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이름 서로 다른 세 개의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평양에서 서울까지 고구려 불상의 드라마틱한 여정
국보 제 78호, 83호, 118호 ‘금동반가사유상’

같은 이름 서로 다른 세 개의 국보

평양에서 서울까지 고구려 불상의 드라마틱한 여정
국보 78·83·118호 ‘금동반가사유상’


▲ 같은 이름을 갖고 있지만 서로 다른 세 개의 국보. 좌로부터 국보 제78호·83호·118호

  ‘금동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 / 삼성미술관 리움



국적(백제? 신라?) 미상의 78호 반가사유상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 말이 어렵다. 풀이하자면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린 '반가부좌(半跏趺坐)'의 자세로 생각에 잠겨있는 불상을 말한다. 금동은 청동에 금박을 입혔다는 뜻이다. 6~7세기경에 만들어진 같은 듯 서로 다른 반가사유상은 약 40여 개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중 3개가 국보로 지정되어있다.


▲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 삼국시대 때 유행한 반가사유 형식의 불상 중 대표적인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한국 불교 조각 예술의 극치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두 개의 불상이 있다. 1962년 12월 20일 같은 날 각각 국보 제78호와 83호로 지정된 '금동반가사유상'이다. 한팔에 감길 듯한 잘록한 허리. 가는 허리 위로 착 달라붙은 얇은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가냘픈 몸매. 의자에 앉아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 가늘고 긴 손가락을 볼에 살짝 댄 채 깊은 명상에 잠겨있는 모습은 중생들을 인간의 경계를 넘어 신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무엇보다 화려함의 절정은 머리 장식에 있다. 탑 모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형식으로 '일월식 보관(日月蝕寶冠)'이라 한다. 해와 달, 새의 날개, 나무와 꽃잎 등으로 꾸몄다. 삼국시대 때 유행한 반가사유 형식의 불상 중 대표적인 것이다. 오묘한 표정과 옷의 무늬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이다.


▲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의 머리 부분. 화려함의 절정은 머리 장식에 있다. 탑 모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형식으로 ‘일월식 보관(日月蝕寶冠)’이라 한다 ⓒ 국립중앙박물관



이 불상은 1912년 일본인 골동품 수집가 후치가미데이스게(淵上貞助)로부터 조선총독부가 기와집 2채 값인 4000원에 구입 한 것이다. 앉은키 81.5cm 무게 37.6kg, 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이 작품의 국적은 어디일까.

구입 초기에 경상도 안동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신라에서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U자형 옷 주름 양식이 백제 부소산성 출토 반가상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백제설에 힘이 실리기도 했지만 정확한 국적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

머리에 둥근 산 모양의 ‘삼산관(三山冠)’을 썼고 상반신에 옷을 걸치지 않았다. ⓒ 국립중앙박물관


83호 반가사유상은 일본 국보 1호의 '모델'?

78호 반가상과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국보 83호. 앉은키 90.8㎝, 몸무게 112.2㎏으로 78호 보다 조금 더 크고 무겁다. 머리에 둥근 산 모양의 '삼산관(三山冠)'을 썼고 상반신에 옷을 걸치지 않았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자애로운 얼굴 표정에서 소년의 순박함이 묻어난다.

목에는 두 줄의 목걸이가 걸려 있고 하반신으로 유연하게 흘러내리는 치맛자락이 다리를 감싸고 대좌를 덮고 있다. 78호에 비해 소박하고 푸근한 얼굴에 몸매도 넉넉하다. 눈을 아래로 가늘게 뜨고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모습은 종교적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 눈을 아래로 가늘게 뜨고 깊은 사색에 잠겨있는 모습은 종교적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 국립중앙박물관



1912년 '이왕가박물관 (李王家博物館)'이 서울에서 활동한 일본인 고미술상 가지야마 요시히데(楣山義英)로부터 2600원을 주고 산 작품이다.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83호 또한 국적 미상이다.

