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하루만 문을 여는 봉암사

일 년중 하루만 산문을 열어 불자들의 참배를 허용 한다는 이 곳 봉암사.

 

 

 

조계종8대 종정을 지내신 서암 대종사 16주기 추모법회에 참석하고자 봉암사에 다녀왔다.

서울 개포동에서 출발하여 이곳까지의 여정은 쉬엄쉬엄 3시간정도의 거리다. 장엄한 하얀 바위의 모습이 주위의 산과 계곡이 오밀조밀 잘 조화되어있으며,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계곡의 물소리에 맑고 청아한 정신이 번쩍 든다. 사월 초순이지만 사방은 신록으로 물들어 간다. 희양산 봉암사 일주문을 지나면서, 그 옛날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던 수행규율을 바로잡고 우리 불교의 전통수행방식인 화두수행방식으로 바로 잡고자 하셨던 성철스님께서 주도가 되어 1947년 가을에 청담, 자운, 보문, 우봉 스님이 문경의 봉암사에 모였다. 이들은 "부처님 당시의 수행가풍을 되살리자"고 결의했다.

 

 

 

 

성철 스님은 '부처님 법과 부처님 제자' 외에는 다 정리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등 '비불교적 요소'는 모두 절에서 몰아냈다. 비단 가사와 장삼도 모아서 태워버렸다. 그리고 승복을 검소하게 바꾸었다.

스님에게 '삼배(옷)'를 올리는 것도 이때 생겼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정신도 따랐다. 스님들이 직접 나무하고, 농사짓고, 밥하고, 물을 길었다. 소작료를 거부하고, 신도들의 보시도 받지 않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한국불교 본래의 화두선풍(話頭禪風)을 재정립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 바로 봉암결사였다. 그 만큼 이곳은 왠지 우리나라 불교의 근원적인 목표와 정화의 의미를 갖고 있는 듯하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내고 수행정진 하여 깨달음에 이르려는 그 근원적 의지가 이어지는 곳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드디어 절입구에 당도하니 남훈루(南薰樓)가 자리를 잡고 있다. 남훈루앞의 모습이나 봉암사 어느 곳이든 희양산의 하얗게 우뚝솟은 장엄한 바위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미 11시가 살짝 넘었다. 추모제는 11시부터인데 우리는 살짝 지각했다. 추모법회가 열지는 대웅보전은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로 인하여 한발 집어 널 공간도 없다. 예불소리가 들려오고 법당 안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서 예불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암스님은 종정과 총무원장을 함께 지낸 몇 명 안 되는 한분이다. 재임 기간은 어느 스님에 비해 짧았다. 총무원장 2개월, 종정 4개월에 불과했다. 총무원장과 종정은 누구에게나 선망의 자리였으나, 서암스님은 감투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언제든 먼저 그 자리를 맡겠다고 마음을 낸 적도 없었다. 종단안정을 원하는 대중들의 요구에 따라 자리에 않았다가, 본인의 역할이 다 했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그 자리에서 내려 않았다. 평생 수좌로서의 강직함을 잃지 않았던 스님의 삶과 마주치고 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서암 큰스님 같은 어른들이 계셨으면 과연 우리 불교가 이렇게 혼탁 하지 않았을 것인데 안타깝다.

 

서암 스님

 

대웅보전 옆에는 봉암사의 역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지증선사 부도탑과 비가 서 있다. 부도탑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유홍준 교수가 저술한‘나의문화유산답사기1권’에 나와 있는 것처럼 장중한 형태와 섬세한 조각으로 9세기 석조 예술의 성숙성을 느끼게 해준다. 탑에 새겨진 문양들은 종교하고 아름다워 감탄을 느끼게 해준다. 그 옆에 있는 비는 최치원의 비문과 승려 석혜강이 썼다는 설명이다.

 

봉암사 경내에서 희양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구석구석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봄기운이 완연한 날 화사한 햇살을 받으며 절 마루에 앉아 있는 시간은 삶의 휴식과 안식을 주는 시간들이다. 더욱이 스님들이 용맹정진 하는 공간을 오늘 서암스님의 추모법회로 오늘하루 특별하게 문을 열은 봉암사의 오늘 하루는 기자의 절인 냥 마냥 머물러 있었다.

 

대웅보전 오른쪽에는 보물 1574호인 봉암사의 주불전인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에는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모셔진 부처님은 아미타여래 좌불로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목조건물로, 신라 헌강왕 5년(879)에 지증국사가 창건한 후 여러 차례 다시 지었으며, 지금의 극락전은 조선 태조 18년(935)에 세운 것이다.

 

 

 

 

 

 

 

 

 

 

 

극락전

 

목탑형 건축물로 탑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진 기단이 독특하다. 기단 바닥에 장방형 판석을 깔았고, 그 위에 중층목탑을 만들었다. 이 극락전은 법주사 팔상전, 1984년 소실 복원된 쌍봉사 삼층목탑과 더불어 목탑양식의 건조물로 매우 소중하다. 목탑형식을 간직한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건물의 하층은 정면3칸, 측면 3칸 홑처마, 상층은 단칸 다포양식의 겹처마로 모임지붕이다. 처마구성은 하층인 경우 각연을 사용하여 홑처마로 구성하고 상층은 겹처마로 처리하면서 처마곡을 크게 잡았으며, 지붕은 모임지붕으로 처리하면서 정점頂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상륜부를 올려 탑의 요소를 모두 갖추어 있다. 

