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눈물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유행가

목포의 눈물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사랑

깊은 밤 조각 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임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우리나라 근대 대중가요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목포의 눈물>은 1935년에 발표되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쳤다.  5만 장 이상의 레코드가 팔려 나갔으니, 이는 오늘날로 따지면 100만장과 맞먹는 수준이다. 


조선일보와 오케레코드가 함께 주최한 향토노래 현상모집에 와세다대학 출신의 20대 무명 시인인 문일석(文一石)의 글이 당선되자 손목인(孫牧人)이 곡을 붙이고 1935년 9월 10대 후반의 이난영(李蘭影)이 노래한 ‘목포의 눈물’이다

처음에 응모할 때는 ‘목포의 사랑’이었고 음반으로 나올 때 ‘목포의 눈물’로 발표됐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의 대표곡으로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의 상징노래가 되었고 해태타이거즈 응원가이자 호남의 제2의 애국가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다. 


노래 가사처럼 1930년대 중반, 항구도시 목포는 쌀과 목화를 일본으로 실어 나른 창구였다.  쌀을 수탈당한 농민들이 하나 둘 고향을 버리고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떠나는 이별의 장소이기도 했다.  앞서 발표된 “타향살이 몇 해 던가 손꼽아 헤어 보니"로 시작하는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고복수 노래의 타향살이 > 도 이들이 떠나간 타향에서 대유행을 일으켰다. 만주 용정에서의 공연 때 청중도 울고 가수도 울고, 극장 만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울산 출신인 고복수를 찾아온 부산 출신의 한 여인이 고향소식을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트로트, 일명 뽕짝은 쿵짝쿵짝 하는 박자와 독특한 선율, 장식음이 특징인 일본 창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왜색가요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정서를 일본인의 정서로 종속시키려 했다.  일제강점기에 유행했던 대중가요는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  체념과 순응속에서도 민족의 정서와 생활을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비근한 예로 조선총독부가 1933년 발표한 취체령(取締令)에 의거 사전검열을 받아  이 노래를 발매 금지했다.  2절 가사 첫줄의 '삼백연 원앙풍(=원앙새처럼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지는 것을 원망한다는 뜻)'이란 구절을 사람들이 '삼백 년 원한 품은 이라고 부르는 게 문제가 되었다.  작사가의 숨은 의도가 담긴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이별의 설움은 국경 너머에 까지 일파만파 국민가요로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를 문제 삼자 ‘삼백연(三百淵) 원안풍(願安風) 노적봉 밑에’로 가사를 변경했다. 




삼학도(三鶴島)는 세 마리 학의 섬이라는 뜻이다 유달산(儒達山)은 노령산맥의 마지막 봉우리로 기암절벽으로 싸여 있어 호남의 개골산(皆骨山)이라고 한다.  노적봉(露積峯)은 유달산 기슭에 있는 매우 큰 바위를 말한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을 승리하고 노적봉 바위를 볏짚으로 덮어 군량미가 산처럼 보이게 하였다.  새벽에 백토를 바닷물에 풀어 쌀뜨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들이 스스로 물러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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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