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련종에서 파생 된 입정교성회(立正佼成会)의 한국 활동과 일본 신흥종교의 부침·교리

니와노 릿쿄(庭野日敬)가 1940년대 개조한 일본 신종교 입정교성회(立正佼成会)는 일련종에서 파생되었으나, 일련정종, 창가학회 등과는 전혀 다른 계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입정교성회(立正佼成会)의 한국 활동과 일본 신흥종교의 부침·교리(上)

니와노 릿쿄(庭野日敬)가 1940년대 개조한 일본 신종교 입정교성회(立正佼成会)는 일련종에서 파생되었으나, 일련정종, 창가학회 등과는 전혀 다른 계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立正佼成會는 1940년 대,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일본사회가 패배주의로 위축되어 있던 시절 급성장한 신종교 중의 하나다. 회원 30명으로 출발했으나 1955년 말에는 36만세대, 1970년에 1백만을 헤아리는 부침을 겪었다. 개조(開祖)인 니와노 릿쿄는 세계 종교간대화와 화합을 위해 힘썼으며 그 노력으로 세계종교인평화회의가 만들어지고 이후 종교간 교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한국에는 1978년 문공부에 종교활동을 한 후 미미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2천여 세대의 회원이 있다. 일본 신흥종교 입정교성회의 탄생과 부침, 홯동 그리고 한국의 상황을 2회로 나누어 소개한다. (편집자 주)


                               ▲ 마치 이슬람 사원과 같은立正佼成会(입정교성회) 대성당의 모습



立正佼成会의 한국 활동과 일본 신흥종교의 부침·교리(上)

창립의 배경과 일본 패망후의 급신장
입정교성회은 재가불교 교단으로 가정이나 직장,지역사회 일원으로 생활하면서 마음을 닦고 사회의 일원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것을 목표로 하고있다. 재가종단으로 가정마다 보전(寶前)이라고 부르는 불단이 있다. 보전은 집안에서 가장 청결한 곳에 모시며 정면 중앙에는 「본존」우측에 「개조·법조의 법호」좌측에 「총계명·택지인연계명」을 안치한다. 본존 앞에는 밥,물,차,꽃,과자,과일을 올린다. 아침,저녁으로 보전을 향해 독경공양을 한다. 기도제목으로 아침에는 새로운 서원을 세우고, 저녁에는 하루를 마치는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각 가정마다 있는 보전은 가족 모두의 귀의처의 역할을 한다.

