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의 사당 의기사(義妓祠)와 의암(義巖), 그리고 의암사적비 답사

2019년 10월 19일, 진주에서 개최된 문화재지킴이전국대회에 참석하고 진주성답사 에서..

논개의 사당 의기사(義妓祠)와 의암(義巖), 그리고 의암사적비..

 

 

<의기사(義妓祠)>

경남문화재자료 제7호(1983년7월20일)인 논개의사당 의기사(義妓祠)는 진주성 촉석루 경내 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사당이다.

주논개(朱論介)의 본관은 신안이며 전북 장수출신이다. 아버지는 주달문이고, 어머니는 허씨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로 맞배지붕이며, 안에는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화백이 그린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다.

 

1721년(경종 1년)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崔鎭漢)이 지역민 등의 요구와 유몽인(柳夢寅)의『어우야담(於于野談)을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고, 1740년(영조 16년)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건의로 건립되었다. 1779년(정조 3년)에 경상우병사 홍화보(洪和輔)가 낡고 부서진 곳을 수리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고, 사위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게 ‘의기사기(義妓祠記)’를 지어 걸도록 하였다.

義妓祠記 - 다산 정약용 (茶山 丁若鏞)

蠻海東嗟日月多 - 오랑캐의 바다를 동(東)으로 바라보니 숱한 세월 흘렀어라.朱樓迢遞沉山河 - 붉은 누각(樓閣) 은은(隱隱)하게 산하(山河)에 잠기인 듯,花潭舊照佳人舞 - 꽃 핀 못에는 지난날 미인의 춤이 비치고畵棟長留壯士歌 - 단청(丹靑) 매긴 기둥엔 장사(壯士)가 머무는 듯,戰地春風回草木 - 싸움터의 봄바람은 초목 끝에 감돌고荒城夜雨漲烟波 - 낡은 성 밤비에 강물이 불어난다.只今遺廟英靈在 - 지금(只今)도 남겨진 사당(祠堂)에 영령(英靈)이 계시온 듯銀燭三更酹酒過 - 삼경(三更)에 촛불 밝히고 강신제(降神祭)를 올리네.상기시는 「다산문집14권」에 실려있다, 진주성 촉석루 옆 논개 사당 의기사(義妓祠) 편액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의 의기사기(義妓祠記)가 걸려있다. 의기사는 창건 이후에 몇 차례의 중수(重修)와 재건(再建)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기사가 창건 된지 40년이 지난 뒤인 1799년 진주병사 홍화보(洪和輔)에 의해 한차례 중수(重修)를 하게 된다. 이때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의기사 기문(記文)이 처음으로 작성된다. 다산은 홍화보의 사위로 당시에 진주에 머물고 있던 장인인 홍화보를 방문하러 왔다가, 마침 중수를 끝낸 의기사의 기문을 부탁 받은 것이다.당시 진주를 처음 방문한 다산은 약관(弱冠)에 불과한 나이였지만, 이미 문명(文名)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의기사의 보수와 함께 논개의 사연을 들은 다산 정약용은 장인 홍화보의 명에 의해 의기사 기문을 짓고 감회를 읊은 시 한 수를 덧붙인다.다산의 시문집 제14권 의기사기(義妓祠記)를 보면 ‘사(祠)가 오래도록 수리를 하지 못하여 비바람이 새었는데, 지금의 절도사(節度使) 홍공(洪公)이 부서진 것을 고치고 새롭게 단청(丹靑)을 칠한 다음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하게 하고, 자신은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촉석루(矗石樓) 위에 걸었다’고 적고 있다.