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길

조선통신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민족사에 큰 상처를 준 전쟁의 시대를 평화의 시대로 바꾸어 간 역사였다.

열두 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길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일본의 요청에 의해 조선 왕실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이다. 조선 시대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세종대부터이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뒤 얼마 동안은 통신(通信)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부당하다며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 1607, 1617, 1624)’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이 3회의 사행에 쇄환(刷還)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잡혀간 포로의 쇄환이 주요한 파견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좀 더 흐른 1636년(인조 14) 이후 통신사라는 명칭을 회복할 수 있었다.

통신사의 역할에 따라 명칭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모든 사절이 통칭이 아닌 정식 조선통신사로 인식하는 경우를 많이도 본다. 여기서 그 사절들의 종류, 명칭을 깊이 들여다보자.

조선 통신사 ㅡ 通信使
국서를 지참한 국왕 사절단이다. 통신사는 조선이 일본에 파견했던 사절의 명칭이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신뢰가 깊은 시기에 대규모의 공식 외교사절단을 일본에 보낼 때 조정에서 특별히 붙여진 명칭이다.

회답겸쇄환사 ㅡ 回答兼刷還使
국서를 지참한 국왕 사절단이다. 조선 시대, 일본에 보내는 통신사(通信使)를 한때 고쳐 부른 이름이다. 더 쉽게 설명하면 회답사 + 쇄환사이다. 쇄환刷還이라 함은 일반 백성이나 노비 등이 원 거주지를 이탈하여 이산(離散)하였을 때 이들을 찾아 원 거주지로 돌려보냄을 말한다.

보빙사 ㅡ 報聘使
외국에 우호 친선및 교섭을 위한 보빙(報聘ㅡ답례로 외국을 방문함) 명목으로 파견하는 사절단이다. 고려말에는 왜구의 침탈로 일본에 붙잡힌 백성들을 데려오고자 보빙사(報聘使)로서 일본으로 건너가 사행使行문화를 전파한 최초의 통신사 역할이었다.

회례사 ㅡ 回禮使
사례의 뜻으로 나타내는 예이다. 고려, 조선 시대에 교린관계(交隣關係)에 있는 나라와 내왕한 사신을 가리킨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일본과의 외교관계서 이루어졌다. 조선왕조에서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다가 임진왜란 후 이를 격하하여 회답사(回答使) 또는 회례사를 보내었다. 일본이 통신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왜에 대한 감정이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고 하여 회답사를 파송하였다.

탐적사 ㅡ 探賊使
이 단어는 현재의 우리 국어사전이나 일본의 사전에도 찾기 힘든 용어다. 한문의 풀이로 말할 때 〈상대방에게 해를 입힐 것인가를 정탐하는 사절〉이다.

회답 겸 쇄환사’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한 세 차례를 포함해 통신사라는 이름을 회복한 이후 1811년(순조 11)까지 아홉 차례, 총 열두 차례의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에 걸쳐 일본에 보내진 300~500명의 인원은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0개월까지 걸리는 긴 여정에 참여했다.


                                                            근강명소도회 조선 빙사, 작자 미상, 1811, 전우홍 소장
조선의 정사선(正使船)이 돛을 펴고 항해하는 모습이다. 정사가 탄 배임을 표시하는 ‘正’자가 나부끼고 있으며, 사행단과 선원들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조선 통신사가 상륙한 시모노세키


                                         진도일기 조선통신사 행렬도」, 종이에 채색, 25.7×19.2cm, 일본 소장
1811년 5~7월 초까지 2개월여 간 사행을 갔던 조선통신사 일행의 모습이다. 열여섯 명의 인원이 정사가 탄 가마를 메고 가고 있다.


               조선통신사 내조도, 하네카와 도에이, 종이에 채색, 69.7×91.2cm, 1748~1750년경,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1748년 일본을 방문한 제10회 조선 통신사의 행렬이다. 에도의 니혼바시 부근을 지나고 있다. 통신사의 복장과 깃발 등이 꼼꼼하게 그려진 한편, 막을 치고 병풍을 세워 관람석에서 구경하는 군중의 모습도 흥미롭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마츠리를 그린 그림이라는 설도 있다. 가마 안의 인물이 어린 소년의 모습이라는 점 등이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같은 작가가 그린 그림 중 또 하나는 통신사 행렬도로 알려져 있다.


                                                      조선통신사의 국내외 주요 여정지.  [사진 국립해양박물관]


한양을 출발 충주, 안동, 경주, 부산을 지나, 쓰시마(對馬島), 이키(壹岐), 아이노시마(藍島), 시모노세키(下關), 가미노세키(上關), 우시마도(牛窓), 무로쓰(室津), 효고(兵庫),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히코네(彦根), 나고야(名古屋), 오카자키(岡崎), 시즈오카(靜岡), 하코네(箱根), 에도(江戶), 닛코(日光, 1636, 1643, 1655)에 이르는 긴 여정에 오르게 된다.

이 가운데 1636(인조 14), 1643(인조 21), 1655(효종 6)년의 세 차례 사행 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묻혀 있는 닛코산(日光山)을 들르는 절차가 추가되어, 조선통신사의 가장 긴 여정은 서울에서 대마도, 에도를 거쳐 닛코까지 이르는 길이 된다. 정사, 부사, 종사관의 삼사(三使)를 비롯하여 통역을 맡은 통사(通事), 제술관, 사자관, 의원, 화원, 자제군관, 서기, 마상재, 전악(典樂), 소동(小童), 기수, 포수, 세악수, 쟁수, 취수, 숙수(熟手), 사공과 격군, 포수, 도척(刀尺), 풍악수 등이 통신사의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업무를 담당했다.

이들의 여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조선과 일본의 교류를 알려주는 역사적 현장 그 자체가 되었고, 통신사행을 다녀와 남긴 수많은 사행록(使行錄)은 조선 시대 외교관계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몸속 깊이 새겨진 일본 체험 기록은 오늘날에도 흥미진진하게 읽히고 있다. 국왕의 명을 받아 왕의 국서(國書)를 가지고 에도에 도착하여 이를 전달하는 전명의(傳命儀)까지 행하면 통신사행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마치게 된다. 전명의 이후에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노정에 들어서게 된다. 조선통신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민족사에 큰 상처를 준 전쟁의 시대를 평화의 시대로 바꾸어 간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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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