교성회의 창립자 니와노 릿쿄(庭野日敬)는 1906년 11월 15일 신갈현 산촌 마을인 중어소군 십일련 대자관소에서 중농의 차남으로 태어나, 3대가 같은 집에 사는 대가족 생활을 통해 일찍부터 조상숭배의 예절과 가족상호간의 생활태도 등을 배웠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를 짓던 그가 17세되던 1924년 동경으로 올라와 연료상을 하던 석원숙태랑(石原淑太郞)의 집에서 일하게 되면서 부터 그는 온갖 종교신자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고향을 떠나 처음 만난 집 주인 석원은 아국신덕사(石原은 我國信德社)라 하는 칠신신앙과 육요를 접합한 역학으로 인생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집단에 다니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그는 석원으로 부터 역술을 접하게 된다. 그 뒤 1931년 11월에는 그의 장녀가 중이염을 앓은 것을 계기로 근처에 살던 천구불동존(天狗不動尊)을 모시면서 수험도의 가지기도를 행하는 산복 강목매야(山伏 綱木梅野)를 찾아가 기도를 받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그녀의 영술에 감동을 받은 정야(庭野)는 낮에는 장사를 하고 밤에는 강목의 기도소에서 수험도의 수행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수행(水行), 살물(殺物)을 끊고, 화식을 중단하는 등의 수행을 결행한 끝에 반년정도 지나서는 사범을 대신하여 지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한다. 수험도의 수행을 마친 그는 아국신덕사(我國信德社)에서 익힌 점술을 사용하여 모여드는 상담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영술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는 불동강을 열어 장사는 팽개친 채 산복(山伏)으로서의 일에만 몰두하게 된다. 이런 그의 행적을 보다 못한 산복 강목(山伏 綱木)이 찾아와 두가지 일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자, 그는 고민에 빠져 성명학을 하던 소림성고(小林晟高)가 운영하던 대일본홍우회을 찾아가 상담하게 된다. 오히려 小林은 山伏의 일이란 훨씬 과학적임을 설득하여 그는 다시 성명감정을 가계운영과 함께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역학, 성명학, 수험도의 부동수행(不動修行) 등을 전전하던 그에게 일대 전기가 된 것은 그의 차녀가 뇌막염에 걸리게 되면서 부터였다. 당시 이웃에 살던 영우회 신자인 반총(飯塚)이라하는 산파가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도 찾아와 영우회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마침 반총(飯塚)의 권유를 받은 뒤 일주일만에 차녀가 고열이 나면서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즉시 가까운 경응병원(慶應病院)에 달려가 진찰을 하니 기면성 뇌막염으로 손쓸 수 없는 상태라는 진단을 받는다. 낭패에 빠진 그는 어떻게 해서든 딸을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산파가 가르쳐준 영우회 사지부 신정법좌를 지도하고 있던 신정조신(新井助信)을 찾아갔다. 신정으로 부터 선조공양과 총계명에 대해 들은 그는 즉시 영우회에 들어가 총계명을 하고 선조공양을 올렸다. 그러자 차츰 차녀의 병이 눈에 띄게 좋아지면서 1주일 정도 지나자 거의 완쾌되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영우회에 대해 크게 신뢰를 가짐과 동시에 특히 지부에서 행하는 신정(新井)의 법화경 강의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이 당시의 감회를 정야는 이렇게 자서전에서 회고한다.
“법화경 강의를 들으면서 이것이야 말로 바로 내가 찾고 있던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 아무리 그것에 대해 흠을 잡아보려 해도 흠 잡을 데가 없었을 뿐 아니라, 광대무변의 세계 속에서 모든 인간을 하나도 남김없이 구원하는 완전 무결한 구수강으로 느껴졌다. 마음도 육체도 사회도 무엇이든지 남김없이 다 감싸는 것이다. 정말로 엄청난 놀라움이었다. 솟구치는 피처럼 신선한 감동이었다.

스스로 일생의 스승이라 부르는 신정(新井)과의 만남은 법화경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기도 했다. 신정의 법화경 강의는 전통적인 방식과는 달리, 풍부한 인생경험이나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법화경의 가르침을 일상생활 속에서 풀어 가르치는 것이었다. 입회 7개월만에 부지부장이 된 니쯔키요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여 그들을 인도할 목적으로 우유상으로 전업했다. 이 인도생활 중에 1936년 그는 중요한 신앙동지인 장소묘교(長沼妙佼)와 만나게 된다. 그녀는 여름에는 빙과를 팔고 겨울에는 군고구마를 파는 「기옥옥(埼玉屋)」의 여주인으로 그 당시는 자식을 잃고 자신도 만성 자궁내막염으로 고생하고 있던 터였다. 인도활동으로 그녀를 만난 정야는 그녀에게 선조공양을 올릴 것을 권하면서 영우회에 들어 오도록 권유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천리교를 믿고 있던 그녀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정야의 인도가 너무나 간절했기에 일단 會에 들어오기로 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그녀가 정야를 따라 모임에 참가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계명을 내놓아도 좀체로 관심을 두려고 하지도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정야가 장소(長沼)의 선조대대의 계명을 모아 과거장에 써넣는 계명을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달 아침 불가사의하게도 그녀의 복통이 가라앉고 출혈도 멈추었다고 한다. 이 신비체험을 한 뒤 그녀는 영우회의 선조공양을 믿게 되고 신정지부의 회원으로 들어오게 된다. 입회 후 그녀는 신정에게 법화경 강의를 들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정의 부인으로 부터 신을 불러내는 영능술을 익히게 된다.

