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피폭의 현장, 형무소 자리에 들어선 평화공원

나가사키 피폭의 현장, 형무소 자리에 들어선 평화공원

 

나가사키 피폭의 현장, 형무소 자리에 들어선 평화공원 도시가 전쟁, 재해 등으로 대량 파괴된 예는 독일의 드레스덴, 우리나라의 서울 그리고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 등이다.  그 중 일본의 경우는 원자폭탄, 먹구름 사진의 현장으로 각인되고 있다.  항구도시, 나가사키역은 일본에서도 드문 종착역이다.  역 뒤쪽으로 항구가 연접해 있다.  나가사키껜 (縣)의 나가사키시는 400m정도의 구릉들이 해안을 따라 둘러싸고 있다.  항구 쪽만 터지고 나머지는 모두 산들로 싸여 있다.  도심도 데지마(出島)를 핵심으로 길게 발전되어 있다.  데지마 주변에서는 원폭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데지마는 아주 오래된 역사의한 켜가 되기 때문이다.  원폭은 벌써 75년전의 일이다.  직접 경험한 분도 이제 거의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너무 힘이 넘쳐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 평화기념상 ©셔터스톡

 

우라가미 성당의 1951년 풍경 (사진엽서). 파괴된 성당 잔해, 정면 일부만 남아 있다. (자료: 월간 東京人, 1995.8) © 김정동

나가사키 항구의 미쓰비시 조선소, 나가사키 유람기념 엽서이다. 1940년 5월 26일자 소인이 찍혀 있다. © 김정동

 

나가사키 75년 전

나가사키에는 군수공장이 많았다.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군사도시였다.  미쓰비시가 그 대표적인 회사였는데 병기(兵器)를 생산해내는 회사였다. 그 들은 여기서 군함을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태평양 쪽으로 나가는 전투함들이었다.  1940년에는 ‘무사시(武藏)함’을 건조하고 있었다.  소위 성전(聖戰)을 치르기 위해서라고, 그들은 말했다.  미국이 그 공장들을 놔둘 리가 없었다.  나가사키 시내에는 특고(特高)경찰들과 군인들이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군사 무기 생산 공장이 있는 곳이라 비밀 보안에 신경을 쓴 것이다.  병기공장을 보지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창고를 지어 가리기도 하였고 높은 곳에는 쉽게 오르지도 못하게 했다.  치안유지법이 점점 강화되는데 요주의 인물들은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1939년 7월부터 일제의 국민징용령에 의해 16~50세 사이의 조선인 강제 징용이 시작되었다. 여기 미쓰비시 조선소에 조선인 노동자들의 땀과 피가 배어 있는 것이다. 미쓰비시 조선소에서는 항공모함, 군함, 구축 함 등을 만들었는데 1945년 1월 현재 조선인 징용공 3,473명이 노역당하고 있었다. 조선소 전체인원의 9%를 우리 조선인 징용자로 체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내 원폭의 피해자가 되고 만 것이다.

 

나가사키의 그날

1945년 8월 9일, 목요일 그날은 날씨가 너무 좋아 전시중임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강변을 따라 줄지어선 각종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만이 바쁜 것을 알리는 정도였다.  오전 11시 2분, 마리아나 제도 티니안섬으로부터 날아온 미군 B29기가 나가사키시 중심 상공, 북쪽의 이 공장지대에 폭탄 1개를 투하하고 ‘U’턴해 사라졌다.  그것은 속칭 패트 맨(Fat Man, ‘살찐 남자’)이라 불렸는데 바로 원자폭탄이었다.  히로시마 이후 3일만의 일이었다.  일본으로서는 두 번째 피폭이었다.  ‘나가사키의 종(鐘)’으로도 사랑받던 역사 도시 나가사키는 일순 폐허가 되었다.