이 극락의 건조수법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불교식 진전 양식으로 유추되는 원당이다. 원당은 원주 개인이나 친족이 특정 사원과 창건, 중수, 보시 등으로 관계를 맺고 거의 독점적으로 발원이나 운영에 참여하여 원주의 안녕과 명복을 기원하는 사찰 혹은 사찰 내의 특정건물을 말하며,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발원에 의해 설치된 원당이 전국 명산대찰에 수없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봉암사는 신라 경순왕 때부터 왕실의 지원을 받았으며,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진영을 봉안한 왕실원당이었고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내부에는 어필각이라는 현판이 있다. 어필각은 임금이 직접 글씨를 써서 내려준 건물이라는 뜻이다.

이 건물은 여러 번에 걸친 봉암사의 큰 화재 속에서도 소실을 면하였으며, 다른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린 임진왜란의 병화 속에서도 이 극락전만이 남았다고 한다.

‘일화가 있다. 임진왜란 때, 다른 사찰 건물들을 다 태운 왜병들이 극락전에 불을 붙이기 위하여 불타는 장작개비를 지붕 위에 올려놓았더니 장작개비만 그냥 타버릴 뿐 신기하게도 극락전에는 불이 붙지 않아 왜병들이 극락전 소각을 단념하였다는 것이다.’

 

추모법회가 열리고 있는 대웅보전 왼쪽 밑에는 “금색전”이라는 현판을 건 전각이 있다. 이 금색전 뒤편에는 대웅전이라는 현판도 보인다. 한 전각에 앞면은 금색전, 뒷면은 대웅전을 같이 내건 보기 드문 경우다

 

 

 

 

 

 금색전

 

그 앞에는 3층석탑(보물169호)이 서있다. 이 금색전과 3층 석탑 지증대사탑비(국보315호)와 지증대사부도탑(보물137호)은 2편에서 다루겠다.

 

 

 

3층 석탑

 

지증대사비탑

 

지증대사 부도탑

 

다음으로 찾은 곳은 마애보살좌상이다. 절 앞에 계곡다리 건너 계곡벼랑길을 10분정도로 가면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나타나는데 찾아가는 산길도 사람들이 찾지 않아 잘 보존된 숲길은 아름답다. 높이 6.0m, 너비 4.5m.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1965년 3월에 조사된 이 불상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좌상으로서 백운대(白雲臺)라고도 불리는 옥석대(玉石臺)의 북벽에 만들어진 감실(龕室)모양 안에 양각되어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나지막한 육계(肉髻)에 계주(髻珠)가 뚜렷하다. 비교적 큰 귀가 달려 있는 갸름한 얼굴에는 우뚝한 코와 치켜진 가느다란 눈, 꾹 다문 입 등이 잘 조화되어 있으며, 양 눈썹 사이에는 백호공(白毫孔)이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고 통견(通肩)의 법의(法衣)에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뚜렷한 옷주름선은 유려하다. 두 손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한줄기의 연꽃가지를 잡고 있는데, 이러한 손모양은 동화사염불암마애보살좌상(桐華寺念佛庵磨崖菩薩坐像)과 거의 같아 주목된다.

손 밑에 드러난 발은 두 손과 더불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대좌는 단판연화좌(單瓣蓮花座)로서 마멸이 심하다. 전체적으로 탄력과 힘이 감소되고 형식화된 여말선초의 양식을 보여주는 이 불상은 고려 말 조선 초기 마애불상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마애보살좌상

 

수행을 하고 나서 잠시 포행을 하며 거닐 스님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곳이 바로 우리 불교 중심인 선불교 정수의 도량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곳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난다. 마애불의 모습 또한 선명하고 사실적인 모습에 감탄을 하게 된다.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 하면서 자연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마애불 앞으로는 계곡물이 흐르는데 바닥이 그대로 보일 정도로 맑다.

다시 오기 어려운 이곳을 그냥 가기가 아쉬워서 하얀 희양산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풍경 속에 젖어 본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호젓하고 아름다운 시골마을과 봉암사로 가는 산길, 그리고 봉암사의 모습, 마애불로 가는 길, 마애불이 있는 곳을 거치면서 마음과 정신이 맑아지고 청명해지는 느낌이다. 이곳이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러한 아름다운 풍경뿐만 아니라 오늘날 불교의 선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게 하는 수행처의 으뜸가는 곳이고, 타락하고 왜곡된 불교가 정화된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성철, 서암 같은 큰스님들을 기다려보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은 아닌지 라고 생각해본다.

 

 

 

 

봉암사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봉암사는 지금부터 약 1100여년전 신라 헌강왕 5년에 _지증국사께서 창건한 고찰이다.

당시 이곳은 신라 문화의 정수인 선풍을 크게 일으켜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파의 주봉을 이루었던 곳이다. 특히 신라 제 49대 헌강왕은 화풍으로 소폐하고 혜해로 유고할 유신정치를 뜻하고 있었는데 이런 헌강왕의 개혁 의지에 이념을 제공한 것이 지증대사의 선이었다. 그후 봉암사는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였는데 고려시대에도 많은 고승을 배출하여 불교중흥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던 대선찰이다. 그런데 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소실된 것을 불기 2499년(1955) 금색전 을 비롯해 여러 건물을 다시 건립하였으며 최근의 도량으로 모습을 일신하게 되었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화되고 극락전만 남았을 때인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조선조 세종대왕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 를 저술하였고. 1674년 다시 소실된 절을 신화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쇠퇴하였다.

 

구한말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다. 1915년 윤세욱스님이 요사와 영각, 창고 3동을 신축하였고, 1927년에는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다. 근래에 들어 당시 조실을 지낸 전 조계종 종정 서암스님과 주지 동춘스님 후임 원행, 법연스님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적조탑비, 정진대사 원오탑, 정진대사 원오탑비, 봉암사 삼층석탑등의 성보문화재가 옛 선사의 향기를 은은하게 전하고 있다.

 

해방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 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 곳이 봉암사였다

< 봉암사 홈페이지에서 인용 >  유시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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