83호 반가상은 일본 조각부문 국보 1호인 교토(京都) '고류사목조반가사유상 '과 쌍둥이라 할 만큼 너무 닮았다는 점에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중국에서 들어온 반가상이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파된 까닭에 일본의 국보제1호 고류사 목조반가상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물며 같은 장인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 '일본서기 (日本書紀)'에는 "623년 신라에서 가져온 불상을 고류지에 모셨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 불상의 재료를 분석한 결과 한반도에서 많이 나는 붉은 소나무, 적송 (赤松)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사실과 일본서기의 기록은 이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 83호 반가상과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고류사 목조반가사유상.  83호 반가상은 일본 조각부문 국보 1호인 ‘고류사 목조반가사유상’과 쌍둥이라 할 만큼 너무 닮았다는 점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Wikipedia japan



삼성에서도 아끼는 반가상의 원조, 118호 고구려 반가사유상

삼국시대 유행하던 반가상은 백제와 신라에서만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었으나 1964년 3월 또 하나의 불상이 국보로 지정됐다. 출토지가 확실하게 밝혀진 118호 고구려의 금동반가사유상이다. 높이 17.5㎝로 78·83호 비해 크기는 훨씬 작지만, 6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세 개의 국보 중 맏형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 반가상은 1940년 평양시 평천리에서 병기창 공사 중 우물터에서 발견됐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랜 세월 흙 속에 묻혔던 터라 군데군데 도금이 벗겨지고 오른쪽 팔과 손이 떨어져 나가고 없다. 다른 반가상과 같이 손을 턱에 괴고 깊이 사유하는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3호처럼 머리에 삼산관을 쓰고 있다. 상체는 옷을 입지 않았고 하체에는 치마를 걸쳤다.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다. 올해 4월 삼성에서 국가에 기증한 약 2만3000여 점의 '이건희컬렉션'의 목록에는 이 불상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만큼 삼성에서도 아끼는 보물이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80년 전 평양에서 발견된 고구려 반가상이 어떻게 서울까지 오게 됐을까. 사연이 드라마틱하다.


▲ 국보 제118호 고구려 금동반가사유상. 출토지가 확실하게 밝혀진 고구려 금동반가사유상으로

평양시 평천리 병기창 공사 중 우물터에서 발견됐다. 세 개의 국보 중 맏형 격이다 ⓒ 삼성미술관 리움



1940년 어느 날 평양에서 '화천당(華泉堂)'이란 골동품상을 운영하던 김동현에게 공사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인부가 녹이 슬고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불상을 들고 찾아왔다. 김동현은 금속문화재 전문가이기도 했던 터라 첫눈에 불상의 가치를 알아차리고 거금 6000원을 주고 이 반가상을 구입 하였다.

당시 평양에는 일본인 골동상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중에는 일제 강점기때 한반도 전역에서 우리 문화재를 쓸어 담다시피 해서 일본으로 가져간 '오구라컬렉션 (Ogura collection)'으로 악명 높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가 있었다. 소문을 듣고 대구에서 올라온 오구라는 당시 기와집 250채 값인 50만 원을 제시했지만 김동현은 일본인에게 우리 문화재를 넘길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 후로도 일본인들의 회유와 협박은 집요했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되었고 김동현은 소련 군정을 피해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울로 내려왔다. 몇 년 후 6·25 가 터졌다. 김동현은 부인을 서울에 홀로 남겨두고 목숨처럼 아끼던 문화재 몇 점만을 챙겨 안전한 부산으로 급히 내려갔다.

김동현은 부두 노동자로 어렵게 연명하면서도 고구려 반가상을 지켰다. 고구려 불상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3억 원에 팔라는 유혹도 있었지만 전쟁 중 반가상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던 터라 쉽사리 넘길 수는 없었다.


▲ 오랜 세월 흙 속에 묻혔던 터라 군데군데 도금이 벗겨지고 오른쪽 팔과 손이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다른 반가상과 같이 뺨에 손을 살짝 대고 깊이 사유하는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반가상을 지켜준 김동현의 문화재 사랑에 경의를 표한다 ⓒ 삼성미술관 리움


전쟁도 끝났고 고구려 반가상도 무사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는 없었다. 1992년 김동현의 나이 80살이 넘어가고 있었다. 자식이 없던 그는 자기보다 더 고구려 불상 의 가치를 알아주고 안전하게 지켜줄 곳이 필요했다. 1980년부터 삼성의 호암미술관과 인연을 맺어 왔던 김동현은 마침내 이건희 회장에게 고구려 금동반가사유상을 양도했다. 이후 이건희 회장은 '김동현 특별전'을 열어주고 거처를 마련해주는 등 김동현을 극진하게 대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했던가. 고구려 반가상을 삼성에 넘기고 몇 년 후 김동현은 '비로소 안심한다'는 듯이 편안히 눈을 감았다. 분신처럼 아껴주던 김동현은 떠났지만 고구려 반가사유상은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해 깊은 종교적 사유에 잠겨있다.  글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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