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19

한양에서 철원으로가던 이백리 고개길 축석령

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19

한양에서 철원으로가던 이백리 고개길 축석령

의정부시에서 포천시를 향해 북쪽으로 달리다 보면 두 도시의 경계부에 해발고도는 높지 않지만, 주변에 비해 제법 높아 보이는 축석령을 만나게 된다. 해발고도가 158m에 불과한 축석령을 넘으면 시원하게 트인 포천 분지가 펼쳐진다. 이 고개는 이백리 고개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한양에서 철원까지의 거리가 2백 리에 달한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이 고개의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포천천을 거쳐 한탄강으로 가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중랑천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간다.

이 고개는 의정부시 북쪽의 관문 역할을 해왔다. 조선 시대에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던 간선도로 가운데 한양에서 수유리를 지나 의정부와 축석령을 통과하는 길은 제2로인 경흥로였다. 이 길은 한양에서 강원도 원산을 지나 동해안을 따라 두만강 하구 근처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동국대지도 축석령(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축석령(祝石嶺)이란 지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포천읍 어룡리에 부사를 지낸 오백주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해 벼슬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있는데 부친께서 위독하다는 연락을 전해 듣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부친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어떤 약도 효험이 없어 하늘을 탓하며 탄식만 하고 있는데,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석밀(석청)을 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오백주는 석청을 구하기 위해 온 산을 헤매고 다녔는데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가 죽으면 아버지는 누가 돌본단 말인가 하며 통곡을 하자 호랑이는 간데없고 바위만 남아 그 틈에서 석청이 흘러나왔다. 석청을 구해 아버지를 먹여 병이 완쾌되자, 사람들이 오백주의 효성에 산신령이 호랑이를 바위로 변하게 했다고 하여 이 바위를 범바위(효자바위)라고 불렀다. 그 후 효자 오백주는 매년 이 바위에 와서 부모의 만수무강을 빌었다고 해서 지역의 지명을 '축석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조정에서 오백주에게 효자정문을 내려 효심을 후세에 길이 전하게 하였고 범바위를 1994년 3월 9일 호국로 공원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범바위(효자바위)


축석령을 넘는 길은 금강산 유람가던 선비들이 이용하기도 했고, 죄를 지어 북쪽의 오지로 귀양을 가던 사람들이 지나던 귀양길이기도 했다. 축석령을 넘던 길은 통행량이 많았으므로, 경흥로변에 있는 포천시 송우리에는 커다란 주막촌이 생기기도 했다. 축석령은 조선 시대 양반들이 여행가는 길에 하룻밤 숙박을 했던 곳이다. 동학혁명이 발생했던 1894년 5월에는 일본의 군대가 강원도 동해안의 원산항에서 경흥로를 따라 축석령을 넘어 서울로 진입하려 했으며, 일본군과 의병 간의 크고 작은 전투가 축석령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축석령 길은 왕실에서 광릉을 알현하는 능행길로 이용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정조는 광릉을 알현하고 돌아오는 길에 축석령에 당도해 행렬을 멈추고 같이 간 신하들에게 “이 고개는 곧 백두산의 정간룡(正幹龍)이요, 한양 도성을 지나는 협곡이다. 좌우의 산봉우리들이 선명하고 아름다우며 빼어나고 윤택하여 마치 규장(珪璋) 같기도 하고 관패(冠佩) 같기도 하고, 층층이 공중에 핀 연꽃 같기도 한데, 벌떡 일어서기도 하고 잔뜩 웅크리기도 하고 달려가 치솟기도 하고 치달려 한곳에 뭉치기도 하여 지극한 정신이 모두 한양 한 구역에 모였으니, 곧장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탁 트여 응접할 겨를이 없게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규장은 장식으로 사용하는 귀한 옥을 가리키고, 관패는 관리들의 몸에 두르는 장신구를 의미한다. 축석령이 있는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한북정맥에 해당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광릉은 조선 7대 왕인 세조와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이다.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측에 있는 릉이 세조의 릉이고 오른쪽에 있는 릉이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릉이다.


