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의사를 기억하자

오늘은 이봉창 의사의 의거일이다.

1월 8일은 이봉창 의사를 기억하자


왜왕 히로히토(裕仁)의 신성불가침이 1932년 1월 8일 무너졌다. 이봉창 의사가 던진 수류탄은 안타깝게도 왜왕 히로히또를 폭살 시키지 못하였다. 도쿄 사쿠라다몬(櫻田門)에서 이봉창이 던진 수류탄에 물샐틈 없는 왜왕의 경비망이 뚫렸고 그것은 전 세계에 대한제국의 얼이 죽지 않았음을 알린 대한독립의 밝은 빛을 보여준 희망이었다.

이봉창 의사는 1919년 3·1운동을 목격하면서 강렬한 민족 의식을 갖고 독립 운동에 헌신할 것을 스스로 서약 했다. 이후 김구(金九)의 주선으로 한인애국단에 1호 단원으로 가입하여, 왜왕의 암살을 자원하여 1년 이내에 실행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당장 거사 자금이 없었으므로 상하이의 일본인 인쇄소와 악기점 등에서 일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재미동포로부터 자금이 도착한 데 이어 상해병공창(上海兵工廠)의 주임으로 있던 중국군 대령 김홍일(金弘壹)과 중국인 류즈(劉峙)로부터 수류탄 2개를 입수함으로써 거사 준비가 마무리되자, 1931년 12월 13일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두 손에 수류탄을 들고 왜왕 히로히토(裕仁)를 처단할 것을 선서했다.

                                 1931년 태극기 배경으로 수류탄을 양손에 든 채 기념 촬영
                                보물 제2200호 _ 이봉창 의사 선서문 (李奉昌 義士 宣誓文)

수류탄과 거사 자금 300원을 지니고 일본으로 떠나 이튿날 고베(神戶)에 입항한 이봉창 의사는 오사카로 옮겨 21일까지 머물다가 22일 밤 도쿄에 도착했다.  왜왕 히로히토가 만주국 괴뢰 황제 푸이(溥儀)와 도쿄 교외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거행한다는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의 보도 기사를 확인하고 상하이의 김구에게 관병식을 기회로 거사를  결행을 하겠다는 뜻을 암호 전문으로 타전하고, 요요키 연병장에서 거행된 예행 연습을 미리 둘러보았다. 1932년 1월 8일 도쿄 고지마치구(麴町區) 밖 사쿠라다몬(桜田門) 앞에서 시민을 가장하여 기다리던 이봉창 의사는 오후 2시에 관병식을 마친 후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왜왕의 행렬이 나타나자, 군중 속에서 뛰어나와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왜왕이 탄 마차를 정확히 식별하지 못한 데다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기수와 근위병에게만 부상입혔을 뿐 왜왕을 폭살시키지는 못했다. 의사는 그 자리에서 품 안에 있던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 만세를 3번 부른 뒤 체포되었다. 거사는 실패했지만,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중국의 각 신문으로부터 한국인의 애국적 기개에 대해 매우 고무적으로 대서특필했으며, 이에 격분한 일본 당국은 군경을 동원하여 중국 신문사를 습격했다. 또한 이 의거는 당시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임시정부와 중국 정부의 항일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다.


                                1932년 1월 10일자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이봉창 의사 의거


                                        이봉창 의사 동상, 효창공원에 있다.


일본은 이봉창 의사의 의거 영향으로 한층 거세진 중국의 항일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니치렌종(日蓮宗)) 승려 살해 사건을 빌미로 상하이사변(上海事變)을 일으켰다.  이봉창 의사는 일본 경찰의 모진 심문에 일체 불응한 가운데 예심조차 거치지 않고 진행된 그해 10월의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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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