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의 흔적

동인천의 식민지 흔적을 거슬러 가본다.

인천 식민지의 흔적

동인천 식민지의 길 



일련종의 사찰, 묘각사터

묘각사 터는 화엄사에서 제물량로를 건너 제물량로 101번길을 걷다가 우현로 20번길에 있다.
묘각사터는 신흥동 주택가 근처에 비석만 하나 세워져 있어 찾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돌로 된 진입계단을 찾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묘각사는 일련종의 사찰로 1893년 건립되었다.
1893년 5월 14명의 일본거류민단 총대표가 비석건축 신청서를 제출해 인가를 받았다.

일련종은 일본의 일련대성인이 창설한 불교 종파로 교리나 이론보다는 법화경의 적극적인 실천과 행동을 강조하는 종파다. 일련종은 다른 교학이나 수행을 모두 배격하였으며, 오로지 법화경을 실천하고 체득할 것을 요구 하였다고한다.
그래서 법화경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심지어 부부사이에도 같은 일련종 신자가 아니면 이혼을 요구할 정도로 강경했는데 이러한 포교방식으로 마을전체가 신자로 뭉치기도 했다.


일련종 사찰 묘각사 터



인천신사 터

인천신사 터는 현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에 위치해 있다. 본관 앞에 나란히 서 있는 1개의 돌탑과 2개의 석축이 바로 인천 신사의 흔적이다. 인천 내 일본 거류민이 증가하자 1889년 일본 영사가 기부금을 모급해 건립했다. 당시 일본인은 1600명이었는데 기부금을 모아 신사를 세우고 거류민의 휴식을 위한 공원을 만들어 동공원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반대에 있는 지금의 자유공원을 서공원이라고 불렀다. 신사란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의 사원을 말한다.
일본은 신사를 중심으로 일왕의 신격화와 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 지배에도 이용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일본은 일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참배하게 하였다.

심지어 학생은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마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이것은 이후에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까지 번져나갔다. 이런 반감 때문에 광복이 되자마자 대부분의 신사들이 불타거나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인천신사 터에 남은 흔적들을 보니 일제의 황민화정책과 민족말살 정책에 맞섰던 선조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 신사의 사잔



일본사찰 화엄사.

동본원사터에서 인천시립도서관 방향으로 가다가 오른쪽 제물량로 98번 길에 화엄사가 있다.
화엄사는 1908년에 중건된 일본 사찰이다. 그리고 1946년 이후 지금의 해광사가 들어왔다.
현재의 명부전은 화엄사 시절의 건물이며, 일본식 석물과 석축 등을 볼 수 있다. 일본식으로 지은 대웅전이 낡아서 허물고 다시 지어 옛 모습은 없지만 군데군데 일본식 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대웅전 뒤에 전에 살았던 일본인의 유골을 보관한 건물이 남아 있는데 인천을 찾은 일본인들이 방문한다고 한다.


현재의 화엄사



일본 사찰, 동본원사터

동본원사터는 답동성당에서 우현로 50번길을 이용해 가톨릭회관 쪽으로 걷다보면 신흥초등학교 바로 옆에 위치한 답동 로얄맨션 자리가 예전 동본원사 터다. 인천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종교관을 실현하기 위해 신사와 본원사 등을 세웠다. 1885년 설립된 동본원사는 인천 최초의 일본 사찰이다. 초기에는 진종 대곡파 본원사 소속으로 동본원사 부산별원 인천지원으로 시작했다. 이후 신도 수가 점차 늘어나자 거류민들의 장례 의식과 육,해군 및 일반인들의 묘지 관리도 맡게 되었다. 1899년 인천별원으로 개칭하고 1902년 화장터를, 1925년 산문 및 납골당을 건립했다. 1930년에는 신도 수가 약 3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동본원사의 당시 사진


출처 /사진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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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