다산연보(茶山年譜)에 의하면 다산이 진주에 처음 방문한 이때(1780년)가 춘3월 호시절(好時節)이어서 장인 홍화보와 함께 남강 물에 배를 띄우고 뱃놀이를 하기도 하고, 또 촉석루에 올라 기녀들이 추는 진주검무(晉州劍舞)와 포구락무(抛毬樂舞)를 감상하고 진양의 풍광을 즐기기도 했다한다. 이 때 남긴 시가 「촉석루회고(矗石樓懷古)」 「배외구홍절도범유(陪外舅洪節度帆遊)」와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 등인데 다산이 장인 홍화보 절도사와 함께 뱃놀이를 하면서 읊은 시 ‘배외구홍절도범유’가 유명하다.그리고 촉석루에 올라 푸르게 출렁대는 남강 물과 강가의 버들잎을 바라보며 검무를 감상하던 다산은,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기녀에게 주게 된다. 이 시가 바로 ‘칼춤 시를 지어 미인에게 주다’라는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다. 검무를 추는 기녀의 춤사위 동작 하나하나를 놓칠세라 섬세하고 세련되게 시어로 묘사하고 표현한 다산의 통찰력에 감탄을 자아낼 수 밖에 없는 이 시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촉석루 다시 올라 노닐다12년 만에 다시 찾아 인생무상 노래 鷄婁一聲絲管起 - 계루고 한 소리에 풍악이 시작되니四筵空闊如秋水 - 넓디넓은 좌중이 가을물 처럼 고요한데矗城女兒顔如花 - 진주성 성안 여인 꽃 같은 그 얼굴에裝束戎裝作男子 - 군복으로 단장하니 영락없는 남자 모습紫紗褂子靑氈帽 - 보라빛 괘자에다 청전모 눌러쓰고當筵納拜旋擧趾 - 좌중 향해 절한 뒤에 발꿈치를 들고서纖纖細步應疏節 - 박자 소리 맞추어 사뿐사뿐 종종걸음去如怊悵來如喜 - 쓸쓸히 물러가다 반가운 듯 돌아오네.翩然下坐若飛仙 - 나는 선녀처럼 살짝 내려 앉으니脚底閃閃生秋蓮 - 발밑에 번쩍번쩍 가을 연꽃 피어난다.특히 다산이 스물아홉 살이었던, 1790년 두 번째로 진주를 방문한다. 부친인 정재원(丁載遠)이 진주목사로 부임하였기에 아버지를 문안하기 위하여 들린 것이다. 다산은 이 때도 촉석루에 올라 진주의 산수(山水)와 연운(煙雲)을 감상하고 악공과 기녀를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12년 전에 보았던 기녀는, 그동안 살색이 누렇게 변하고 피부에 주름이 생겨, 옛날의 그 기러기와 제비처럼 춤추던 젊고 아리따운 모습이 아니고 동작이 매우 굼뜨고 둔해졌음을 보고 문득 자신도 늙어감을 깨닫게 된다. 이 때 한 늙은 기생하나가 일어나 춤을 추고 나서 칼을 던지고, 다산 앞에 다소곳이 꿇어 앉아 술잔을 권하면서 “인생의 환락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술을 드시고 여러 기생들을 위하여 시를 지어 이 자리를 빛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요청하게 된다. 다산은 함께 합석한 절도사의 권유도 있어 시 한수를 지어 기생들에게 명하여 시를 노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남긴 시가 ‘촉석루에 다시 올라 노닐다(重遊矗石樓)’ 였는데 또한 일부를 다음가 같이 소개하면,黃鶴三登興味窮 - 세 번째 오른 황학루 흥취 한량없는데玄都再過又春風 - 재차 찾은 현도관 또다시 춘풍속이네.花船依柳新添碧 - 버들에 기댄 놀잇배 푸른빛을 더하였고歌妓如花半褪紅 - 꽃 같은 가무 기생 붉은빛 약간 가셨구나.尙有紗籠縣壁上 - 비단으로 싼 고인 시 벽장에 아직 있는데且將羅襪弄波中 - 다시 선녀 거느리고 물결 속에 놀았으면欲知節度分符處 - 절도사 부절 나눈 그곳이 어디런가.正在黃州錦綺叢 - 바야흐로 황주의 비단 속에 계신다네.다산의 부친 정재원은 진주목사로 재직하던 이듬해(1792년)에 진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출처 : 경남연합신문)