 

나가사키에 투하직 후 생겨난 거대한버섯구름

 

원자폭탄 투하 후 폐허가 되어버린나가사키

 

사실 나가사키는 원폭 투하계획지, 즉 맨해튼계획지에 있지도 않았다.  네 곳은 히로시마, 고쿠라(小倉), 니가타(新潟) 그리고 교토(京都)였다.  교토는 네 번째였다.  그러나 교토 대신 나가사키가 피폭된 것이다.  당시 나가사키에는 외국인의 거주지가 있어 후순위로 밀렸으나 무기공장이 많아 두 번째로 선택된 것이다. 공군 조종사의 의견도 컸다.  교토는 고도로 문화재가 많아 덕을 본 것이다.

 

나가사키 형무소 지소. 그날 이후 대부분의 현장은 지어졌다.  ©구글 나가사키 항 데지마 옛 그림 © 김정동

 

원폭 투하 중심, 즉 폭심(爆心)은 우라가미지구(浦上地區) 일대였다(현, 松山町 171, 당시는 駒場町).  이는 미쓰비시 우라가미 공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폭은 나가사키 중심지 상공 530m지점에서 작렬했다. 투하한 지 40초 후였다. 섬광은 3000~4000℃의 고열을 일으켰다. 구름과 폭풍이 일었다.

나가사키 시민 약 15만 명이 살상되었다.  그중 사망자는 7만3천884인이었다.  미국 측(미국전략폭격조사단)은 3만4천 명으로 추정했다.  모든 사망자 기록은 불확실하다.  당시 나가사키시 인구는 약 21만 명이었다.  피해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죄 없는 어린이들의 죽음은 더 슬픈 일이었다.

여기에 강제 연행돼 군수공장, 탄광 등에서 피땀을 흘리던 우리 동포들도 애꿎게 죽어갔다.  나가사키에는 한국인 2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중 9천여 명이 원폭으로 죽었다.  생존자 중 8천 명은 귀국, 2~3천 명 정도가 일본에 남았다.  그 후 귀국한 피폭자 2천500여명도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았다.

 

  평화공원 시설 어느 곳에도 한국인 피해에 대한 언급은 었다.

우라가미 성당 잔해 정면 일부만 남아 있다.

(1951년 풍경) © 김정동
 

평화공원의 평화는 무슨 의미

전쟁 말기가 되며 일본 형무소들의 상황도 엉망이 되고 있었다.  115개에 달하던 형무소 시설도 열악하고 식량 사정은 악화되었다.  피폭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형무소도 마찬가지였다.  행형 제도는 무력화되었다.  히로시마 형무소 청사와 공장이 피폭되고 살아남은 죄수들은 도주했다.  나가사키 형무소 우라가미 형무지소는 폭심에서 200-300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피폭과 동시에 전 시설이 붕괴되었다.  그날 이 형무소에는 134명이 있었다. 그 중 수형자는 81명이었고 나머지는 직원 등이었다. 지소장과 직원 18명이 모두 사망했다.  관사에 거주하던 직원 가족도 45명이 죽었다.  81명의 죄수 중에는 한국과 중국의 죄수 46명이 끼어 있었다.  인근 공장에서 일하던 수형자 28명도 행방불명되었다.  그날 그곳에서 폭사한 한국인은 13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 구치되어 있던 한국인 중에는 의열단원 원심창(元心昌)과 2명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1933년 3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아리요시 아키라(有吉 明, 1876~1937) 영사를 암살하려했던 혐의로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1932년부터 주중(華) 공사였다(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번역실, ‘근대 來華 외국인명사전’, 18쪽, 1981, 중국사회과학출판사).

그들은 같은 해 7월 나가사키 지방재판소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원심창과 또 한 사람은 무기징역,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15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원심창이외의 행방은 아직 모른다.  카지무라 히데키의 자료에 의하면 원심창은 살아남아 1946년 10월 박열, 이강훈과 함께 조선거류민단을 창단했다(카지무라 히데키, 김인덕 옮김, ‘재일조선인운동, 1945-1965’, 30쪽,1994, 현음사).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날을 맞았던 것이었다.

