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백제의 관문, 라제통문(羅濟通門)

일제시대의 아픔보다 삼국시대의 화합으로 기억되기를 원해서, 백제와 신라의 관문으로 인식

무주구천동 제1경 : 라제통문(羅濟通門)

일제시대의 아픔보다 삼국시대의 화합으로 기억되기를 원해서, 백제와 신라의 관문으로 인식

전라북도 무주 설천면에서 무풍면으로 가는 길목에 작은 굴이 하나 있다. 라제통문(羅濟通門)이라고 한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이루던 곳으로써 두 나라가 국경 병참기지로 삼아 한반도 남부의 동서문화가 교류되던 관문이었다. 삼국의 통일 전쟁 무렵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드나들었다 하여 ‘통일문'이라고도 불리는데 현재 무주구천동 33경 중 제1경에 속한다.


라제통문은 설천면의 두길리 신두(新斗)마을과 소천리 이남(伊南)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석견산(石絹山)에 위치한 바위굴로써 높이 3m, 길이 10m다.



삼국시대에는 석견산 바위 능선을 경계로 동쪽의 무풍은 신라 땅이었고 서쪽의 설천, 적상면과 무주읍 등은 백제 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라제통문과 관련하여 의자왕의 딸 비화 공주와 무열왕, 김유신에 관한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백제와 신라의 전쟁이 끝날 즈음 의자왕이 사망한 뒤, 라제 통문에 머물러 있던 신라 진영에 의자왕의 딸 비화 공주가 찾아가 스스로 백제의 궁녀라 속이고 무열왕 앞에 가서 무열왕을 죽이려 했다가 실패했지만, 비화 공주의 기품과 기개를 높이 산 무열왕은 백제 군사에 의해 죽었던 자신의 딸을 떠올려 비화 공주를 살려주고 다시 백제로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 라제통문은 사실과 다르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기록에 따르면 라제통문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굴이 아니며, 일제시대에 일본이 착취를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즉 1910년께 일본이 근처의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쉽게 운반하기 위해 굴을 뚫었다는 것이며 당시 ‘기니미굴’이라고 불리다가 일제시대의 아픔보다 삼국시대의 화합으로 기억되기를 원해서 1960년대 무주구천동 33경을 설정하면서 이름을 바꾸고 백제와 신라의 관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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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