그 후 정야(庭野)와 묘교(妙佼)는 짝을 이루어 많은 회원을 인도하면서 지부내에서 일정한 권위를 쌓아간다. 그러던 중, 1938년 1월 7일 열린 「영우회 전국지부장회의」가 열려 니와노도 신정과 함께 그 회의에 참석했다. 그 회의는 영우회의 발전전략을 위해 논의하기 위한 취지도 있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1935년 이후 잦아지는 교단 분립을 막고 교단본부의 지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이 회의 모습을 기록한 성회측 자료에 의하면 회의가 진지하게 진행되는 도중에 소곡희미(小谷喜美) 회장이 갑자기 일어나 “자네들은 어느 누구할 것 없이 신자인 주제에 (법화경)설교 따위를 늘어 놓는다 하는데 어떻게된 일인가?”고 하면서 “법화경을 강의하던 시대는 끝났어. 그 따위 짓을 하는 것은 악마야.”라고 질타했다 한다. 이에 정야와 함께 참석하고 있던 신정은 화가 나 자리를 떠 버리고 다음날 아침 정야는 묘교와 상의하고, 석원숙태랑, 신정조신(石原淑太郞, 新井助信)과도 상의하여 영우회로 부터 독립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리하여 1939년 3월 5일 개조(니와노 릿쿄)와 협조(나가누마 미요꼬)는 「대일본입정교성회」를 결성하고 본부는 니쯔키요의 가게 이충에 두고 회장에 국주회원인 촌산일이(村山日裏)를 옹립한다. 이 때 회원은 불과 3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정야는 이미 익히고 있던 성명감정이나 방위감정원을 국주회 회원이었던 촌산일이(村山日裏)에게서 배운 성명학과 기학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 상담자들의 상담에 웅하고, 또 국주회의 법화경론을 배워 법화경에 대한 지식을 넓히면서 꾸준히 신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 미요꼬는 신정부인에게서 배워 둔 영술이 더 발전되어 엑스타시에 빠지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으며, 이것을 통한 영감지도로 또한 신자를 확보해 나갔다. 차츰 고정 신자가 확보되면서 니츠키요는 주로 법화경의 교의 연마에 전념하고, 미요꼬는 신자들의 교화 육성을 맡게 된다. 이러한 역할분담을 통해 교세를 넓혀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던 1941년에는 신자수가 1천여명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미요꼬의 꿈속에서 받은 계시를 바탕으로 현재 교단 본부가 있는 화전본련(和田本堜)에 1942년 5월 7일 본부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고, 니츠키요도 그때까지 경영하고 있던 우유배달업을 중단하고 본부로 이주하여 종교활동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초창기의 순탄한 발전은 1943년 3월 미요꼬의 영감지도가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삼병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는 구류사건으로 약간의 시련을 겪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촌산회장이 물러나고 지부장 반 정도가 회를 떠나게 된다. 그래서 회장에 니츠키요가 취임하고 미요꼬는 부회장을 맡아 회를 이끌게 된다.

종전과 더불어 종교법인령이 공포되면서 나타난 이른바 신종교의 러시아워에는 「대일본입정교성회」도 크게 발전하게 된다. 1945년 회원 세대수가 1,277세대에 이르렀던 교세는 이듬 해에는 3,242, 1947년은 9,542세대로 늘어나게 된다. 1948년에는 명칭도 「입정교성회」로 바꾸고 1950년 10월 1일자로 종교법인으로 등록한다. (삼국유사문화원장·동국대 강사)


立正佼成会의 한국 활동과 일본 신흥종교의 부침·교리(下)

