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호국 보훈의 달 2

유시연은 한말 전기 의병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순국한 의병장이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 2
한말 영남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유시연

유시연은 한말 전기 의병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순국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전주. 1874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 고천에서 태어난 유시연은 이명은 시연(時然), 승일(承一). 자는 박여(璞汝), 호는 성남(星南). 유연각(柳淵覺)에게 수학했으며, 어려서부터 전사(戰史)와 병서를 탐독하는 한편 장성한 후 나라의 위급을 걱정하며 부국강병 하는 방법을 찾기 위하여 수레바퀴, 활, 창, 화약 등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시연은 "외국의 도적이 돌입해서 국내에 변고가 이다지 크게 되니 우리가 밥 먹고 옷 입고 앉아서 구차하게 살기만 하려 한다면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겠느냐"라고 하며 경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킨 권세연(權世淵)이 각지로 격문을 보내어 연락을 취해오자 유시연은 그를 찾아가 선봉장이 되었다. 당시 경상북도 일대에서 유선봉(柳先鋒)의 이름을 모르는 아이가 없을 정도로 유시연은 영주, 봉화, 의성, 청송 등지에서 용맹하게 항전을 전개하였다.


                                                                          명성황후 국장


                                     영국에 전달된 제2차 한일협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고종황제의 친서


전기 의병항쟁이 끝난 후 유시연은 비밀리에 조카 유창식(柳昌植)·유인식(柳寅植) 그리고 이현규(李鉉奎), 신돌석(申乭錫)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의병을 모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서울에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고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유시연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1906년 봄, 경주 분황사에서 각지에서 모인 의병장들과 연합하여 의병대를 결성하고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유시연은 진보, 영덕 등지에서 전투를 벌인 후 이강년(李康秊)의 진과 연합하기 위하여 소수의 의병만을 이끌고 삼척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친일파 박두일(朴斗日:혹은 朴斗榮)의 계략으로 본진이 깨지자, 울진십이령(蔚珍十二嶺:혹은 三陟十二嶺)에서 박두일을 사살한 뒤 영양, 청송, 안동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과 교전해 일본 수비대와 경찰서를 격파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리는 등의 활약을 하다 점차 그의 행적이 적에게 노출되고, 현상금이 걸리게 되자 유시연은 변장하고 다니며 계속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숨어다니며 비밀리에 계속 의병투쟁을 이어가던 유시연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되자 국내에서는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만주로 이동하였다. 1911년 8월 만주로 망명해 이상희(李象羲), 김동삼(金東三)을 찾아가서 안창호(安昌浩) 등과 같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던 중 그는 각지의 알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1913년 6월 영천군 서선면에서 한인 순사에게 붙잡혔다. 1913년 대구 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아 1914년 1월 29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안동 유시연 묘소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