현왕후를 따라 무수리로 입궁했다 숙빈최씨는 희빈장씨가 인현왕후 저주굿을 하였다고 발고하여 폐위시키고 빈으로 승진했다 


숙빈최씨의 본명은 최복순이며 전라도 태인 출신으로 7세에 궁중에서 물긷기 불때기 등 허드렛일을 맡은 무수리가 되었다 숙종의 승은을 입어 아들 연잉군을 낳아 정1품 숙빈이 되었다

숙빈최씨는 서인의 후원을 받은 왕비 인현왕후와 남인의 후원을 받은 계비 장희빈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왕비가 된 장희빈의 악행을 숙종에게 고변했다 숙종은 장희빈을 사사하고 숙빈최씨를 총애했다

하지만 숙빈최씨는 아들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는 장면을 보지 못하고 49세에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 소릉묘에 묻혔다 숙종이 사망하자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했고 경종이 의문의 죽임을 당하자 숙빈최씨의 아들 영조가 즉위했다

경종의 생모인 장희빈과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는 살아서는 원수로 살다가 죽어서 육상궁에 함께 모셔졌다 육상궁에 왕비가 되지 못한 7명의 신위를 모셔 칠궁(七宮)이라고 부른다


 

5 연호궁)



'연호궁(延祜宮)'은 영조의 후궁이며 효장세자 진종의 생모인 정빈이씨를 모신 사당이다 정조가 즉위하여 양할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경복궁 서북쪽에 사당 연호궁을 지었다 1908년 연호궁을 궁정동의 칠궁으로 옮겼다


효장세자는 숙종의 손자이자 영조의 장남으로 10세에 요절했다 정조를 양아들로 입적하여 대를 이었다 정조가 큰아버지이자 양아버지를 진종으로 추존했다 


정빈이씨는 궁중의 나인으로 궁중에 들어와서 연잉군의 첩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자 정5품 소훈(昭訓)이 되었으나 급사했다 정빈이씨는 경기도 양주의 숙빈최씨의 묘소인 소령원 근처에 안장됐다

영조가 즉위하자 정4품 소원(昭媛)에 추증됐고 아들이 효장세자가 되자 정1품 정빈(靖嬪)으로 추증됐다 효장세자의 양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연호궁(延祜宮)으로 추상됐다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와 정순왕후 김씨는 후사가 없었다 영조의 후궁인 정빈이씨가 낳은 효장세자는 임금이 되지 못하고 10세에 요절했고 영빈이씨가 낳은 사도세자는 임금에게 살해됐다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세손도 임금이 되지 못하고 요절하자 차남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의 자격으로 영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정조는 즉위식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며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정빈이씨의 아들 효장세자는 숙종의 손자이자 영조의 아들로 태어나서 6세에 세자가 되었으나 10세에 요절했다 양아들 정조가 즉위하여 추존왕 진종으로 추존됐고 대한제국이 건국되자 진종소황제로 추존됐다


6 선희궁)

'선희궁(宣禧宮)'은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는 아들의 죽음을 도운 부인의 사당을 의열궁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할머니를 선희궁이라고 하였다 1908년 선희궁을 궁정동의 칠궁으로 옮겼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아들이자 효장세자의 이복동생이며 정조의 아버지이다 사도세자는 장조로 추존됐다 사도세자의 후손들이 정조부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까지 임금으로 즉위했다 


영빈이씨는 궁녀로 입궁하여 영조의 후궁이 되었다 영조와 정빈이씨 사이에 태어난 장남 효장세자는 요절했다 영조와 영빈이씨 사이에 태어난 차남 사도세자는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의 양자로 입적됐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 중에 아버지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영빈이씨는 아들 사도세자를 사지로 내몰고 손자 정조를 선택했다 결국 사도세자는 뒤주 안에서 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8일 만에 사망했다

의소세손은 사도세자의 적장자이며 정조의 동복형이다 의소세손이 요절하자 정조가 역적이 된 사도세자를 대신하여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을 계승했다 정조는 즉위식에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고 말했다

아들 정조는 아버지 세도세자에게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렸다 조선의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가 의문의 죽임을 당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인도했다


7 경우궁)

