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 온 베트남 왕자, 이용상

고려에 온 베트남 왕자, 이용상

 

고려 시대, 우리나라는 벽란도를 중심으로 외국과 활발히 교류했다.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왜, 원나라부터 대식국으로 불린 아라비아, 섬라곡국이라고 불린 태국, 안남국 혹은 교지국이라고 불린 베트남까지.  이 중에서 가장 생소하게 여겨지는 나라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분명 베트남이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야 고려사에 크게 관여했고 이후 조선시대에도 교류를 유지했던 반면, 베트남은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베트남 사람이, 그것도 왕족이 우리나라에 와서 활약한 기록이 있다. 오늘은 한 번 그 베트남 왕족의 생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리왕조(李王朝) 또는 이조(李朝)는 9대 2017년에 이르는 베트남 사상최초의 장기 정권이었다.

리왕조는 베트남인에게는 자부심의 상징이라고 한다. 베트남은 항상 중국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20~3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없었다. 리왕조는 200년 넘게 태평성대를 누렸던 유일한 베트남 왕조였다. 그러나 이왕조는 중국계인 진씨 왕조에 의해 멸망됐다. 왕족 72명 모두 생매장됐고 가까스로 탈출한 리롱펑(이용상)왕자만 탈출에 성공해 살아남았다. 그는 최초의 '보트피플'이 됐다.

 

  리 왕조 사당

 

리왕조를 세운 이태조 이공온

 

 

 

 

 

고려에 뿌리를 내린 베트남 왕자 "이용상"

 

1253년 몽골군이 침략했을 때 리롱떵은 몽골에 맞서 싸워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옹진 화산에 정착했지만, 화산성에 망국단을 만들고 고국을 그리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의 후손들은 리롱떵을 시조로 삼고 본관은 화산으로 삼았다.  현재 화산 이씨들이 바로 베트남 왕국의 왕자 리롱떵의 후예들이다.  1992년 한 , 베트남 수교가 이뤄진 뒤 베트남 정부가 과거 왕족의 마지막 후손들을 수소문해 1995년 780년만에 초청했다고 한다.  당시 도 무오이 당서기장 겸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이 모두 나와 환대했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살기를 희망할 경우 출입국관리 세금, 사업권 등에서 베트남 사람과 똑같이 대우해줬다고 한다.  베트남 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이창근 이충근 2사람으로서, 이들 2명은 과거 리씨 왕조의 후손으로 고려에 이주했던 왕자의 후손들인데 베트남 정부가 과거 "뿌리찾기'의 일환으로 베트남 정부로부터 이창근 가족은 파격적인 지원과 혜택을 받기도 했다.  두 아이들을 베트남 최고의 명문 학교에 입학을 시켰다고 한다. 

 

 

800년전 고려에 뿌리를 내린, 화산 이씨 시조 베트남 왕자 "이용상,

이야기는 채널A 천일야사 79회로 방송되었다.

 

 

 

고려 고종 40년에 몽골군이 대거 침입했을 때 이용상은 이들과 싸워 5개월 만에 격퇴하였다.  적들은 투항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다섯 개의 금함을 예물로 보내왔다.  이용상은 적들의 간사한 꾀를 알기 때문에 그 함에 구멍을 뚫고 뜨거운 물을 부어 그 속에 들어 있던 다섯 명의 자객을 모두 죽여 쉿가루로 금함의 구멍을 막아 적진에 적진에 돌려보냈다.

몽고병들은 크게 놀라 항복하고 군대를 거두어 달아났다.  이 일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이용상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화산군에 봉작 하였고, 그는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국 베트남 25주년 기념 무용극 “800년의 약속”

2017년 강동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국내 초연 되었다.

먼 이국땅이지만 공을 세우며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이용상은 늘상 저 멀리 있는 조국을 그리워해서인지 조국 방향으로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망향의 아픔을 달래다가 세상을 떠났다.

 

 

현재 화산 이씨는 한국에서는 희귀성씨 이지만, 아직도 북한에는 많은 화산이씨의 후손들이 웅진을 포함한 황해도 남부에 밀집되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경상도 안동시 밀양시 진주 이외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리 왕조의 역사적 배경과 멸망을 알아보자.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안남安南이라고 불린 베트남은 리 왕조의 지배 하에 있었다.  리 왕조는 베트남 역사 최초로 중국에서 책봉하는 체제에서 벗어난 왕조로, 200여 년 간 존속하였다.하지만 7대 왕 이용한이 병으로 인해 일찍 사망하고 8대 왕 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혜종 또한 어리고 병약해 국정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기에 백성들의 민심이 요동치고 반란이 빗발친 것이었다.  이에 지방 호족 가문인 진씨가 점차 세력을 키워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진씨는 혜종의 딸 소성공주가 자신들 가문 출신과 혼인한 이후 권세를 잡았고 한 발 더 나아가 혜종을 압박해서 소성공주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하였다.  양위받은 소성공주는 자신의 남편에게 왕위를 강제로 물려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리 왕조가 몰락한 후 진씨 왕조가 새로이 안남국을 차지하였다.  진씨 왕조는 곧 남은 리 왕조 인물들을 제거해 나갔다.  이때 혜종의 숙부이자 진씨의 권세를 막기 위해 노력한 이용상리 롱 뜨엉, 1174~?도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이용상은 간신히 진씨의 눈을 피해 목숨만을 부지한 채 탈출하였다.  이용상의 배가 닿은 곳은 고려 화산오늘날의 옹진반도 지방이었다.  화산 이씨 족보에 의하면 이때 고려 백성들을 약탈하던 도적(몽골군이라고도 전해짐)들을 발견해 그들을 처리해 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옹진 현령과 백성들의 환영을 받은 이용상은 곧 고려 조정에도 가게 되었다.  당시에 고려를 다스리던 고종1192~1259, 재위 1213~1259은 일국의 왕자인 이용상을 화산군으로 책봉한 뒤 벼슬과 식읍을 내려 주었다.  이때부터 이용상은 고려에 완전히 정착해 귀화인이 되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화산 이씨는 이 이용상의 후손 가문이다.  그러던 1253년,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휩싸였다.  이용상은 옹진성 옆쪽의 화산에 살고 있었는데 이곳까지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옹진성의 방비를 맡게 되었다.  이용상은 목책과 토성을 쌓고 굴을 파서 집요하게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내었고, 결국 몽골군이 옹진성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가자 그 공을 인정받아 화산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다.  몽골 진영에서 화친의 의미로 보물이 담겼다는 상자를 보내 왔는데 그 안에 자객이 들어 있는 것을 간파하고 뜨거운 물을 붓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용상은 베트남의 왕자였으나 왕조가 몰락한 뒤 고려에 귀화했고 몽골군을 상대로 싸워 이기기도 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가문이 이후로도 고려에서 벼슬 생활을 하다가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으니 참 유별난 일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단일민족설은 국민통합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말이 되지 않는 논리라고 생각된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도 많은 문화와 인종이 모 일수 밖에 없고 고구려를 예를 들어도 다민족, 다부족 국가였다.

​포용력의 아이콘 고려 태조 왕건 또한 앞선 문물을 받기위해 적극적으로 귀화를 장려하였고 고려인구의 10%가 귀화인 이였다고 한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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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