일제가 신작로를 개설하면서 축석령을 넘는 자동차 도로가 발달했다. 지금의 축석령 고갯길은 일제때에 개통된 신작로의 서북쪽으로 새롭게 만들어졌다. 축석령은 근대에 들어서도 강원도 철원에서 의정부를 지나 서울로 들어서는 주요한 길목으로 기능했다. 이 때문에 6·25전쟁 당시에도 축석령에서는 매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옛길의 옆에는 6.25 전쟁 당시 축석령에서 열악한 무기로 맞서다 전사한 호국영령을 모신 의정부 현충탑과 축석령 전투 전적비가 조성되어 있다.

북괴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수십 배의 우세한 병력과 장비로 38선 전역에 걸쳐 공격을 감행, 수도 서울을 단숨에 함락코자 철원과 김화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중부 전선을 주공격 방향으로 선정하여 전차 156대와 병력 28,000명 등 당시 북괴의 화력 1/3을 그리고 각종 대포, 박격포 등으로 이곳 축석령으로 집중 공격을 실시 하였다. 당시 국군 7사단은 제1연대를 동두천에 제9연대는 포천 방면에서 6700명이 방어를 하고 있었으나, 북괴의 전차 공격으로 9연대가 무너지고 불과 7시간 만에 포천이 점령되고 말았다.

육군본부에서는 수도경비사령부 제3연대를 송우리에 증강 시키는 한편 대전에 위치한 제2사단을 의정부 방면에 긴급 투입토록 명령을 내렸다. 송우리에서는 포천에서 남하하는 전차를 맞아 포병학교에서 급파된 57 미리 대전차 포대가 북괴 전차에 사격을 했지만 적의 사이드카 부대만 섬멸시키고 전차는 아군의 진지를 돌파해 버리자 3연대는 많은 피해를 입고 도로 좌 우측 능선을 따라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축석령에서 반격하기로 되어 있던 아군의 2사단은 공격 준비시간까지 겨우 1개 대대만 도착하여 축석령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고 당시 포병학교 교도 2대대 (제50포병대대의 전신)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김풍익대대 (105 미리 M3 야포)는 2사단을 화력으로 지원하기위해 금오리에 진지를 점령한 것이 25일 밤12시였다.

김풍익 대대장은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 방법은 근접거리에서 직접 조준사격뿐이라 생각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여 김풍익 소령, 포대장 장세풍 대위와 1개 분대 6명 및 포 1문으로 된 결사대를 이끌고 축석령 밑 1.6Km에서 조준사격 준비를 완료하고 있을 때, 괴뢰군의 전차가 100m 이내로 다가오자 조준사격을 실시하였다. 뒤에 남아 있는 포대에서는 전포대장 최진식 중위 지휘하에 포사격으로 결사대를 엄호하고 있었다. 선두에 있는 전차를 파괴하고 환희를 지르던 결사대는 두 번째 포탄을 장전하던 중, 후속의 적 전차의 집중 포격을 받아 결사대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 이 들의 장렬한 전사로 인하여 서울 함락 시간을 지연시켜 대응체계를 갖추는데 크게 기여한 중요한 전투였다.

정부에서는 1950년 8월 김풍익 소령에게 을지 충무 무공훈장이 추서되었지만, 결사대의 포병들은 축석령 자일동 마을 사람들이 근처에 묻어 주었으나,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채 축석령의 어느 곳에 잠들어 있는 한 많은 고개이기도 하다.



현재는 국도 제43호선이 통과하며, 의정부시와 포천시에 걸쳐 있는 구간의 도로명은 호국로이다. 호국로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대교에서 시작해 의정부시, 포천시를 거쳐 강원도 철원군까지 연결된다. 축석령의 동쪽에는 세종포천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축석령 터널이 뚫렸다. 축석령의 북쪽에서 광릉으로 연결되는 광릉수목원로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던 길이다. 정조가 광릉을 알현하고 축석령으로 향했던 길도 이 길이었다.  이미지 네이버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