1955년 말에는 36만세대에 까지 이르게 될 정도로 성장을 거듭한 교성회는 1956년 이른바 요미우리(讀賣)사건으로 주춤하게 된다. 그해 1월 25일 요미우리 신문 석간에 「입정교성회의 토지 불법 매점」이 보도되면서, 이 보도를 시작으로 신문에 입정교성회의 신앙생활 내용과 교단운영 실태, 미요꼬의 개인적 문제 등이 계속 보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2월 20일에는 경찰의 본부에 대한 압수 수색이 행해졌으며, 중의원에서는 두차례에 걸쳐 입정교성회의 인권침해 문제로 회장단을 참고인으로 증언을 듣는 일들이 연이어졌다. 이 문제들은 결국 흐지부지하게 결말이 났지만, 같은 해 8월에 발생한 이른바 연판장사건이라 불리우는 니츠기요 배척운동은 교단 내부의 분열을 가져올 만큼의 불씨를 안은 문제였다. 요미우리 보도로 미요꼬가 곤경에 처했을 때, 정야의 애매한 입장표명이 화근이 되어 미요꼬를 회장으로 앉히려는 움직임이 나타나 전반적으로 교단의 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 미요꼬가 병석에 눕게 되자, 이 움직임은 자연히 사라져 교단의 위기는 진정되게 된다. 9월 10일 미요꼬가 죽고, 교단 위기는 안정되었지만 그 해의 신자수는 처음으로 감소되어 세대수는 29만8천으로 감소한다.

교단 창설 이후 최대의 이러한 일련의 위기를 겪게된 데에는 사실상 법화경 교의 중심의 신앙생활 보다는 미요꼬의 영술을 통한 신시에 의존한 신비주의적 요소와 또 그런 신비주의적 주술을 동원한 현세이익 중심의 신앙을 유지해 온 탓이기도 했다. 이런 점을 깨달은 회장 니쯔키요는 1958년 1월 「진실현현」을 선언하여 교리교육을 강화하고 본존관과 행법관을 확립하는 등 회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1960년에는 전국에 교구제를 실시하여 본부의 통제를 강화, 조직화하고 묘교를 기념하여 교단 이름을 「입정교성회」로 바꾸게 된다. 조직의 재정비를 통해 교단의 근대화를 달성한 뒤, 會의 움직임도 개인구제로 부터 사회구제로 그리고 현세이익으로 부터 인격도야를 지향하는 신앙단체 성격을 강화하는 운동과 이념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이후 교단은 매우 순조로운 교세확장과 발전을 이루게 된다.

입정교성회의 교리체계나 의례는 근본적으로는 영우회의 그것과 같다. 선조공양시 독경에 사용하는 청권도 영우회의 청경권과 거의 같은 것이며, 입회시에는 영우회과 마찬가지로 총계명을 받고 그앞에서 조석으로 독경하는 것도 같다. 다만 니츠키요와 미요꼬가 수행했던 모든 종교 곧, 불동수험도, 금신, 칠신, 황신, 구자, 구성, 육요, 성명학, 기학, 천리교, 국주회등의 신앙요소가 혼합되고는 있다. 특히, 미요꼬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녀가 전생에서 생불이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그 영능에 의한 지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뒤에는 일경에 의해 진실현현이 선언되고 본존을 구원실성대은교주석가모니세존(久遠實成大恩敎主釋迦牟尼世尊)으로 삼아 대성당(일본토교 스기나미구 소재)에 모시고 예배함으로써 본래의 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교단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창가학회와는 달리, 일연을 말법시대의 본불로 여기지 않으며, 원래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바로 법화경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되는 것이라고 보아 이제 정야회장선생에 의해 석가가 원래 가르쳤던 것들이 다시 되살아나 진실을 이 세계에 전파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한다.

1965년 제2회 바티칸 공회의에서 불교도로서는 처음으로 초빙되어 로마교황 바올6세와 함께 종교협력 세계평화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 1969년 국제자유종교연맹(LARF)에 본 입정교성회가 종교단체로서 가맹되어 상임이사로 활동.
▶ 1970년 제1회 세계종교자 평화회의(WCRP)가 일본교도(京都)에서 개최되어 이 평화회의의 공동의장을 역임.
▶ 1972년 초대위원장을 거쳐 1979년 WCRP명예의장으로 취임.
▶ 1975년 시카고 미드빌론 바드신학대학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 1976년 아시아 종교자 평화회의(A.C.R.P)를 개최. 의장으로 취임. 미국 뉴케스터 위원회로부터 평화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뉴․케스터슈바이쳐상을 수상.
▶ 1978년 재단법인 「니와노 평화재단」을 창설.
▶ 1979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탬플톤상 수상.
▶ 1981년 국제자유종교연맹(I.A.R.F)회장으로 취임.
▶ 1983년 평화건설자상과 유엔사무총장상을 받았다.
▶ 1990년 WCRP 창립 20주년에 즈음하여 「세계평화의 자유」에 관한 공동성명을 미국의 지미카터(전직 대통령)와 함께 발표.
▶ 1992년 11월 15일 바디칸 로마교황청으로부터 대성 그레고리우스 훈장을 받았다.
▶ 현재 니와노 릿쿄(庭野日敬) 아들 니와노 니찌꼬(庭野日鑛)가 회장으로 1991년 「법등계승」을 받았다.




