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민간에서 널리 활용된 '동람도식 지도책'

조선 후기에는 이 지도책이 민간에서 널리 활용된 대중적인 지도였고 그 결과 현재까지도 전해지는 수량이 수백 종에 이른다. ‘동람도식 지도책’은 지역의 개략적인 모습만 그려져 있어 그동안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 내내 민간에서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 민간에서 널리 활용된 '동람도식 지도책'

고지도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지도와는 차이가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조선시대 지도 중에서 대표적으로 ‘동람도식 지도책’을 보더라도 과학적 측량에 의한 정확한 지도는 아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이 지도책이 민간에서 널리 활용된 대중적인 지도였고 그 결과 현재까지도 전해지는 수량이 수백 종에 이른다. ‘동람도식 지도책’은 지역의 개략적인 모습만 그려져 있어 그동안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 내내 민간에서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국립중앙도서관, 서울역사박물관을 비롯한 10개 기관에 ‘동람도식 지도책’ 114종이 소장돼 있다.


01.『신증동국여지승람』(古4790-45)의 「팔도총도」, 1611년 간행, 목판본, 36.7×22.1cm ©규장각한국학연구원 02.『지도(地圖)』(가람古912.5-J561)의 「동국팔도대총도」, 1676년 전후, 목판본, 31.2×18cm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 전기 지리지를 집대성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지리 정보에 대한 설명을 보충하기 위한 부도(附圖)로서 조선전도인 「팔도총도(八道總圖)」와 8장의 도별도가 실려 있다. 이 지도들은 판심에 ‘동람도(東覽圖)’라는 글자가 있어서 9장의 지도를 모두 합하여 ‘동람도’로 불린다. 동람도는 목판의 크기와 모양에 맞춰 그렸기 때문에 「팔도총도」의 한반도 전체 윤곽이 왜곡됐고 내용은 산과 하천만을 중심으로 간추렸다(그림 1).

16세기 후반부터 동람도를 별도로 떼어 만든 독립적인 지도책이 등장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의 『동국지도(東國地圖)』는 동람도에서 조선전도를 제외한 8장의 도별도를 모은 지도책이다. 지도의 기본 윤곽과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참고해서 만들었지만 고을 이름 옆에 고을의 옛 이름, 수령의 품계, 도내 좌우(左右)·동서(東西)·남북(南北) 소속을 적거나 지도 여백에 찰방역(察訪驛)과 진보(鎭堡)를 기록하는 등 지리지 내용을 새롭게 편집하여 지도책으로서의 기능을 보완했다(그림 3). 도별도 뒤에는 고을별로 사방 경계에 이르는 거리와 서울로부터의 거리 정보를 정리한 도별 지계리수(地界里數)를 수록했다. 이처럼 동람도를 기초로 만들어진 지도책을 학계에서는 ‘동람도식 지도책’, ‘동람도형 지도’, ‘동람도 유형’ 등으로 부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명(明) 중심의 세계질서 붕괴를 경험하고 이 무렵 전래된 서양식 세계지도를 접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지도 제작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동람도식 지도책’은 조선 팔도에 더하여 조선을 둘러싼 지리 정보를 결합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조선에서 해석한 관념적 세계지도인 ‘천하도’와 외국지도(중국, 일본, 유구국)를 추가해서 천하도-중국도-일본국도-유구국도-조선전도-도별도(8장)로 구성된 13장의 형태로 완성됐다. 이 시기부터 등장한 ‘동람도식 지도책’은 여지도(輿地圖), 여도(輿圖), 지도(地圖)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전한다(여지도 명칭은 지도 또는 지도책이란 보통명사로 이해하면 된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의 17세기 후반 『지도(地圖)』는 13장으로 구성된 ‘동람도식 지도책’의 전형을 갖추고 있다. 조선전도 「동국팔도대총도(東國八道大總圖)」에는 묘향산(妙香山), 구월산(九月山), 풍악산(楓岳山:금강산), 태백산(太白山), 한라산(漢拏山)과 대동강(大同江), 임진강(臨津江), 금강(錦江), 낙동강(洛東江) 등의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이는 「팔도총도」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제작 당시 민간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던 명칭으로 지도의 윤곽은 여전히 동람도를 따랐지만 사용자 중심으로 지리 정보가 수정됐음을 알 수 있다(그림 2). 지도책의 속성은 더욱 부각되어 도별도(道別圖)마다 소속 고을 수를 적고 고을 이름 옆에는 서울에서 각 고을까지 걸리는 시간을 기록했으며 찰방역과 진보 위치는 지도에 직접 표시해서 지리 정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지도』의 이러한 형식과 내용은 이후 ‘동람도식 지도책’에 그대로 이어지거나 이용자의 필요에 따라 다른 정보를 추가하면서 19세기까지 목판본과 필사본으로 다양하게 제작됐다.

03.『동국지도』(一簑古912.51-D717) 경기도 부분: 가평 군수, 양주 목사, 포천 현감 등 지방관의 배치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 후기 ‘동람도식 지도책’의 지도사적 가치는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지도의 모습과 내용을 보면 이 정도로 빈약하고 정확하지 않은 지도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의문점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 정확한 지도 제작의 수준이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동람도식 지도책’은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지도에 대한 수요에 부응하여 지도의 정확성보다는 하나의 책자에서 전국 고을단위까지의 정보를 파악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자료였다. ‘동람도식 지도책’의 전체 모습은 거의 동일하지만 이용자의 필요에 따라 정보를 수정하고 편집해서 활용했던 실용적인 지도였다는 점에서 당시 지식인들의 지리인식 수준과 범위를 추측할 수 있다. 글, 사진. 김성희(김포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