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선에서 발견된 뼈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물 밖에 나와서 보니 그 유물은 막대기가 아니라 사람의 팔뼈였다. 수중에서 발굴된 최초의 고려시대 인골인 것이다. 이 뼈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난파선에서 발견된 뼈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난파선에서 발견된 뼈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2008년 충청남도 태안군 대섬 앞바다, 태안선 (고려시대 선박)의 수중발굴조사가 한창이었다. 조사가 끝나갈 무렵 바닷속에서 발굴 중이었던 당시 노경정 조사원(現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은 막대기로 보이는 유물 한 점을 들고 나왔다. 물 밖에 나와서 보니 그 유물은 막대기가 아니라 사람의 팔뼈였다. 수중에서 발굴된 최초의 고려시대 인골인 것이다. 이 뼈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01,04. 난파선에서 발견된 선상용품과 선원의 뼈가 전시된 모습.(태안해양유물전시관) 전시 연출을 위해 복제품을 사용했다.

뼈에 담긴 인체 정보
인간의 몸에는 206개의 뼈와 32개의 치아가 있다. 아이일 때는 뼈의 수가 성인보다 더 많지만, 자라면서 서로 합쳐져 206개의 뼈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따라서 뼈 속에는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의 신체적 변화를 비롯해 살아있는 동안 외부로부터 받은 영향이 그대로 기록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몇살까지 살았고 키는 몇이었는지, 어떤 음식을 주로 먹었는지, 질병을 앓았었는지, 습관적인 자세에 따른 뼈의 변화를 통해 직업까지도 유추해 볼 수 있다.

태안선에서 출수된 뼈는 신체의 일부인 좌우 어깨뼈(견갑골)와 우측 위팔뼈(상완골), 좌우 아래팔뼈(척골), 목뼈(경추)에서 등뼈(흉추)로 이어지는 척추뼈가 남아 있었다. 이는 사망한 뒤 해저에서 부식되면서 대부분의 뼈가 유실되고 일부만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골은 동아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김재현 교수팀이 분석했다.

발견된 뼈는 성별을 추정하는 데 용이한 두개골이나 골반 또는 치아 등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우측 위팔뼈의 삼각근조면이 발달한 점에서 남성으로 추정된다. 삼각근조면은 우측 위팔뼈에서 삼각근이 붙는 부위로 이곳에 부착되는 근육의 발달 정도에 따라 구별할 수 있다.

어깨근육이 잘 발달한 사람은 뼈도 강하게 발달되어 근육부착부의 표면이 울퉁불퉁하게 되는 반면에 이 근육이 약한 사람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크고 발달된 근육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성별을 판별할 수 있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일정 시기가 되면 뼈끝이 융합하는데, 뼈의 부분마다 융합이 완료되는 시기가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태안선에서 발견된 인골은 우측 위팔뼈의 끝부분에서 융합이 이미 진행되었고 척골에서도 융합이 완성된 점 등으로 볼 때 성년 후반(30대)으로 추정된다.

키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사지의 긴 뼈를 이용한다. 다리뼈를 이용하는 경우 정확도가 높은 편이지만 부위에 따라 최대 길이를 이용해 키를 추정한다. 발견된 위팔뼈의 최대 3길이를 통해 인골의 신장을 160.1cm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태안선이 개경으로 향하던 청자운반선이었다는 점에서 발견된 뼈의 주인은 선원으로 추정된다. 우측 위팔뼈나 좌우 아래팔뼈, 척추뼈에서 육체적 노동에 의한 발달이 도드라짐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선원으로 살아온 삶의 모습이 뼈에 그대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다른 골절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점에서 매우 건장한 신체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02.출수 현장 03.발견 당시 모습


난파된 배와 운명을 함께한 고려 선원
이토록 건강한 선원이 어떤 이유로 바다에서 영원히 잠들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발견된 당시 인골은 해수면을 바라보는 상태로, 도자기 더미에 깔린 채 발견되었다. 우측 팔은 옆으로 펴져 있었고 어깨뼈와 척추뼈도 약간 틀어진 모습이었다. 이러한 뼈의 뒤틀림은 몸을 비틀어 상반신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우리나라 난파선은 모두 연안을 항해하다가 침몰됐다. 따라서 난파된다 하더라도 육지와 가깝기 때문에 구조될 수 있었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선원도 배가 침몰하는 매우 짧은 시간에 탈출하려는 시도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물에 깔려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목적지인 개경에 다다르지 못하고 비극적인 사건으로 멈췄던 그의 항해는 800년 이상 지나서야 끝이 났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태안해양유물전시관을 통해 후손들에게 역사의 생생함을 전달하고 있다. 글, 사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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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