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풍년을 기원하던 봄맞이 의식

새해 풍년을 기원하던 봄맞이 의식

 

새해 풍년을 기원하던 봄맞이 의식 지금은 양력 3월부터 5월까지를 봄이라 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음력 1월부터 3월까지를 봄이라 했다. 동지를 지나면 음의 기운이 약화되고 양의 기운이 커지면서 만물이 생동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옛 천문학 문헌에는 동지를 설로 삼아야 한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동지 팥죽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하는 말도 전한다. 농촌에서는 설부터 대보름까지는 새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를 치렀고, 대보름부터 시작해 2월 초하루 무렵에는 본격적으로 새해 농사를 준비했다.

 

01.경직도 10폭 병풍 (耕織圖十幅屛風) 농사 짓는 일과 누에 치고 비단 짜는 일을 그린 풍속화.

정월 대보름 달맞이, 땅에 거름주기, 논밭 갈기 등이 묘사되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02. 안동차전놀이 (安東車戰놀이)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안동지방에서 행해지던 민속놀이.

대보름날이 되면 마을을 동서로 나누어 편을 갈라 대치하고 서서 승부 겨루기를 한다. 이때 농악으로 흥을 돋운다. Ⓒ문화재청

 

남부지방에 성행했던 볏가리제

조선 후기 여러 『세시기』에는 볏가리제를 ‘짚을 둑기(纛旗) 모양으로 묶고 그 안에 벼·기장·피·조의 이삭을 넣어 싸고 목화를 그 장대 끝에 매단 후에 새끼를 사방으로 벌려 고정시킨다’고 했다. 또 화적(禾積) 등이라 표기하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라 했는데, 150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이자(李, 1480~1533)의 일기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으므로 그 기원은 결코 짧지 않다.

 

2월 초하루가 되면 제사를 지낸 후에 장대에 넣어둔 곡식이 물에 불었으면 풍년이 들 것이라 점을 쳤다. 『세시기』에는 장대 꼭대기에 넣어 두었던 곡식을 내려 떡을 쪄서 노비들에게 나이만큼 먹인다고 했다. 조선시대 기록에 볏가리제를 행하는 지역에 대한 언급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최근까지 볏가리제가 성행했던 지역은 충청남도 서북 해안지역이었다.

 

대보름의 달맞이와 달집태우기

달맞이는 새해의 재수를 빌고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었다. 『동국세시기』에는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달을 보는데, 남보다 먼저 달을 보면 재수가 있다고 한다. 달빛의 색깔, 뜰 때의 모양, 크기, 출렁거림, 뜨는 위치의 높고 낮음 등을 보고 점을 치기도 한다’고 했다. 『열양세시기』의 내용도 비슷하다. 『세시기』에는 횃불을 들고 산에 오른다고 했으나, 우리에게 익숙한 풍속은 달집태우기다. 달집을 크게 만들어서 보름달이 떠오를 때 불을 지르고 다 타서 꺼질 때까지 풍물과 함께 주위를 돌면서 소원을 빈다. 달집이 한꺼번에 잘 타오르면 풍년이라 했고, 달집이 타서 넘어질 때의 방향과 모습으로 그해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줄다리기, 차전놀이, 고싸움 그리고 쇠머리대기

줄다리기는 여러 계절에 행해졌으나, 정월 대보름에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논농사 위주였던 중부 이남 지역에 많이 분포했다. 마을 단위의 줄은 크지 않지만, 기지시와 영산처럼 장터에서 여러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경우에는 한 달 전부터 줄을 꼬기도 한다.

