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소

장군의 유해는 마지막 통제영이었던 고금도(완도)에 모셔졌다가 이듬해인 선조 32년(1599) 아산시 금성산에 안장되었고, 16년 후인 광해군 6년(1614)에 이곳(응봉면 삼거리 산2-1)으로 이장되었다.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인종1년(1545) 음력 3월 8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임진왜란 때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와 삼도수군통제사를 거치면서 옥포, 한산도, 부산, 명량 등에서 일본 수군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선조 31년(1598),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서 퇴각하는 일본 수군과 노량에서 맞서 싸우다 54세를 일기로 그해 11월 19일 남해 관음포에서 전사하였다. 장군의 유해는 마지막 통제영이었던 고금도(완도)에 모셔졌다가 이듬해인 선조 32년(1599) 아산시 금성산에 안장되었고, 16년 후인 광해군 6년(1614)에 이곳(응봉면 삼거리 산2-1)으로 이장되었다.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충무공묘소는 부인 상주 방씨와 합장묘로서 조선시대 고관묘의 전형적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석물로는 상석, 혼유석, 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동자석, 석양 등이 있으며, 묘소 뒤의 곡장(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은 1970년대에 설치되었다. 묘소에 있는 좌측 묘비는 충무공의 5대는 충민공 이봉상이 이이명에게 부탁하여 숙중 46년(1720)에 비문을 짓고, 영조52년(1776)에 세워졌으며, 우측 묘비는 1988년 충무공 이순신 순국 400주 년을 추모하여 충무공 후손들이 세웠다.

정조대왕어제신도비(正祖大王御製神道碑)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고, 서체는 당(唐)의 세예가 안진경체인데 이는 정조의 명에 의한 것으로서, 안진경이 당대 안사(安史)의 난과 이희열(李希烈)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죽은 것이충무공의 정신에 합당하다하여 그의 서체를 쓰게 하였다고 한다. 비석 상단엔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 “충절을 높이며 무공을 휘날린다”는 뜻으로 비석 제목이 쓰여있다. 1979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이를 한글로 번역한 가로 모양 비석이 별도로 세워졌다. 한글로 번역된 아래 내용의 어제신도비를 읽어보면 정조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던 명장수들도 모두 다 한때의 영웅이로되 적이 쳐들어와 고기와 새우가 뛰고 바닷물이 뒤집히는 때를 당해서는 그저 백 리나 물러나서 나갈까 말까하는 두 가지 생각을 안품는 이가 없었다. 8년 동안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수비하면 반드시 보전하여 나라 운명이 공의 움직임을 따라 강했다 약해졌다 하고 적의 칼끝은 그 때문에 꺽어져 마침내 여러 곳에 소굴을 짓고 날뛰던 간사한 놈들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느라 덤벼들지 못하게 만들어 우리 장하신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심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히 비명(碑名)을 짓지 아니하고 그 누구의 비명을 쓰겠는가"

왕이 신하의 묘소에 친히 비문을 쓴 것은 조선에선 오직 충무공뿐이다. 법치가 무너진 오늘날 충무공 같은 분이 나타나 탐욕에 찌든 간악한 작당들이 배척되고 충무공을 존경한 정조, 김육, 박정희 같은 분들이 나타나길 기원해 본다.
           홍살문  

           김육 이충무공 신도비


이순신의 외손자 홍우기가 효종 때 영의정 김육에게 청하여 비문을 지어 만든 것으로 숙종 19년(1693)에 세워졌다. 비문 첫머리에서 김육은 “임진왜란 때 도원수 권율과 통제사 이순신 두 분이 아니었다면 나라를 구하지 못했을 것"인데 "도원수의 무덤에는 큰 비석이 있지만 통제사의 무덤에는 아직도 사적을 기록한 비문이 없어 여러 선비들이 유감으로 여긴다." 라고 하였다.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비석 머리에 용을 조각한 머릿돌을 얹은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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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