 

‘추도(追悼)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의 비 하나가 우리를 맞고 있다.  시민 그룹의 노력에 의해 그나마 세워진 것이라 한다.  원폭 이후 30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은 그것마저 없었다.  피폭 직후, 원폭의 피해가 바로 드러난 것은 아니다.  전시이기도 했고, 상황이 긴박해서 이를 조사할 여력도 없었다.  당시 지역 신문인 <나가사키 신문>, 그리고 도 보도하지 못했다.  1945년 패전후는 GHQ의 검열하에 있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휴전이 된 후에야 조금씩 그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3년 여름 미일 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이후 조사가 시작되었다.  1955년 10년이 되었을 때 여러 조사 행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미 10년간 피폭 현장은 대부분 사라졌다.  1971년 8월 9일 ‘폭심지 복원(復元)운동’이 시작되었다.  나가사키종합과학대학(사립) 건축학과의 히비노(日比野正己)교수에 의해 ‘원폭유실건조물의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가 나가사키에 갔을 때 원폭 피폭상황을 그나마 볼 수 있게 된 것은 그 교수 덕분이다.  조선인 피해자가 드러난 것도 그 이후였다. 따라서 한일 간 회담 때는 그 피해규모를 서로 잘 모르고 진행한 것이다.  1975년 재한피폭자의 현지 조사가 처음 이뤄졌다.  이후 1979년 11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조선인 피폭자 조사단’이 만들어졌다.  히로시마보다 나가사키가 먼저 조사되었다.(1979년 11월 2일~8일)

 

평화공원과 처형장

현재 평화공원이 있는 곳은 형무소 자리였다.  그 형무소는 나가사키 형무소의 우라가미 형무지소(刑務支所)였다.  형무지소는 1927년 8월 29일 개소되었다.  부지는 2만 평의 비교적 큰 형무소였다.  나가사키 형무소 (本所)는 인근 이사하야시(諫早市)에 있었다. 피폭 후 그곳은 버려져 있었다.  형무소 흔적은 그즈음 철거되고 나머지는 흙으로 덮어버렸다.  형무소의 사형장 유구(遺構)가 해체 후 40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공원에 1992년 1월 지하 주차장을 만들며 지하를 파들어가다 사형장 유구가 나온 것이다.  사형장의 아랫부분이니 교수형이 치러진 시체가 잠시 내버려져 있던 곳이다. 이미 그 자리에는 평화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사형장 터라니……. 평화공원의 이미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나가사키 시장은 이를 없애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일부 뜻있는 시민 단체가 이 형무소 사형장 유구를 보존하자고 했을 때 시장은 이를 별 볼 일없는 것이라며 철거해버렸다.  지금 형무소 잔적(殘跡)에 작은 동판 붙인 기념판 하나가 있을 뿐이다.  1952년 8월 처음 위령제(慰靈祭)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원폭으로 죽은 7만5천 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祭)였다. 그 후 매년 8월 9일 11시 2분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지금은 그곳들이 잘 보이는 언덕 위에 ‘평화공원’이 있다.  1951년 나가사키시는 이곳 평화공원을 주축으로 하는 국제문화도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후 나가사키시에는 매년 6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그중 여기 평화공원에는 2백만 명이 들른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반핵이다.

 

평화공원 시설 어느 곳에도 한국인 피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징용 한국인의 피해는 알 것 없었다.  공원 한 모퉁이에 재일 한국인들이 세워놓은 한국인 피폭자 추모비가 있다.  이 초라한 비석에는 ‘2만 명이 피폭됐고 그 가운데 1만 명이 사망했다’ 라고 써 있었다.  폭심지에 세워진 것이 나가사키 국제문화회관이다.  히로시마의 것과 같이 원폭 피해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는데 실감나는 전시품들이었다. ‘억울하게 얻어맞았다’ 그것뿐이었다.

 

그 수용동 쪽에 현재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그 동상은 이곳에 온 사람들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이른바 평화기념상이다.  이 동상은 1955년 8월 제막되었다.  5년간에 걸친 작업이었다.  동상은 생각보다 크고 둔중한 느낌이었다.  비싼 청동제였다(北村西望 작). 높이는 9,7m, 대좌는 3,9m였다.  옷을 다 벗은 청년이 장발을 뒤로 내리고 앉아 있는 것이 어딘가 부조화스러웠다.  일본인들도 너무 커서 괴기하고 추하다(醜怪)고 하고 있다.  글. 김정동 (우리근대건축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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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