줄은 흔히 암·수로 구분된다. 그리고 수줄 머리를 암줄 머리 안으로 넣고 ‘비녀목’을 꼽아서 결합한다. 여성이 풍요를 상징했으니, 암줄이 이겨야 함은 당연했다. 그런 까닭에 수줄이 유리하면 할머니들이 작대기로 남자들을 때리면서 줄을 당기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때로는 오일장의 상인들이 대규모 줄다리기를 기획하기도 했다. 충남 당진시의 기지시 장터에서는 ‘물 위’와 ‘물 아래’로 구분된 마을 주민들을 참여시켰고, 줄다리기를 ‘줄 난장’이라 불렀다. 이 행사가 있는 해에는 ‘양조장의 샘물이 마르고, 구경을 하다가 아이를 출산한 일화’가 전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줄다리기 승부가 갈린 다음에는 앞다투어 줄을 끊어가기도 했다. 아들을 낳을 수 있고, 복이 찾아온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줄로 마을 당산의 신체(神體)를 감싸기도 하고, 마을 동구 수구막이로 쌓는 경우도 있었다. 줄다리기는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줄다리기 외에도 정월 대보름에 편을 나누어 승부를 겨루는 놀이는 적지 않았다. 『동국세시기』에는 ‘춘천의 풍속에 외바퀴 수레를 만들어 마을별로 편을 지어서 승부를 겨루는 차전놀이[車戰]가 있어서 패하는 쪽이 흉하며, 가평지방에서도 이러한 풍속이 있다’고 했다. 문헌에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안동지방에는 ‘동채싸움’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다. 동부와 서부로 나뉜 장정들이 팔짱을 끼고 어깨로 밀어붙여서 상대편 동채를 땅에 닿게 하면 승부가 난다. 안동의 동채싸움은 ‘안동차전놀이’라는 이름으로 1969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03.광주 칠석 고싸움놀이 (光州 漆石 고싸움놀이) 주로 전라남도 일대에서 정월 대보름 전후에 행해지는 격렬한 남성집단놀이다. 고싸움의 고란 옷고름, 고풀이 등의 예에서 보듯이 노끈의 한 가닥을 길게 늘여 둥그런 모양으로 맺은 것을 말하며,

2개의 고가 서로 맞붙어 싸움을 벌인다 해서 고싸움이라 부르는 것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청

 

광주 칠석 고싸움놀이는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에서 행해졌으며, 국가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하칠석 주민들이 합의한 후에 정월 열흘 무렵 아이들의 고샅 고싸움부터 시작되며 15일이 되면 놀이가 절정을 이룬다. 차전놀이와 비슷하게 줄패장의 지휘에 따라 상대편 줄패장을 밑으로 밀어내어 승부를 가린다. 영산쇠머리대기는 나무로 만든 소를 가지고 겨루는 놀이다. 쇠머리대기 또한 상대방을 밀어붙여 눌러서 승부를 가린다. 이 놀이는 1969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돌과 몽둥이로 승부를 가리는 편싸움

지금은 중단된 편싸움[邊戰]도 풍흉을 점치는 풍습이었다. 『동국세시기』에는 ‘삼문(三門) 밖과 아현 주민들이 편을 갈라서 몽둥이와 돌로 싸운다. 삼문 밖 편이 이기면 경기 일대에, 아현이 이기면 팔도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종종 피를 보고 죽기도 하는데, 관에서 금해도 고쳐지지 않는다. 성 안과 성 밖에서도 행하고, 경상도 안동에서는 정월 16일에 돌팔매질을 하며, 황해도와 평안도에서도 정월 보름에 그런 풍속이 있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동에서는 정월 16일에 돌팔매로 승부를 겨루는 풍속이 있다고 했으니, 그 유래는 결코 짧지 않다.

 

2월 머슴날과 삼짇날의 풍습

정월 대보름을 지나면서 농민들은 새해 농사를 준비하느라 바빠지기 시작한다. 이날과 관련해 ‘머슴은 1년 내내 일할 생각에 작대기를 두드리며 울고, 며느리는 일꾼들 밥을 해서 낼 생각에 부엌 문고리를 붙잡고 운다’는 속담이 전한다. 그런 까닭에 2월 초하루에는 머슴들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농번기에 접어든 후에도 3월 초까지는 다소 여유가 있다. 이때에는 남성들은 답청(踏靑)을 하고, 여성들은 삼짇날에 화전(花煎)을 한다고 했다. 여성들이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붙이는 전통은 20세기 중후반까지도 많이 이어졌다.

 

04.서산 운산 대산리 볏가리제 Ⓒ황헌만      05.1972년 기지시줄다리기 광경 Ⓒ기지시줄다리기보존회

06.영산쇠머리대기 (靈山쇠머리대기)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대보름축제를 배경으로 전승해온 대동놀이 Ⓒ문화재청

 

이제는 민속축제에서 체험해야 하는 봄맞이 의식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나라는 산업사회로 급격하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농촌은 고령화되었고, 트랙터와 콤바인은 물론이고 경비행기로 농약을 살포하는 일부 영농단체의 대규모 농사에서 예전 농사를 연상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농촌에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는 있지만, 관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활성화된 사례는 문화재로 지정된 행사가 민속축제로 변모한 경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활성화된 민속축제도 있으나, 2020년을 살고 있는 우리 국민에게 익숙한 새해맞이는 일출을 보는 행사이고 봄맞이는 매화·산수유·철쭉과 진달래·벚꽃 등으로 대표되는 봄꽃 축제인 듯하다.

글. 오석민 (지역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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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