주요교리
입정교성회의 주요교리는 창립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니와노 릿쿄(庭野日敬)의 독자적인 성명학․기학적인 것과 수험도 내지 진언밀교적 요소가 천구부동신앙(天狗不動信仰)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마음을 바로 잡는다」, 「마음 근성을 고친다」는 가르침은 천리교의 「마음을 바꾼다」, 「마음을 고친다」는 교리에 연원하며, 아마도 장소의 종교체험에서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교명에서 보는 「立正」이란 이 세상에 正法 즉 법화경의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이다. 또한 「佼成」의 「佼」는 신앙적인 교섭과 신자들의 화의 교류를 말하며, 이체동심으로 표현한다. 「成」이란 인격의 완성이며 성불이라는 이상을 들고 있다. 이러한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이 「법좌」이다. 법좌는 교회조직의 한 단위이지만, 그들이 중시하는 바는 법을 중심으로 한 대화의 장으로서의 그것이다. 7-8명에서 많게는 십수명이 한 조가 되어 지도자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둘러앉아 법을 담론한다. 초창기에서부터 계승해 온 이 모임은 본회의 존재 그 자체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 「법좌는 교성회의 생명」이라고 표현한다.

이 조그만 모임을 바른 벗으로 규정하고, 혼자서는 빠지기 쉬운 욕망을 이 벗들이 지켜준다고 본다. 그들과 함께 참회하기를 독려하며 「참회는 마음의 대청소」라고 가르친다. 참회와 인격을 닦는 장이며 모든 사람을 구하는 원천이 되고 화합의 모습인 법좌활동을 중심으로 회장의순교, 회원의 방문포교, 정기간행물 등에 의한 문서포교, 시청각포교, 음악 등의 예술포교 등이 특히 여성교역자를 중심으로 행해진다.

본존은 구원실성대은교주석가가모니불(久遠實成大恩敎主釋迦迦牟尼佛)로 1958년 이를 내외에 선언하면서 부터이다. 교전은 經典(1938, 입정교성회), 法華三部經, 정야일경저 신역 법화삼부경(1964-68, 전10권) 등이다. 의식행사는 어명일이라 하여 본부나 교회에 참배하는 특별한 날이 중요시되는데, 이에는 매월 1일 5일(虛空臟大菩薩), 10일(모교참배), 14일(七面大明神), 15일(釋迦牟尼佛), 28일(八幡大菩薩) 등이다. 이 밖에 신년의 친교로서 회장의 강연이 이루어지며, 3월 5일의 창립기념일, 그리고 불교습속의 연중행사를 취하고 있다.

개조의 법호 개조닛코일승대사(開祖日敬一乘大師)는 법화경의 「일승」정신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갈 용기를 제시한대도사로 표현되고 있다. 협조의 법호는 「협조묘코자도보살(脇組妙佼慈道菩薩)」이다. 「자도」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내밀고 보살의 길을 걸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애로운 어머니 상을 심어준 보살행의 실천자로 보고있다. 협조는 빈곤과 자식의 병사,이혼,중병의 고통, 여려운 가운데 개조를 만나 법화경의 묘음을 터득한 것으로 되어있다. 개조를 도와 입정교성회를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교세현황
포교대회, 교학연수회 등이 마련되며, 기관지인 「교성신문」은 주간지로 160만부, 월간잡지 ‘교성’은 164만부가 발행유포되고 있다. 또한 월간 ‘약진’은 45만부, 여성지 월간 ‘마밀’은 6만부 외에 영문월간 「다마월드」가 발간되고 있다.

