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첨단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조선의 첨단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우리는 조선시대에 어떤 무기를 사용했는지 많이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조총이라는 신무기에 놀라서 조선군이 혼비백산 했다고 어림짐작할 때가 많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한양이 함락되는 등 개전 초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건국 이후 꾸준히 개발한 각종 화약무기를 적극 활용하여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01. '귀신폭탄'이란 별칭으로 알려져 있는 보물 제860호 비격진천뢰

02. 무장현읍성지도, 2018년 11월 전북 고창군에 위치한 무장현 관아와 읍성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11점이나 되는

비격진천뢰가 출토되었다.

03. 보물 제858호 중완구는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였던 화포인 완구 중 하나이다.

 

적을 두려움에 떨게 한 ‘귀신폭탄’

조선시대에 사용한 화약무기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아마도 가장 유명한 무기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일 것이다.  이 무기는 ‘적들이 가장 두려워한 무기’로 평할 정도였으며, 흔히 ‘귀신폭탄’이란 별칭으로 알려져 있다.

비격진천뢰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징비록』, 『향병일기』 등 각종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데, 『징비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 비격진천뢰를 성안에 대고 쏘니 객사(客舍) 마당에 떨어졌다.  적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서로 다투어 모여들어 구경했다.  조금 있더니 폭탄이 속에서 저절로 터져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폭음이 나면서 철편이 무수히 흩어지니,  여기에 맞아 즉시 죽은 자가 30여 명이요, 직접 맞지는 않았어도 놀라서 쓰러지는 자가 많았다. . ” 이것은 일본군에 함락되어 있던 경주성을 탈환한 전투에 관한 것으로, 비격진천뢰를 활용하여 승리한 첫 번째 전투기록이다.  이를 통해 비격진천뢰가 포탄이었고, 목표물에 도달한 후 일정시간이 지난 후 폭발하는데,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내부에 있던 철편이 사방으로 날아가 박혀 인명을 살상했던 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포탄은 돌포탄 아니면 통나무 화살 등 대부분 목표물까지 날아가서 충격을 준 이후에 추가적인 작용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익숙하였기 때문에 적은 진지로 날아온 이 물건을 단순한 쇠공 정도로 여겼을 것이고, 그 와중에 터지니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비격진천뢰의 구조는 『융원필비』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몸통은 무쇠로 만들며, 내부에는 화약과 철편· 죽통이 들어가는데, 죽통 안에는 나선형으로 홈을 판 나무(목곡)를 추가로 끼워 넣는다.  그리고 도화선을 목곡에 감는데, 감는 숫자에 따라 폭발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서 빨리 터지게 하려면 10번, 느리게 터지게 하고 싶으면 15번을 감았다는 것이다.  내부에 심어진 죽통과 목곡이 현대적인 의미의 신관인데, 포탄 바깥에 나와 있는 도화선에 불을 붙여도 목곡에 감겨 있는 도화선이 다 타들어가기 전까지는 포탄 내부의 화약에 불이 옮겨 붙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격진천뢰는 불을 붙여도 폭발하기까지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화포로 장전·발사 할 수 있었으며, 안쪽으로 심지가 타들어가기 시작한 이후에는 빠르게 날아가도 중간에 불이 꺼질 위험은 적었던 것이다.  기존의 진천뢰는 사람이 직접 던져야 해서 무거운 재질을 사용하기 어려웠지만, 비격진천뢰는 화포로 발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외부 재질도 무쇠로 만들고, 좀 더 크고 무겁게 만들 수 있었다.  또한 목곡에 도화선을 감는 횟수로 폭발 시간을 예측할 수 있는 점을 활용하면 적에게 가장 타격을 줄 수 있는 시간에 맞춰 발사하여 폭발시킬 수 있었으며, 따라서 비격진천뢰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시한폭탄이었다.

 

04  비격진천뢰의 구조 (백제군사박물관)

 

베일에 싸여있던 비격진천뢰, 그 실마리를 풀어줄 열쇠

이렇게 비격진천뢰는 우리나라 화약무기사에 있어 획기적인 것이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자료로는 언제부터 만들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자료를 통해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인데,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였던 화포인 완구 중 하나인 보물 제858호 중완구의 표면에는 “萬曆十八年九月日營鐵成震天雷焉里重八十五斤尙州浦上匠李勿金(1590년 9월 상주포의 장인인 이물금이 제작하였으며, 진천뢰를 발사한다.)” 라고 적혀 있어 적어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는 비격진천뢰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비격진천뢰는 경주성전투, 진주대첩, 행주대첩 등에 적극 활용되어 임진왜란의 초기 패배를 딛고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1813년 『융원필비』, 1869년 『훈국신조군기도설』이란 책에 형태와 사용법이 자세하게 적혀 있는 점에서 조선시대 말기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중요한 비격진천뢰이지만 그 유명세에 비해 남아 있는 자료는 많지 않았다.  창경궁에 보존되어 전해져 왔던 1점이 보물 제860호로 지정되었고, 이외에는 장성군 석마리·하동군 고하리·창녕군 화왕산성·진주성 등에서 1점씩 출토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 비격진천뢰들은 모두 내부 부속품은 손실된 상태로 화약이나 철편 등은 없어지고, 외부 껍질 즉 탄피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2018년 11월 전북 고창군에 위치한 무장현 관아와 읍성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11점이나 되는 비격진천뢰가 거의 온전한 상태로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 출토품은 많은 학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선, 내부에 화약이나 마름쇠 등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고, 지금까지 전해져 온 비격진천뢰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던 뚜껑 부분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커 그림이 아닌 실제 유물로 비격진천뢰의 구체적인 구조 및 사용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2018년은 노량해전 승리로 임진왜란이 끝난 지 7주갑(七周甲)에 해당하는 해였다.  이러한 때에 임진왜란 당시 맹활약한 비격진천뢰가 대량 출토되었다는 점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 발굴된 비격진천뢰를 바탕으로 관련 연구를 진행하여 이 화약무기의 실체에 대해 좀 더 밝혀지기를 바란다.

자료출처 : 글. 임영달(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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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