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대(利見臺)와 만파식적(萬波息笛)

이견대는 사적 제159호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호국정신이 깃들인 해중왕릉 대왕암(大王巖)이 보이는 감은사지(感恩寺址) 앞에 있다.

이견대(利見臺)와 만파식적(萬波息笛)


지난 11월 23일자 호국의 상징 경주 문무대왕릉에 이어 마지막 세번째 유적지가 이견대다.




이견대는 사적 제159호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호국정신이 깃들인 해중왕릉 대왕암(大王巖)이 보이는 감은사지(感恩寺址) 앞에 있다. 만파식적은 통일 신라 시대, 신문왕 때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된다는 신라 전설상의 피리다. 문무왕이 죽어서 된 해룡(海龍)과 김유신(金庾信)이 죽어서 된 천신(天神)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서 보냈다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다. 이것을 불면 온갖 소원이 성취되어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682년 壬午 5월 초하루의 일이었다. 海官(해양 담당 관원) 아진찬 朴夙淸(박숙청)이 동해에 작은 산 하나가 물결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감은사를 향해 오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神文王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日官(일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한 관원) 김춘질에게 占을 치게 했다.

일관이 아뢰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동해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고 있습니다. 또 김유신공도 지금은 인간세계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이 덕을 함께 하여 이 城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동해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을 것입니다“

임금은 기뻐하며 그달 7일에 이견대로 나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신하를 보내 살펴보도록 하였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고 산 위에 대나무가 하나 있는데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져 하나가 되었다. 임금은 감은사에서 머물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가 갑자기 진동을 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동안이나 어두웠다. 5월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도 가라앉았다. 임금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다가가니 용이 나타나서 검은 옥대를 임금에게 바쳤다. 이 산의 대나무가 하나이다 때로는 둘이 되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용이 대답한다.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도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니 이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임금의 아버님은 동해의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큰 보물을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나올 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습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임금은 5월 17일 감은사를 떠났다. 가는 도중에 기림사 서쪽 냇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태자 理恭(이공)이 마중을 나왔다. 태자는 옥대를 보고 마디마디가 모두 용인 것을 알았다. 그 옥대의 왼쪽 둘째 쪽을 떼어 계곡에 넣으니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고 그 자리에 연못이 생겼는데 龍淵(용연)이라고 한다.

태자는 나중에 효소왕이 된다. 대궐로 돌아오자 바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보관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들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멈추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萬波息笛(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 때에 이르러 693년에 화랑 夫禮郞(부예랑)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이라고 하였다. 정태상 사진 구글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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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