'경우궁(景祐宮)'은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를 모신 사당이다 순조가 생모의 사당으로 현사궁을 세웠고 이듬해 이전하여 경우궁으로 바꾸었다 1908년 경우궁을 궁정동의 칠궁으로 옮겼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의소세손의 이복동생이며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되어 즉위했다 순조는 34년 동안 재임하였으나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되었다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는 후사가 없었다 정조의 후궁 의빈성씨가 낳은 문효세자가 요절하자 후궁 수빈박씨가 낳은 순조를 효의왕후의 원자로 삼았다 정조가 의문의 죽임을 당하자 11세의 나이로 순조가 즉위했다

정순왕후는 15세에 66세의 영조의 계비가 되었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며느리인 혜빈홍씨보다 10살이나 어렸다 정조에 이어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지하는 벽파와 손을 잡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정하는 시파를 탄압했다 정순왕후는 여자 임금이라는 뜻으로 여주(女主)를 자칭하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자행하였고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순조는 정조의 유지에 따라 김조순의 딸과 혼인하여 왕비로 책봉했다 외척 김조순이 정순왕후를 몰아내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시작했다 순조는 안동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기 위해 조만영의 딸을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했다

효명세자는 추존왕 익종으로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생부이다 조대비와 혼례를 올린 후에 아버지 순조를 대리청정하다가 22세에 요절했다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효명세자의 빈이자 헌종의 생모인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조대비는 헌종비와 철종비를 가문에서 간택하고 풍양조씨의 세도정치를 계속했다 헌종에 이어 철종마저 후사가 없자 흥선대원군과 모의하여 고종을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했다


8 덕안궁)

'덕안궁(德安宮)'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빈엄씨를 모신 사당이다 순빈엄씨는 궁녀로 입궁하여 고종의 승은을 입어 영친왕을 낳아 명성황후 사후 사실상 고종의 황후로 활약했다 1929년 덕안궁은 궁정동의 칠궁으로 옮겨졌다


순빈엄씨는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사실상 조선의 국모로 살았다 영친왕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 일제의 희생양이 되어 비운의 삶을 살았다 

고종은 조선의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초대황제이다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결탁으로 임금이 되었다 일제에게 나라까지 빼앗기고 독살을 당한 비운의 황제이다 아들 순종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사도세자와 혜빈홍씨는 정조를 낳았고 사도세자와 숙빈임씨는 은언군과 은신군을 낳았다 은언군의 손자가 철종이고 은신군의 증손자가 흥선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낳았고 고종은 순종을 낳았다

명성황후는 순종을 낳았고 순빈엄씨는 영친왕을 낳았다 귀인이씨는 완친왕을 낳았고 귀인장씨는 의친왕을 낳았다 귀인양씨는 덕혜옹주를 낳았다 명성황후는 일제의 낭인에 의해 살해됐고 엄귀비는 경술국치 직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영친왕은 고종의 아들이자 순종과 의친왕의 이복동생이다 순종이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됐고 일본에 인질로 끌려가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전주이씨들이 ‘평생 고난의 길을 걷다’라는 뜻으로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라는 시호를 바쳤다



정조의 후궁 의빈성씨의묘 
9 의빈궁)

'의빈궁(宜嬪宮)'은 정조의 후궁이며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칠궁에서 제외됐다 순종은 아들이 왕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빈궁의 제사는 왕세자나 왕세자빈의 예법에 따르라고 하여 신위를 땅에 묻어 칠궁에서 제외됐다

의빈성씨는 궁녀로 입궁하여 정조가 선택한 승은후궁이다 정조의 승은을 두 번이나 거절했고 두 번이나 유산했다 의빈성씨는 아들 문효세자가 5세에 요절하자 만삭의 상태로 34세에 사망했다
의빈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거절한 이유는 후사도 없고 총애도 받지 못하고 있던 효의왕후를 배려했거나 승은후궁들의 비참한 말로를 예측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정조를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문효세자는 정조의 장자이자 순조의 이복형이다 대한제국 수립 후 태자로 추증됐다 아들이 없던 정조는 문효세자가 태어나자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정조는 후궁인 의빈성씨의 사당인 의빈묘외 아들인 문효세자의 사당인 문희묘를 나란히 세웠다 의빈성씨와 문효세자의 묘는 효창동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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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