 

또한 1823년(순조 23년) 진주목사 홍백순(洪百淳)과 경상관찰사 이지연(李止淵)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춘추(春秋)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지연(李止淵)의 글씨로 ‘의기사(義妓祠)’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1868년(고종 5년)에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이 의기사를 보수하고,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의암별제를 지내도록 한 이래 현재까지 여성들이 제관이 되어 논개의 의로움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이후 6·25전쟁으로 의기사는 완전 소실되었다가 1960년 사단법인 진주고적보존회가 재건하여 현재의 건물로 유지되고 있다. 1962년에 사당 보호를 위해 모의당(募義堂)을 세웠다. 의기사의 정면 좌측에는 ‘을사5적’으로 악명 높은 친일파 이지용에게  “기생 줄 돈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주라.”고 꾸짖었던 의기 산홍(山紅)의 시가 걸려 있다.

 또 정면 우측에는 다산 정약용의 ‘의기사기’와 시 1수가 판각되어 걸려 있다.

 

<의암(義巖)>

의암(義巖)은 임진왜란 때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순국한 바위로 경남도기념물 제235호(2001년9월27일)이다.

 

이 사진은 구글에서 캡쳐했음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최경회(崔慶會)의 후처인 논개(論介)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바위이다. 가로3.65m 세로3.3m의 윗면이 평평하며 사각모양이다. 서쪽면에는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싸움으로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이에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촉석루에서 벌어진 연회에 참석하였으며, 남강의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했다. 이러한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진주 지방의 양반들과 백성이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불렀다.

 

1629년(인조 7년)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이 서쪽바위벽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새겼고, 남쪽에는 한몽삼이 역시 의암이라고 새겼다. 촉석루의 강 아래쪽 절벽에는

 

(一帶長江 千秋義烈 - 일대장강 천추의열)

한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년의 세월을 흐르리라.

는 글을 새겨 충의를 기리고자 하였다.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는 경남도유형문화재 제353호(2000년1월31

일)로 논개의 공적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獨峭其巖 特立其女 女非斯巖 焉得死所

巖非斯女 焉得義聲 一江高巖 萬古芳貞”

홀로 가파르게 우뚝 선 바위에 그녀가 서 있구나.

그녀가 이 바위 아니었다면 어찌 죽을 곳을 얻고, 

이 바위 그녀가 아니었다면 어찌 의로움을 들었겠는가.

남강에 높은 바위 만고에 꽃다운 정절이로다.

1593년6월29일(선조 26년) 임진왜란 제2차 진주싸움 때 진주성이 함락되어 7만여 명의 민·관·군이 순절하자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論介)의 공적비이다. 의암 바로위쪽 암반위의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논개에 관한 이야기는 임진왜란 후 진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1620년(광해군 12년)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지은『어우야담(於于野譚)』에 실려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 진주지역 백성들은 진주성이 함락된 날에 남강변에 제단을 마련하여 논개의 혼을 달래는 한편, 논개의 의로운 사적을 인정해 줄 것을 조정에 요구하였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논개의 사적을 잊지 않기 위하여 1722년(경종 2년) 진주의 선비 명암(明庵) 정식(鄭軾, 1683∼1746)이『어우야담』의 기록을 바탕으로 지은 비문을 내용으로 담아 이 사적비를 세웠다. 이후 비석을 다듬어 놓은 해로부터 18년 뒤인1740년(영조 16년) 가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왕의 명을 받고 이듬해인 1741년(영조 17년) 봄에 비각을 세우고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기와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며 양쪽에 풍판을 달았다.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금석자료로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상황과 논개의 순국사실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비석의 높이는 145㎝이며, 너비는 60㎝, 두께는 15㎝이다.

이 비는 바로밑의 의암과 마주보고 있어 논개의 순국정신을 더욱 흠모하고 있다.

유시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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