사업은 출판사‧도서관‧병원‧영원(공원묘지)‧각종 교육기관‧교역자 양성을 위한 학림‧산업체‧평화재단 등 다양한 기관이 갖추어져 있다. 1945년에 1천 5백명을 밑돌던 신자수가 급속하게 증가한 것은 인구의 도시집중화가 시작되는 1950년대를 기점으로 해서이다. 1950년에 6만, 1960년에 40만, 1970년에 1백만을 헤아리는데, 이 시기부터 대사회적인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969년에 40만, 1970년에 1백만을 헤아리는데, 이 시기부터 대사회적인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969년의 「명사운동」 즉 「명랑한 사회만들기 운동」이 그것이다. 1970년에는 세계종교자평화회의에 거교적인 힘을 기울이고, 세계대회를 기점으로 본부의 보문관에 그 본부를 둠으로써 명실공히 그 운영주체가 되었다. 교세는 1990년 현재 교회 222개(법인 3), 포교소 408개소이며, 교사 14,857명(여자 11,663명), 신자 5,658,327명이다.)

성회는 항상 입회를 세대 목표로 한다. 여기서 가장 이상적인 가족 모델로 제시하는 것은 가정에서 선조공양을 함께하고 가족 모두가 신자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가정이다. 아울러 교단 자체의 교의 교육기관을 두어 의무과정을 이수한 자에게 교사보, 교사, 정교사 자격을 갖추도록 하고 있는 등, 교단의 교권단체로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독립적인 교육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복지활동에 참여하는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사회복지교육」, 기업경영관리자를 위한 「법좌연구회」 「장년부교육」등이 있으며, 교성카운셀링연구소가 주관하는 카운셀러 양성강좌 등 각종 직능별‧계층별 교육을 본부가 주관 실시하고 있다. 교세는 1989년 기준 신도 624만여명에 이르는 창가학회 다음가는 대교단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교단 산하 기관으로서 교성학원을 설립하여 그 산하에 남여고등학교, 간호전문학교 등을 두고 있으며, 연간 입원환자 6천여명을 수용하는 교성병원을 설립 운영하며 「신종연」을 통해 의회진출을 꾀하기도 한다.

그밖에 해외포교에도 나서, 1959년 브라질, 1979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그리고 1982년에는 한국과 뉴욕에 교회를 세운다.

▲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한국 입정교정회는 주 경전으로 법화경을 기본으로 하는데 주한 일본인과 한국인들이 매월 1일, 4일, 10일 15일에 법회를 연다.



한국에 입정교성회는 1978년 12월 5일 문공부에 종교활동 신고후 서울 연희동에 법좌소를 설치했다. 다음해 2월 25일 재일동포 강신극법사의 주선으로 연희동 81-1번지에 입불식(점안식)을 통해 포교을 시작했다. 현재는 서울시 용산구 한남대로 8길에 위치해 있다. 포교의 한 전기라 생각 물신양면 후원하던 입정교성회는 이후 뚜렷한 성과없이 침체한 것에 자극 새로운 포교지를 물색 한 후

▶ 1981년 부산과 마산에 법좌소 설치 1982년 3월 5일 재가불교 한국입정교성회를 독립 창립
▶ 1983년 5월 26일 대한불교 법화종에 고성사를 등록
▶ 1985년 6월 15일 부산도량 건립
▶ 1987년 12월 4일 서울도량 건립
▶ 1988년 5월 29일 석가모니세존을 본존으로 안치
▶ 1996년 니와노 릿쿄 선생의 법화경을 <법화경의 새로운 해석> 경서원에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현재 2천여 세대의 회원(신도)를 확보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도 숫자는 500여 세대에 불과하다. 주요행사는 열반절(음 2.15), 석가탄신일(4.8), 우란분절(7. 15), 석가성도재일(12. 8)이 있다.







출처/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동국대 강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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